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범과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우승이 있었던 1997년의 여름에 대해.
“아따, 너 말 겁나 희한하게 해분다잉.” 1991년, 초등학교 3학년 때 내려간 광주에서 표준어는 겁나 희한한 말이었다. 요즘은 아니겠지만, 당시엔 그랬다. 그 뒤로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광주 사투리에 익숙해질 때쯤 최루탄 냄새에도 적응했다. 전집 옆에서 전 굽는 냄새가 나는 것이 당연하듯 매년 5월 광주에서는 최루탄 냄새에 컥컥거리는 것이 당연했다. 더운 여름에도 창문을 닫고, 익숙하다는 듯이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를 견뎠다. 광주는 그런 곳이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광주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대선 투표를 밤새워봤다. 뭣이 중헌지 모르는 초등학생들도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되길 염원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격돌했던 1992년 대선 다음날 학교에서 만난 친구가 발음한 첫마디가 지금도 생생하다. “염병, 져 불었어야.” 애들도, 선생도, 부모님도, 도시 하나가 통째로 침울했다. 1997년 대선에서 드디어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광주는 2002년 월드컵 당시 광화문 광장 같았다. 광주의 모두가 그랬는지는 몰라도 내 주변에 있는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는 이가 하나 없었다.
1997년은 해태 타이거즈가 마지막으로 우승한 해였다. 해태 타이거즈는 김대중만큼이나 광주 사람들을 한 곳으로 당기는 이름이었다.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과 오리 궁둥이 김성한 그리고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 이끄는 해태 타이거즈는 무적이었고, 광주의 자랑이었다. 역시 믿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경기가 열릴 때 사람들은 김대중을 연호했다. 그리고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요즘 말하는 떼창이었다. 그 시절 광주는 그런 곳이었다.
1997년의 해태 타이거즈에 선동렬은 없었다. 그가 무등산 폭격기가 아닌 나고야의 태양이 된 것도 1년 전 1996년의 일이었다. 1996년의 해태 타이거즈는 선동렬의 일본 진출과 김성한의 은퇴로 전력이 떨어지는 팀으로 평가받았고, 심지어 그해 꼴찌 성적을 기록할 것이란 예측도 있었다. 하지만 바람이 불었다. 이종범은 안타를 치고 나가 2루를 훔쳤고, 3루까지 훔치더니, 홈까지 쇄도했다. 다섯 번 안타를 치면 다섯 번 홈을 밟았다. 홈런도, 도루도 20개 이상을 치는 선수였다. 1996년 해태 타이거즈는 그렇게 이종범이 일으킨 바람과 함께 우승했다.
1997년 여름의 무등경기장에서는 더 이상 김대중을 연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관중석의 파도타기는 여전했고, ‘목포의 눈물’도 불렀다. 그리고 이종범도 있었다. 1997년 해태 타이거즈는 2년 연속 우승을 노리는 팀이었다. 지난해와 달리 시즌 전부터 약체가 아닌 우승 후보로 분류된 강팀이었다. 그해 여름 동안 해태 타이거즈는 LG 트윈스와 정규시즌 1위 경쟁을 다투고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매일 같이 학교에서 어제 있었던 해태 타이거즈 경기를 말하거나 들었다. 대체로 진 날의 대화는 ‘염병’ 혹은 ‘니미’로, 이긴 날의 대화는 ‘아따’ 혹은 ‘워메’로 시작됐다. 잘해도, 못해도 흥분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기승전이종범'이었다. 그해 이종범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도루왕이었고, 3할대 타자였고, 끝내 30개 홈런까지 기록하며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3할/30홈런/30도루를 기록한 선수가 됐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 이후로 무등경기장에서 가장 크게 울려 퍼진 이름이었다.
1997년 7월, 해태 타이거즈는 비로소 정규시즌 1위에 올랐고, 끝내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정규시즌 1위로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따내면 끝내 우승을 차지했던 전통은 그해에도 계속됐다. 한국시리즈에서 이종범은 홈런 3개를 쳤고, 공수에서 종횡무진했다. 마치 이종범과 LG 트윈스의 승부처럼 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태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9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1997년은 이종범이 해태 타이거즈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우승이었다.
다음 해 이종범은 일본으로 진출했고, 그렇게 ‘동열이도 가고, 종범이도 간’ 해태 타이거즈는 모기업의 부도로 돈도 없는 구단이 돼서 끝내 선수들을 팔며 연명하다 사라졌다. 비록 기아 타이거즈가 타이거즈의 역사를 이어갔다 해도 1997년의 여름 같은 타이거즈는 돌아오지 않았다. 비로소 10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종범의 모습에 콧날이 시큰했던 2009년도 1997년 같지 않았다. 그때만큼 뜨거운 야구를 본적도, 뜨겁게 말해본 적도 없었다. 1997년의 해태 타이거즈는 내겐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계절이었다. 그런 여름은 다신 없을 것이다.
('GQ KOREA' 6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