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소유하고 싶어서 구입하는 컬렉터의 시대에서 LP란 무엇인가.
바이닐,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LP를 수집하게 될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말이다. 이미 비좁은 집에 CD를 1천 장 넘게 소유하고 있는 입장에서 듣지 않는 음반은 정리를 하라는 아내의 구박까지 감내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LP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12년 가을쯤 만난 김영혁 음악평론가 덕분이었다. 당시 피처 에디터로 일하던 <엘르>의 20주년 창간기념호를 준비하며 다양한 분야의 20년 뒤를 예측해보자는 기획 기사를 진행하게 됐고, 각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 의견을 묻게 됐는데 음악 분야에서는 김영혁 음악평론가의 자문을 구하는 것이 적합하게 느껴져 인터뷰 요청을 했고, 가로수길의 한 카페에서 만나 1시간여 동안 인터뷰를 진행했다. 미국에서 LP 시장이 부활한다는 이야기를 그때 처음 들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100만 장 안팎이었던 판매량이 500만 장까지 급증했다는 요지였고, 판매량이 상승세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동교동에 김영혁 음악평론가가 LP를 판매하는 음반가게 '김밥레코즈'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매장을 소개할 겸 방문하게 됐다. 원래는 LP를 구입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건 사야 하는 것이야!’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의 일러스트 커버로 제작된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마스터> OST LP를 대면하는 순간 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 외에도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버드맨>과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 등 몇 장의 OST LP를 질러버렸다. 그냥 갖고 싶었다. LP를 돌릴 수 있는 턴테이블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하나 같이 이미 CD로 소유한 앨범이었음에도 그랬다. 커버가 너무 멋있으니까, 이건 질러야 된다는 본능의 목소리에 따라 집어 들고, 결제를 요청하고, 카드를 긁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아내에게 구박을 받았다.
그날 구입한 LP는 턴테이블이 없는 집에서 돌아갈 일이 없었다. 대신 앞뒤로 책을 넣을 수 있게 짠 두꺼운 원목 책장 앞에 커버가 잘 보이도록 세워놓았다. 커버가 멋있어서 구입했으니까 늘 눈에 띄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점점 책장에 세워지는 LP가 하나씩 늘어났다. 영화 OST뿐만 아니라 커버아트가 예쁜 LP를 주로 구입하기 시작했다. 물론 들어본 적이 없는 앨범은 구입하기 전에 유튜브를 비롯한 온라인 경로를 통해서 미리 음악을 들어보고 내가 좋아할 만한 음악인지 미리 파악하긴 했다. 그래도 음반이니까, 내 취향이나 기호와 완전히 어긋난 음악이 담긴 LP를 커버아트가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사기에는 꺼림칙했던 거다. 그래도 어쨌든 커버가 예쁜 LP를 사서 새롭게 책장에 세워두면 새로운 그림을 거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기분에 따라 새로운 LP를 바꿔 세우면 나만의 갤러리를 갖게 되는 기분이었다. 물론 아내의 구박도 더해졌지만 그래도 마냥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문제는 생각 이상으로 LP 구입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몇 장 남짓하던 것이 수십장에서 100장 가까이 늘었고, 어느 정도 진지하게 정리가 필요한 물건이 돼버렸다. 그리고 아내는 듣지도 못하는 LP를 자꾸 사는 게 말이 되냐고 타박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즈음에 포터블 턴테이블을 하나 구입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아내의 눈총이 더욱 거세지는 느낌이었지만 막상 LP로 음악을 듣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물론 대단한 음질을 자랑하는 앰프나 스피커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LP를 턴테이블에 올리고, 돌아가는 턴테이블에 바늘을 올리는 흐름은 CD를 플레이하는 과정과 완전히 판이한 세계였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에서 빠르게 회전하는 인듀어런스 호에 도킹을 시도하는 탐사선 레인저 호의 긴장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할까. 마치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집어넣듯 플레이하는 CD로 음악을 들을 때와는 판이한 즐거움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음원을 스트리밍해서 음악을 듣게 된 건 최근 일이었다. 아이팟 터치를 사용하긴 했지만 CD에서 리핑한 음원을 옮겨 들었기 때문에 음악을 듣는 기본 단위는 음반이었다. CD였다. 하지만 LP는 아니었다. 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내 또래 친구들에게 가장 익숙한 음반의 형태는 카세트테이프나 CD였다. LP는 과거형이었다. 그래서 다시 카세트테이프가 유행한다는 소식은 반갑지만 LP의 유행은 어딘가 생소했다. 하지만 LP를 손에 잡는 순간 알았다. 음반을 소유하는 경험을 아는 이들에게 LP는 소유욕을 부추기는 끝판왕이라는 것을 말이다. 카세트테이프에서 CD로 갈아탔을 때 느꼈던 즐거움은 보다 큰 커버아트를 가진 부클릿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LP의 커버아트는 CD보다 5배 이상은 크다. 게다가 LP의 커버는 종이 재질의 케이스라 부클릿을 삽입한 CD의 플라스틱 케이스와 다른 만족감이 촉각을 통해서도 전해진다. 특히 2LP로 구성된 게이트 폴더 커버를 확 펼쳐볼 때의 포만감은 그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흥미로운 건 물리적으로 음악을 소유해본 경험이 드문 세대가 요즘 LP를 수집한다는 사실이다. 요즘은 한정판 컬러 LP 발매가 잦아지며 몇몇 인기 뮤지션의 앨범은 빠르게 품귀 현상이 일어나 수집가들의 마음을 쫄깃하게 만드는데 최근 그런 방식으로 제작된 여느 뮤지션의 한정판 앨범에서 튀는 현상이 발견되자 불량이 감지되는 해당 알판을 교환해주겠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그런데 문제는 애초에 앨범 비닐을 뜯지도 않았고,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소유한 음반이 불량인지 알 길이 없다는 하소연이 이어진 것이다. 심지어 턴테이블도 없어서 어차피 확인할 길도 없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들은 LP를 음악을 듣는 매개체로 소유한 것이 아니라 그냥 소유 자체가 목적이 되는 물건이 된다는 것이다.
인기 아이돌 그룹이 멤버들의 화보컷을 잔뜩 삽입해 음반 케이스보다도 두꺼워진 부클릿을 제공하고 해당 음반의 소매가격을 높여도 팬들은 산다. 포장을 뜯지 않은 보관용과 부클릿을 확인할 수 있는 확인용을 포함해 서너 개 이상의 CD를 사는 팬들도 있다. 심지어 CD플레이어가 없지만 음반을 사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지금 시대의 음반이란 음악을 듣는 도구가 아니라 해당 음악을 만든 아티스트 자체를 소유한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굿즈에 가까운 물건이 됐다. ‘전축이나 오디오 따위의 회전판에 걸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만든 동그란 물건’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음반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소리를 듣기 위해서 소비되는 물성으로 정의되는 것 이상의 물건이 됐다. 이제 음반을 산다는 건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고스란히 소유하는 의식과도 같은 일이다.
최근에는 인기 아이돌 그룹의 앨범이 한정판 LP로 발매되기도 한다. 그리고 한정판이라는 이름을 걸고 나오는 대부분의 LP는 검은색이 아닌 다양한 색을 입힌 컬러 LP로 발매된다. 그러니까 이제 커버아트뿐만 아니라 LP의 알판 자체가 소유욕을 자극하는 특별한 굿즈이자 디자인 소품으로 진화했다는 의미다. 전 세계 1000장 한정, 전 세계 500장 발매 등 적은 수량으로 제작됐다는 사실을 명시하는 포장비닐 겉면의 스티커는 갖고 싶다는 마음을 더욱 깊게 건드린다. 단순히 신보만 그렇게 제작되는 게 아니다. 오래된 아티스트의 명반이 한정판 컬러 LP로 재발매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오래된 리스너를 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지금 시대에 새롭게 LP로 음악에 입문한 이들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레전드급 아티스트의 명반이 한정판으로 발매됐다는 소식은 새롭게 '입덕'할 아티스트를 배우는 길로 통한다. 요즘은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음악을 검색해서 들어볼 수 있는 시대다. 음원으로 들어보고 마음에 든다면 LP를 구입해도 된다. 한정판이라면 더더욱 부지런히 그 가치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
LP의 유행을 ‘아날로그의 귀환’이란 식으로 정의하는 경우가 많은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아날로그는 분명하지만 귀환이 아니라 시작에 가깝다. 지금 LP를 사는 Z세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져보는 물건의 ‘힙함’을 즐기고 있다. 그들에게 LP는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쿨하고 새로운 것이다. 턴테이블의 침압에 따라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조차도 흥미로운 것이다. 이토록 크게 소유해본 적 없는 최초의 음악이다. 결국 이런 물성의 감각은 음악을 듣는 방식에도 새로운 변화를 줄 것이다. ‘뉴트로’라는 단어로 쉽게 정의되는 작금의 분위기는 한 시대를 가리키는 현상을 넘어 지속적으로 변이하고 진화하는 흐름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결국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진화의 방향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흐름일 것이다. 대세가 된다는 건 결국 평범해진다는 것이다. 외면하게 된다고 느낀 것이 희소성의 가치를 획득한다. 그리고 결국 희소성의 가치를 지닌 것을 우린 욕망하게 돼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음악을 소유하는 21세기적인 방식으로, LP의 시대가 왔다. 귀환이 아닌 도래, 그야말로 새로운 시작이다.
('문화역서울 284'에서 기획/주관한 전시 '레코드284' 전시도록에 특별기고한 칼럼을 재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