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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Sep 29. 2021

2020 도쿄올림픽이 남긴 것

2021년에 찾아온 2020 도쿄올림픽이 선사한 놀라운 순간들에 대하여.

코로나 시대의 올림픽이라니,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 생각했다. 심지어 진정세는커녕 기천명에 달하는 확진자 수가 연일 상승세를 보이는 도쿄에서의 올림픽이라니 말이다. ‘2020’이라는 숫자 자체만으로도 의미심장한 2020 도쿄올림픽은 열려서는 안 될 축제처럼 보였다. 여전히 그런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2021년에 찾아온 2020 도쿄올림픽은 예정대로 개막했고, 생각지도 못한 흥분과 감동을 선사했다. 2020 도쿄올림픽은 코로나 시대에 찾아온 극강의 엔터테인먼트였다. 


2020 도쿄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금메달 6개, 은메달 4개, 동메달 10개를 목에 걸며 종합 16위를 차지했다. 종합 8위를 차지한 2016 리우 올림픽이나 종합 5위를 차지한 2012 런던 올림픽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전통적으로 대한민국의 금메달 텃밭으로 꼽히는 양궁에서 예년보다 대단한 실력을 발휘했고, 신흥 강호로 올라선 펜싱에서도 선전했고, 체조 도마에서 예상 밖의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올림픽 공식 종목 채택 이후로 사상 최초 노골드를 기록한 태권도와 올림픽 2연패를 노리던 야구의 노메달을 비롯해 기대 종목의 부진 여파가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 도쿄올림픽은 예년과 다른 흥분과 열기를 만끽할 수 있는 축제 그 자체였다.

안산이 쏘아 올린 골드 러시

마치 맡겨 놓은 금메달을 찾으러 온 것 같았다. 올림픽 매회마다 대한민국 양궁팀은 절대 강자였다. 지난 2016 리우 올림픽에서는 남녀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모두 금메달을 독식하며 4관왕에 올랐다. 도쿄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양궁팀이 세운 목표는 사상 첫 5관왕이었다. 새롭게 신설된 혼성 단체전은 더 올라갈 곳이 없어 보이는 대한민국 양궁팀에 새로운 목표를 선사했다. 시작부터 조짐이 좋았다.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대한민국 양궁의 젊은 피 김제덕과 안산은 관록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패기 넘치게 활시위를 당겼다.


대체로 조용한 양궁경기장에서 입을 한껏 벌리며 ‘코오리아 화이티잉!’이라는 구호를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김제덕과 그 옆에서 좀처럼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안산은 결국 뜨겁고 담담하게 과녁을 적중시키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이 얻은 첫 금메달이었다. 그 뒤로 안산은 여자 개인전과 여자 단체전에서도 우승하며 대회 3관왕에 올랐고, 김제덕은 남자 단체전에서 우승하며 2관왕에 올랐다. 비록 한국 양궁팀은 목표였던 대회 5관왕을 이루는데 실패했지만 금메달 4개를 목에 걸며 효자 종목 노릇을 톡톡히 했다.


한편 도쿄올림픽 3관왕에 오른 안산은 첫 금메달을 획득한 혼성 단체전 이후로 SNS를 통해 뜻밖의 논란에 휘말렸다. 머리카락 길이가 짧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라 규정하고 이를 공격하는 이들의 사이버불링에 시달린 것. 사실상 ‘논란’이라는 단어를 동원하는 것 자체가 낭비적인 의견이 일파만파 전파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가장 우려했던 건 중요한 경기를 앞둔 선수의 컨디션이었다. 여자 양궁 단체전 올림픽 6연패라는 대기록 도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안산이 시답잖은 논란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기우였다. 해풍도 흔들지 못한 집중력을 하찮은 손가락질로 흔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금메달이 아니라도 괜찮아

이번 도쿄올림픽은 금메달리스트가 아닌 선수 자체를 주목하게 만드는 축제이기도 했다. 육상 높이뛰기에 출전해 한국 선수로는 25년 만에 올림픽 남자 육상 높이뛰기 결선까지 진출한 우상혁은 그 자체로 올림픽이라는 무대의 본질을 깨닫게 만드는 경기를 펼쳤다. 사실 우상혁이라는 선수가 대한민국 육상 높이뛰기 국가대표 선수라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었을 것이다. 결선에 진출하기까지, 그리고 결선 경기에 임하는 순간까지도 많은 이들은 그의 존재를 잘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들 안다. 그의 도약이 뛰어넘은 건 올림픽 무대에 높게 걸린 장대만이 아니었다.


그 누구도 우상혁을 기대하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도 그런 높이까지 뛰어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2.33m 높이의 장대를 뛰어넘는 순간 넘어야 할 다음 장대가 걸렸다. 2.35m는 연습 때에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높이였다고 한다. 그렇게 뛰었고, 넘었다. 올림픽 무대에서 높이뛰기 한국 신기록이 새롭게 작성됐다. 그 뒤로 아쉽게 4위 기록에 머물며 비록 메달권에 드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우상혁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기록에 기뻐했고, 마음껏 환호하며 올림픽을 즐겼다. ‘진짜 후회 없이 뛰었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그 순간 올림픽은 우상혁의 것이었다. 


박태환 이후로 한국 수영계의 새로운 유망주로 떠오른 황선우에게 도쿄올림픽은 처음으로 경험하는 올림픽 무대였다. 아시아 선수로서는 보기 드문 수영 단거리 선수로서 200m, 100m, 50m 자유형에 출전했고, 이중 200m, 100m 결선에 진출했다. 비록 메달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200m와 100m에서 모두 5위의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200m에서는 박태환이 세운 기록을 깨고 대한민국 신기록을, 100m에서는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다. 심지어 아시아 선수로서는 65년 만에 100m 자유형 결선에 진출한 선수가 됐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기록을 보고 스스로 놀라워하며 기뻐했다. 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다고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대한민국이라는, 세계라는 원팀

2020 도쿄올림픽에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여자배구의 짜릿함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축구도, 야구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 성적을 거둔 이번 올림픽에서 여자배구는 대한민국 올림픽 시청자를 구원하러 온 단 하나의 팀이었다. 한국 여자배구 팀이 속한 예선 A조 다섯 팀 가운데 한국보다 세계 랭킹이 낮은 국가는 단 하나였다. 그러니까 예선 경기 대부분이 첩첩산중이었다는 의미다. 예선에서 탈락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전은 기세다. 그리고 기세는 이상한 일을 만든다. 그걸 흔히 이변이라고 한다. 


이변은 예선 세 번째 경기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풀세트 접전 승부 끝에서 벌어졌다. 한국이 3대 2로 승리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일전에서 전의가 불탔다. 종목을 불문하고 한일전이란 그런 것이다. 한국도, 일본도, 치열했다. 그리고 역시 풀세트 접전 끝에 듀스 승부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결국 승리했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상투적인 말에 의미를 불어넣었다. 그렇게 8강에 진출했지만 세계 4위 팀인 터키가 기다리고 있었다. 역대 전적은 2승 7패로 한국이 열세였고, 최근까지 한국 팀에 국제전 6연패를 안겨준 상대였다. 승리는 요원해 보였다. 하지만 역시 실전은 기세다. 풀세트 접전 끝에 또 한 번 신승을 거뒀다. 더 이상 등수는 상관없었다. 


도쿄올림픽 여자배구는 승패와 관계없이 모든 경기가 하이라이트였다. 주장 김연경을 중심으로 원팀이라는 의미를 되새기게 만드는 드라마였다. 올림픽이란 각국의 대표 선수들이 자국의 국기를 자신의 몸에 걸고 승부를 펼치는 대회다. 메달을 수상하면 보다 높은 곳에 국기가 게양되지만 그전에 이미 선수들의 몸에 국기가 게양되는 셈이다. 그만큼 선수들이 국가대표라는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들이 국가대표답게 당당하고 떳떳하게 그 무대에서 모든 것을 던지고 올 수 있길 바라는 마음도 중요하다. 가슴에 단 국기가 무색하지 않게 국가를 대표해서 나간 선수가 벌이는 열전 그 자체가 메달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물론 이왕이면 금메달을, 은메달을, 동메달을 목에 걸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해도 최선을 다한 선수를 향한 응원은 그 자체로 함께 세계인이 모두 참여하는 축제의 일원이 되는 길이다. 비록 방구석 1열에 앉아 보는 올림픽이라 해도 그렇다. 이 지난한 감염병의 시대에 시대착오적인 ‘2020’이라는 숫자를 걸고 찾아온 도쿄올림픽이 알려준 건 그런 것이었다.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올림픽이 아니었다. 결국 이렇게 함께 마주하며 호흡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전 세계인과 한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거대한 희망의 불을 붙이는 일이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올림픽 메달의 색깔보다도 중요한 건 이렇게 세계의 다양성을 한 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축제를 한껏 즐길 수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였을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그리고 세계라는 원팀의 다채로운 개성을 만나는 기쁨, 그것이야말로 2020 도쿄올림픽이라는 코로나 시대의 축제가 피워 올린 거대한 불꽃일 것이다.


(법무부 교정본부에서 발행하는 월간 <교정> 9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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