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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ul 15. 2021

로맨틱 코미디는 돌아오는 거야

낭만적인 90년대 로맨틱 코미디 네 편을 소개한다.

시대가 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사랑에 관한 예찬. 다시 봐도 낭만적인 네 편의 로맨틱 코미디를 엄선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1997

그 남자는 고약했다. 마주치기만 해도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이웃이었다. 솔직함과 불쾌함을 분간하지 못하는 언변으로 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작자였다. 사실 그에게도 타인이란 불편한 존재였다. 보도블록 금을 밟는 것을 기피해서 인도를 걸을 때마다 우스꽝스럽게 껑충거렸고, 식당에서 제공하는 식기 대신 늘 챙겨 다니는 일회용 플라스틱 식기를 사용하는 등 남들이 보기엔 유난하고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강박장애를 까칠함으로 극복했다. 사람과 멀어지는 것으로서 자신을 보호했다. 그런 그에게 변화가 찾아온다. 언제나 경멸하던 이웃집 강아지를 어쩌다 대신 보살피게 된 그는 역시 어쩌다 보니 그 강아지가 마음에 들어와 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 들어온 건 강아지만이 아니었다.


주연배우인 잭 니콜슨과 헬렌 헌트에게 오스카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뒤늦게 사랑과 충돌한 한 남자의 성장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다. 누구에게도 상냥하게 말을 걸 필요성을 느끼기 못했던 남자 멜빈(잭 니콜슨)은 자신의 까칠함에도 잘 응대하던 단골식당 종업원 캐럴(헬렌 헌트)이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자 그녀를 직접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녀의 사정에 관여하기 시작하며 그의 삶도 변화를 맞이한다. 상종하고 싶지 않았던 이웃집 남자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그렇게 선을 넘는다. 평소 겪지 않았던 일을 겪게 되고, 느끼지 않았을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감정이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알게 된다. “당신이 나를 더 좋은 남자로 만든다”는 말에 담긴 진심은 그렇게 상대를 감동시킨다. 그러니까 매너는 남자를 만들고, 사랑은 남자를 더 나은 남자로 만든다.

사랑의 블랙홀, 1993

방송사의 기상 리포터로 일하는 필 코너스(빌 머레이)는 이기적인 남자다. 매일 같이 이직할 것이라 으름장을 놓으며 동료를 무시하고, 입을 열 때마다 잘난 척이 끊이질 않는다. 그야말로 밥맛이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매년 성촉절마다 펜실베이니아의 소도시 펑서토니에서 열리는 기념행사를 취재하러 가는 그날도 그는 여느 해처럼 밥맛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상 예보와 달리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에 펑서토니에서 하루를 더 머무르게 된 그날 모든 것이 달라진다. 아침 6시에 울리는 알람과 함께 눈을 뜬 오늘이 어제 기대했던 내일이 아니라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어제인 것이다. 매년마다 찾아오는 지긋지긋한 소도시에서의 하루에 갇혀버린 그 남자는 매일 같이 반복되는 하루를 버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남자는 서서히 다른 사람이 된다.


반복되는 시간을 다룬 타임루프 소재를 다룬 <사랑의 블랙홀>은 SF적인 발상으로 접근한 로맨틱 코미디다. 반복되는 시간은 남자의 이기심도 지치게 만든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하루를 방탕하게 보내던 그는 거듭 찾아오는 오늘도 자신의 것임을 자각한다. 그래서 피아노를 비롯한 갖은 취향을 섭렵하고, 많은 사람과 교류하며 관계를 다진다. 그렇게 벗어날 수 없는 오늘을 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방식으로 이겨낸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내일이 없는 사랑이란 끝내 신기루처럼 허망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에 최선을 다하며 오늘을 사랑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오늘 속에서 멋진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간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허락된 내일에 관한 우화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오늘을 산다.

노팅힐, 1999

어떤 우연은 사고처럼 찾아온다. 런던 노팅 힐에서 여행 전문 서점을 운영하는 평범한 남자 윌리엄 태커(휴 그랜트)도 그렇게 놀라운 우연과 충돌했다. 세계적인 영화배우 애나 스콧(줄리아 로버츠)과 우연히 길에서 부딪힌 것. 그녀에게 오렌지 주스를 쏟아버린 윌리엄은 자신의 집으로 안내해 갈아입을 옷을 주고 그 인연으로 몇 차례 만남을 갖게 된 두 사람은 뜻밖의 오해와 갈등으로 인해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길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애나를 연모하게 된 윌리엄은 점차 애나 역시 자신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세계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배우 곁을 지키기엔 자신이 지극히 평범한 존재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마음만으로 가능하다고 믿을 만큼 순진한 나이가 아니다. 그렇게 마음을 누르고 다시 평범한 일상을 회복하고자 한다.


<러브 액츄얼리>와 <어바웃 타임>의 각본가 리처드 커티스가 시나리오를 쓴 <노팅힐>은 성별을 바꿔 각색한 현대판 신데렐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으론 오드리 헵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로마의 휴일>을 연상시킨다는 평을 얻기도 했다. 물론 <노팅힐>이 모방품이라는 게 아니다.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는 사랑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이다. <노팅힐>이 그만큼 고전적인 낭만을 전하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의미다. 그리고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는 사랑 이야기에서 필요조건이란 필연적으로 응원하고 싶은 매력이 있는 캐릭터일 것이다. 소심하지만 배려심이 많은 남자와 대범하고 자기감정에 솔직한 여자는 뻔한 편견에 빠져 서로를 밀어내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심으로 서로를 끌어당긴다. 세월이 흘러도 <노팅힐>의 결말이 녹슬지 않은 낭만을 보존하는 건 그 덕분이다. 언제나 사랑이 이긴다. 모두가 사랑하는 이야기란 그런 것이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1989

분명 첫인상은 비호감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시카고를 떠나 뉴욕에서 새롭게 시작하려는 샐리(멕 라이언)는 초면의 남자와 동행하게 된다. 길 한복판에서 친구와 격정적인 키스를 하느라 안하무인인 해리(빌리 크리스털)는 처음부터 별로였고, 차 안에서는 ‘남녀 사이에 친구 관계가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충돌하며 설전까지 벌이느라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그렇게 뉴욕에 도착한 뒤 헤어진 두 사람은 거짓말처럼 재회하고, 또 재회하면서 점차 친분을 쌓게 되고 과거에 벌인 설전이 무색할 정도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된다. 심지어 누가 봐도 사귀는 사이나 다름없는 행동을 하면서도 둘은 그저 친한 사이라며 자신들의 관계를 규정하고 서로의 연애를 응원하기까지 한다. 그런 어느 날 두 사람은 예상치 못한 하룻밤을 보내게 되면서 서먹한 마음을 품게 된다.


‘남녀 사이에 친구 관계가 가능할까?’라는 지난한 물음은 로맨틱 코미디에 더없이 어울리는 소재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유브 갓 메일> 등을 연출한 감독이자 각본가인 노라 에프런의 시나리오를 토대로 만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바로 그런 영화다. 친구와 연인 사이에 놓인 남녀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을 수긍하게 만든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로맨틱 코미디를 대표하는 고유명사처럼 불리는 해리와 샐리라는 이름은 바로 그런 관계의 대변인 같은 존재나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결말은 결국 남녀 관계에 친구란 없다는 속설에 손을 들어주는 것 같지만 그보단 자기감정에 솔직해야만 후회하지 않는다는 조언에 가깝다. 그리고 헤어짐도, 만남도, 적절한 때를 만나 이뤄지는 일이다. 그렇게 저마다의 해리를, 샐리를 만났다. 성숙해진 시간만큼 성숙한 인연을 만났다. 모두의 시간이었다.


(국립발레단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보내드림'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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