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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May 14. 2021

우리에겐 5월의 광주가 있다

1980년 5월 18일의 광주는 이제 영광의 역사가 돼야 한다.

요즘은 매년 5월이 올 때마다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방송에서 5월 18일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가열차게 쏟아내며 5·18 민주화운동을 재조명하는 광경을 적지 않게 목격하게 될 때마다 그렇다.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을 광주에서 보낸 나는 늘 매년 5월마다 광주 지역방송에서 특집기획으로 소개하는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방송을 봤지만 훗날 서울로 다시 올라온 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심지어 심각하게 왜곡된 관점으로 해당 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어떤 표정을 떠올리곤 했다.


“아, 글쎄, 사람을 장갑차로 밀어버렸당께!” 학창 시절 광주에서 어느 노인의 입에서 튀어나와 내 귓바퀴를 뱅그르르 돌아 나가던 언성은 지금까지도 가슴속에 메아리처럼 울리는 것 같다. 나는 그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가 좀처럼 흩어지지 못하는 연기처럼 매캐하다고 느꼈다. 노인의 원망에는 굴뚝이 없었다. 그래서 아마 노인의 삶도 매웠을 것이다. 유년 시절부터 학창 시절까지 광주에서 살았던 내가 느낀 광주는 굴뚝 없는 원망들이 매캐한 연기처럼 남아버린 도시였다. 그 이후로 내게도 아궁이가 생겼다. 그리고 5월 18일쯤 되면 매운 기분을 느꼈다.


지난 5월 13일부터 시작한 KBS2 <대화의 희열 3> 1화에 초대된 게스트는 소설가 황석영이었다. <대화의 희열>은 유희열을 비롯한 진행자 네 사람이 특별한 게스트 한 명을 초대해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쇼다. 그리고 시즌3 1화에 출연한 황석영은 6·25 전쟁부터 4·19 혁명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까지,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는 황석영 작가의 입을 통해 그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다가올 5월 18일을 앞둔 시점에서 시의성 있는 기획을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날 대화에서도 5·18 민주화운동을 언급하는 시간이 적지 않았다.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놀라운 건 실제로 그것이 좀처럼 언급되기 어려웠던 시절을 목격하며 자라온 탓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방송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을 언급하는 것이 조심스러워 보였다. 광주나 전라도 지역 방송을 제외한 여타의 방송국에서는 5·18이라는 숫자 세 개를 연결하는 것 자체가 금기처럼 느껴지는 시절도 있었다. 5·18 폭동에서, 5·18 사태로, 5·18 민주항쟁에서 끝내 5·18 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고 그렇게 발음되기까지 그 역사가 견뎌야 했던 시간은 그 역사를 그림자처럼 가둔 세상의 무심함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와 사람의 특징은 변화에 있다는 오랜 명제는 결국 역사를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의 힘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삶의 한계 때문에 한 시대는 언제나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공존하며 하루아침에 멋진 신세계가 찾아오지는 않는다.” 1985년에 간행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첫 판본이 나온 지 30여 년이 지난 2017년에 발행한 개정판 머리말 일부의 내용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공수부대의 학살과 함께 항쟁이 시작된 1980년 5월 18일부터 계엄군의 전남도청 장악과 함께 항쟁이 끝난 27일까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 담긴 저서다.


당시 광주 출신 후배였던 이재의, 전용호의 요청에 의해 공동 저자로서 출판 과정에 참여하게 됐다는 황석영 작가는 <대화의 희열 3>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당대의 스타작가였다. 1974년부터 <한국일보>에 연재한 역사 대하소설 <장길산>과 1983년부터 <월간조선>에 연재한 <무기의 그늘>은 그를 당대의 문호로 각인하는 대표작이자 출세작이었다. 그런 그가 당시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씨의 군부 독재로부터 폭동으로 규정된 5·18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저서에 대표 작가로 이름을 올린 것 자체가 굉장한 사건이었다.


역시 본방송에서도 언급됐지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허구로 재구성된 이야기가 아니라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육을 생생한 증언으로 재현하는 기록물에 가깝다. 책을 읽어 내려가며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낀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위 참가 여부에 상관없이 사람들을 구타하고 연행해 가혹하게 고문하며 살인을 마다하지 않았던 당시 공수부대원들의 야만적이고 무차별적인 폭력 행위는 종종 믿음을 흔들고 감당의 역치를 시험하는 수준에 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18일 당일 최초의 희생자는 청각 장애인이던 김경철 씨였다. 그는 시내를 돌며 구두를 닦거나 신발을 만들어 팔며 가족을 건사했다. 여느 날처럼 시내에서 일감을 찾아다니던 그는 충장로 제일극장 골목 입구에서 공수부대원들과 맞닥뜨렸고 그중 한 명이 휘두른 진압봉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공수부대원들은 쓰러진 김경철 씨를 군홧발로 걷어차고 소총 개머리판으로 내리찍었다. 김경철 씨와 마찬가지로 청각 장애인인 친구 두 사람도 함께 휘말려 구타를 당했다. 그들은 청각 장애인이라고 최선을 다해 의사를 전달했지만 되레 ‘병신 흉내를 낸다’며 더욱 심하게 구타당했다.


후에 국군 통합병원으로 실려 간 김경철 씨는 19일 새벽 3시에 사망 판정을 받았다. 뒤통수가 깨지고, 왼쪽 눈알이 터지고, 오른팔과 왼쪽 어깨가 부서졌으며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졌다고 했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에겐 갓 백일이 지난 딸이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군홧발에 밟히고, 진압봉과 개머리판에 맞고, 대검에 찔리고, 총에 맞아 죽어갔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군인 수는 2만 명에 달했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창설되고 조직된 군인이 자국민을 억압하는 것을 넘어 사냥하듯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것이 참 많다. 이미 1980년 5월의 광주에 관한 적지 않은 기록이 제시됐고, 영상이 존재하며, 목소리가 전해졌지만 여전히 세상에 닿지 못하고 떠도는 사연이 너무 많다. 그런 의미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조명하고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진다는 것은 분명 반갑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왜곡된 진실은 언제라도 제 모습을 회복해야 하며 억울한 사연은 어느 때라도 진실을 만나 위로받아야 한다. 그것은 그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불의에 밀려 후진하는 역사를 앞으로 밀어내려 분투하던 이들의 희생으로 굴곡진 시간을 묻어두고 나아가다 보면 계속 발이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다. 비록 한 번 나아간 역사가 뒤로 물러나는 법이 없는 건 아니라 해도 한 번 나아가 본 데까지는 다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의 관성이므로 우리는 거기까지 밀고 나아간 이들의 발자취를 수습하고 보존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역사를 변화시킨 사람의 힘을 보존함으로써 오늘과 내일의 역사는 보다 단단하고 굳건하게 보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비단 우리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난 2월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독재로 인해 매일 같이 심각한 유혈사태를 맞이하고 있는 미얀마는 그야말로 거대한 광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국민을 향해 총을 격발하고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군인들의 모습에 적지 않은 한국인이 5·18 민주화운동을 떠올렸을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은 믿을 수 없는 풍경을 통해 믿을 수 없도록 형형해진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국경 안에 모여 사는 것을 넘어 한 세계의 일원이므로, 한 지역의 역사는 한 국가의 역사를 넘어 한 세계의 역사로 너르게 수렴한다.


결국 우리가 보존하고 조명하는 이 역사는 결국 이 세계의 누군가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용기를 전하는 악수인 셈이다. 그러므로 광주의 5월은 이제 통증을 넘어 영광의 역사로 기록되고 언급돼야 마땅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하루아침에 찾아오지 않을 멋진 신세계를 위해 역사를 변화시킨 사람의 힘을 널리 전파하는, 진정한 홍익인간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바로 그런 역사다. 우린 그런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다. 국뽕은 이럴 때 빠는 것이다.


('예스24'에서 운영하는 패션 웹진 <스냅>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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