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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un 11. 2021

'펜트하우스 3' 게임의 법칙

<펜트하우스 3>는 개연성 같은 건 더 이상 필요 없는 드라마가 됐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재미없는 칭찬이 유재석 칭찬이라면, 가장 재미없는 비판은 <펜트하우스> 비판일 것이다. 그렇다. 지난 6월 4일에 시작한 <펜트하우스 3>에 관한 이 글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글이 될 팔자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트하우스 3>에 대해 말하는 건 전례 없는 이 드라마가 보여주고 있는 몇 가지 현상에 대한 흥미 때문이다. <펜트하우스>는 이제 해당 작품보다도 작품을 둘러싼 분위기를 읽는 흥미가 더욱 크게 다가오는 드라마가 되고 있는 것 같다.


국내 드라마 역사에서 유례없이 짧은 휴지기를 두고 연이어 세 시즌을 방영하고 있는 <펜트하우스>는 분명 여러모로 대단한 화제작이다. 지난 두 시즌과 달리 한 주에 한 회만 방영하는 <펜트하우스 3>는 첫 화부터 19.5%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기록적인 시청률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지난 두 시즌과 마찬가지로 첫 회부터 시청자의 전두엽을 마비시키겠다는 야심이라도 품은 것처럼 시종일관 몰아치는 사건을 연이어 제시하며 특유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리고 점점 어떤 자신감이 커지고 있다는 인상도 함께 드러난다.


이제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펜트하우스>의 서사 전개가 더 이상 말이 되는지를 따져 묻지 않는다. 그리고 김순옥 작가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펜트하우스 3>를 논할 때 서사라는 단어는 장식에 불과하다. 그저 사건이 나열될 뿐이다. 사건의 전후 구조, 즉 인과 혹은 내러티브의 나열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과의 나열도 정교하지 않다. 그저 전후 과정이 존재할 뿐이다. 반전이라는 단어로 치장한 깜짝쇼를 거듭하며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말이 되는 것이었다는 착시를 거듭 주입한다.


이는 <펜트하우스>의 빠른 사건 전환에 중독된 시청자들이 더 이상 그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묻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펜트하우스>의 시청자들은 주요 인물 중 누군가가 죽을 때 그가 어떻게 살아 돌아올 것인지부터 궁금해한다. 그 죽음이 정말 그렇게 무마할 수 있는 일인지 따져 묻지 않는다. 대부분의 시청자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알면서도 그 속도감과 파괴력을 즐기기 위해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펜트하우스>는 인과보다도 결과로 즐기는 드라마가 됐다.

그런 면에서 <펜트하우스>는 게임을 즐기는 방식과 유사한 감상을 부르는 드라마처럼 보인다. 게임의 서사 구조가 <펜트하우스>처럼 우격다짐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게임의 서사에도 인과가 있고, 그러한 인과가 쌓여서 만들어내는 이야기 양식이 있다. 다만 게임에서 이야기란 일종의 도구다. 게임을 진행하도록 이끄는 구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끝까지 플레이를 이어나가 그 결말을 보는 것이 게임의 목표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건 지금의 스테이지에 영향을 미치는 앞선 스테이지에서의 상황이다. 서사가 아니라 사건이 중요하다.


<펜트하우스>는 그런 게임의 법칙을 통해 판을 깨고 다음 판으로 넘어가는 묘미를 제공하는 드라마다. 주단테라는 인물이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능력을 세세하게 검증하거나 설득하는 대신 그냥 세게 보여준다. 지금 이 상황이 이 드라마가 제시하는 당장의 규칙이라는 것만 제시하며 빠르게 다음 스테이지로 판을 옮긴다. 시청자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듯 연이어지는 수위 높은 상황에 빠져든다. 그 전후 과정의 인과가 얼마나 세심하게 연결됐는가에 대해서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어차피 앞선 상황들은 잊어도 무방할 만큼 더욱 세고, 빠르게 유지되는 또 다른 판이 펼쳐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자극은 언제나 실무율을 만나기 마련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자극을 능가하는 자극은 훨씬 센 자극이어야 한다. 같은 방식의 자극으로 더 높은 자극을 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 지난 두 시즌과 비교했을 때 <펜트하우스 3>에 새로운 인물들이 더 많이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켜서 기존의 캐릭터와 새로운 갈등과 충돌을 만들고 그렇게 없었던 자극을 제시하는 것이다. 서사의 밀도를 채우는 대신 사건의 방향을 틀어버릴 캐릭터 군을 내세워 시야를 돌려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또 한 번 불가능할 것이 없는 ‘순옥적 허용’의 시간이 왔다. 따져 묻는 순간 지는 거다. 견딜 수 없다면 피해야 한다. 그게 건강에 좋다.


('예스24'에서 운영하는 패션 웹진 <스냅>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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