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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Aug 04. 2021

'미치지 않고서야' 슬기롭진 못해도 회사생활

'미치지 않고서야'는 직장인의 희노애락을 잘 이해하는 어른들의 드라마다.

‘하루 사이에도 열두 번씩 다 때려 치고 싶어도 가족들 얼굴 보기가 미안해 꼬랑질 내릴 수밖에.’ 1996년에 발표된 넥스트의 노래 ‘R. U. Ready?’의 가사에 공감하는 직장인은 21세기에도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퇴근하자마자 출근이 기다려지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15년간 직장인으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입장에서 보건대, 직장인이라면 대체로 출근보단 퇴근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출근을 싫어할 것이다. 이놈의 회사 관둔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다가도 당장 다음 달에 충당해야할 카드값을 보면 목구멍이 포도청인 현실에서 말을 삼키는 직장인이 8할일 것이다.


노동이 신성하다는 말은 통장에 스치듯 지나가는 월급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 같다가도 다음날 뱉어야할 카드값을 쌓아가는 오늘의 자신을 통해 다시 신성성을 회복한다. 마이너스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도록 삶을 연명하려면 오늘도 출근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현명한 답을 제시하지 않아도 스스로 지기 싫은 책임을 떠넘기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폭탄 돌리기 같은 회의에서 폭탄 처리반이 돼서 회의실에서 나오지 않으려면 정신줄을 붙잡아야 한다. 안 되는 일을 되게 하기 위해서 야근을 밥 먹듯이 하니까 어느 순간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상사 멱살을 잡지 않기 위해 역시 정신줄을 붙잡아야 한다. 그렇게 퇴근과 출근의 능선을 넘어 주말까지 행군하며 일주일을 견딘다. 


그러니까 직장 생활이 힘든 이유의 팔 할은 결국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 아홉이라도 싫은 사람 하나가 결국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그리고 정말 기이한 건 그 한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아 조직을 황폐화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조직 생활에서 중요한 건 일을 잘하는 게 아니라 줄을 잘 서는 것이라는 말이 예나 지금이나, 큰 회사나 작은 회사나 고금의 진리처럼 통용되는 건 역시 예나 지금이나 그 바닥이 그 바닥이라는 방증일 것이다. 가족 같은 회사를 약속하는 회사가 가끔씩은 정말 가족 같이 구는 것 같아서 미치지 않고서야 견딜 수가 없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다 때려치울 수도 없으니 어쩌겠나. 오늘을 견디다 퇴근하고 내일 출근해서 또 견디는 수밖에. 

지난 6월 23일부터 방영을 시작한 MBC 수목 미니시리즈 <미치지 않고서야>는 그런 공감대를 웃프게 관통하는 드라마다. “인사는 말이야. 신발이야 신발. 안 맞으면 버리고 갈아 신으면 되는 게 인사라고. 알아?”라고 말하는 상사 앞에서 당혹스럽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인사팀 팀장 당자영(문소리)은 중대한 비밀 임무를 안고 한명전자 본사에서 창인사업부까지 내려오자마자 된통 당하는 중이다. 인사 관련 일은 해본 적도 없는 개발자 출신, 그것도 부장씩이나 되는 직원을 자신이 내려오기 전에 이미 인사팀으로 발령한 회사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은 전 남편이자 창인사업부 개발1팀 팀장 한세권(이상엽)이다. 그는 자신의 부서로 발령 온 최반석(정재영)이 눈엣가시라 그에게 누명을 씌우고 팀에서 내쫓아 타 부서로 발령 보낸 것이다. 


한세권의 음흉한 계략에 빠져 개발자 생활 22년 만에 인사팀 업무를 하게 된 최반석(정재영)은 버틴다. 그에게는 건사해야 할 딸이 있고, 부양해야 할 어머니가 있다. 하지만 그도 호락호락하거나 고분고분하지 않다. 비록 인사팀에 있지만 한세권이 거드름 피우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제법 인사팀으로서 제 역할을 해낸다. 나름 오랫동안 회사를 다닌 고인물이라 인맥이 넓고, 능력도 인정받는 개발자였기에 나름 신망도 두터운 덕분이다. 그 과정에서 당자영은 비밀 임무를 진전시키고 본사 임원으로 승진하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고, 개발자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최반석은 묘안을 찾는다.


<미치지 않고서야>는 제목 그대로 ‘미치지 않고서야’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직장 생활을 각기 다른 욕망과 신념으로 유지해나가는 ‘웃픈’ 직장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미치지 않고서야>는 기본적으로 허구이고, 특정 분야에 종사하는 직장인의 삶을 그리는 작품인 만큼 모든 직장인의 일상을 대변하고 관통하고 수렴하는 이야기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치지 않고서야>가 직장인들의 공감대를 자극하는 드라마라 믿게 되는 건 직무와 직책과 직위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는 직장인들의 애환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의 사업부 정리의 일선에서 활약한 경력을 인정받아 또 한 번 지방 개발센터에 있는 개발사업부를 타회사에 매각하기 위한 정리 절차를 비밀리에 수행하라는 지령을 받고 중앙 본사에서 내려온 인사팀장 당자영에게는 야심이 있다. 바로 임원이 되는 것. 그리고 이번 임무를 수행하면 임원 추천 명단에 넣어주겠다는 상사의 언약도 받아둔 상태다. 하지만 애초에 간단한 일이 아니었고, 더더욱 간단한 일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그 복잡한 문제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거듭 부딪히는 두 남자는 해결해야 하는 걸림돌이 되다가도 위기를 탈출하는 묘안의 출처가 되는 존재가 되며 일진일퇴의 관계로 거듭난다.


‘식기세척기 100만 대 판매 주역’의 성과를 틈이 날 때마다 발음하는 개발1팀 팀장 한세권(이상엽)은 야심에 비해 실력이 모자라고, 모자란 실력을 착취와 정치로 충당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직관을 바탕에 둔 직언을 행사하는 최반석은 불편해서 치우고 싶은 존재다. 그로 인해 인사팀장이자 한세권의 전 부인인 당자영에게 최반석은 갑작스럽게 인사팀으로 굴러들어 온 돌이 된다. 그렇게 미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되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갈등과 충돌은 서로에게 불편한 일이 되지만 제삼자 입장인 시청자에게는 둘도 없이 ‘웃픈’ 엔터테인먼트가 된다. 그 ‘웃픔’의 근거는 기가 막힌 허구 속에 자리한 이들이 모두 회사 혹은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름의 안간힘을 쓰는, 매일 같이 출퇴근을 반복하는 나와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공감대를 자극하는 탓이다.


그러니까 모두 다 알고 보면 안쓰러운 사람들이다. 물론 누군가는 지독하게 비열하고, 누군가는 지나치게 치사하고, 누군가는 지난하게 비겁해서 상종하기 싫은 인간이라 여겨지지만 그 비열함과 치사함과 비겁함을 온전히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엔 조직의 비열함과 치사함과 비겁함이 조련한 결과처럼 보일 때가 적지 않아서 마뜩잖다. 부하 직원의 성과에 자기 이름을 올리는 상사의 비열함과 자신 혹은 자기 부서의 업무를 타인 혹은 타 부서에게 전가하는 치사함과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리스크로 판단하는 이들의 비겁함이 한데 모여 이상한 지론을 합리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일을 하는 곳이 아니라 줄을 서는 곳으로 여기게끔 만든다.

<미치지 않고서야>가 포복절도하게 웃기다가도 마냥 웃을 수 없는 코미디가 되는 건 회사라는 현실을 그렇게 잘 반영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미치지 않고서야>는 매일 같이 출근의 비극과 퇴근의 희극을 반복하는 모든 직장인들의 공감대를 자아내는 타인의 삶이기에 끝내 코미디일 수밖에 없다. 직무에 집중하고 싶지만 직책에 끌려 다니고 직위에 압박을 느끼는 회사원의 고충은 결국 노동의 신성함을 느낄 새도 없이 밀려오는 생존의 아슬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미치지 않고서야 공명정대할 수 없는 회사 생활의 고충이란 근본적으로 누군가의 비열함과 치사함과 비겁함을 통해 자신의 비열함과 치사함과 비겁함을 마주하게 된다는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드라마 같은 허구에서는 선악이 손쉽게 구별돼 감정을 간편하게 이입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의 선악의 경계란 대체로 흐릿해서 마음을 어지럽힌다. 다 면면을 알고 보면 나쁜 사람이 아니라지만 어느 조직에 소속되는 순간 드러나는 비열함과 치사함과 비겁함을 마주하는 순간의 당혹감 역시 그 사람과 무관한 일이 아니기에 속속들이 이해할 겨를이 없다. 그러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독야청청한 직장 생활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직무의 고단함을 견디면 직책의 버거움을 견뎌야 할 때가 오고, 직위의 중압감을 이겨야 할 때가 온다. 그렇게 월급일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버티는 일상이 모여 삶이 된다. 미치지 않고서야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매일을 그렇게 견디며 직장인으로 살아간다. <미치지 않고서야>는 그런 애환의 디테일에 깨알 같이 공감하게 만드는 드라마다. 웃다가도 문득 서글프다. 웃픈 삶을 꼭 껴안고 다독이며 간다. 좋은 코미디란 이런 것이다.


('예스24'에서 운영하는 패션 웹진 <스냅>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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