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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an 07. 2022

'오징어 게임' 황동혁 감독이 만난 K 글로벌 시대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가장 창의적인 점프,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

사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2년 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오스카에서 파란을 일으킬 때에도, 작년에 배우 윤여정의 이름이 또 한 번 오스카에서 호명될 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난 12월 13일에 공개된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 후보에는 TV 드라마 작품상 부문 후보에 <오징어 게임>이, TV 드라마 남우주연상 부문 후보에 이정재가, TV 남우조연상 부문 후보에 오영수가 이름을 올렸다.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와 <미나리>의 주연배우 윤여정에 이어 골든글로브 시상식 후보 명단에 한국인 이름이 3년 연속으로 포함된 것이다. 그것도 한국계 미국인이 아닌 한국 국적의 한국인이 말이다.


물론 ‘글로벌이 아닌 로컬’ 시상식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농담이다. 이건 사실 굉장한 일이다. 다만 골든글로브라는 권위 있는 시상식에 한국인 후보가 있다는 사실을 신기하게만 받아들일 시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은 아마 한국에서 만든 영상 콘텐츠라 불릴 수 있는 모든 결과물 안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다. 세계적인 OTT 플랫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공개된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가 서비스되는 83개국에서 모두 가장 많이 본 작품 순위 1위를 기록한 최초의 작품이 됐다. 공개된 지 3주 만에 1억 명 이상의 시청자 수를 기록하며 종전까지의 최고 기록이었던 <브리저튼>의 8200만 명 기록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러니까 둘 중 하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징어 게임>을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으로 세상 사람이 나뉘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오징어 게임>에 열광하는 전 세계 분위기가 손쉽게 감지됐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딱지치기’, ‘구슬놀이’ 등 한국인의 유년시절에나 자리 잡고 있었을 법한 추억의 놀이를 전 세계의 다 큰 성인들이 따라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고, 국적과 인종을 불문하고 국자에 설탕을 녹여 만든 달고나를 혀로 핥아대는 영상이 유행처럼 이어졌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달고나 세트 주문이 밀려들어오고 이베이에서 높은 가격 대에 거래된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이처럼 유례없는 인기를 모은 <오징어 게임>이 처음부터 환영받는 작품은 아니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오징어 게임>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황동혁 감독이 <오징어 게임>을 처음 구상한 건 2008년이었다. 만홧가게에서 일본 서바이벌 장르 만화를 즐겨 읽던 당시 유년시절에 했던 간단한 놀이를 소재로 한국적인 서바이벌 장르의 서사를 기획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켰고, 2009년에 각본을 썼다. 하지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대체로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반응이었다. 사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린아이들이나 할 법한 놀이를 소재 삼아 잔혹한 자본주의 체제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주제가 대중적으로 먹히기 어려울 것이란 판단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건 시장성의 문제다. ‘글로벌이 아닌 로컬’에서 먹힐 수 있는 이야기란 그만큼 범위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서 운용할 수 있는 소재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 시장에서는 투자자도, 제작자도 대중적이라 여겨지는 취향의 굴레를 벗어나는 시도를 할 자신감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누군가 새로운 시도로 시장성을 넓혀줘야만 가능한 일이 된다. 이는 2021년에도 유효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넷플릭스처럼 한국에서 기획하고 제작한 작품을 전 세계로 띄워 보낼 수 있는 ‘로컬이 아닌 글로벌’ 플랫폼에도 제안이 가능한 시대다. 황동혁 감독이 10여 년 전에 구상했다는 <오징어 게임>이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던 건 그런 시장성의 변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흥미로운 건 황동혁 감독이 구상한, <오징어 게임>이 풍자하는 자본주의적인 양극화 세태가 10여 년 전보다 지금 더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일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황동혁 감독도 10여 년 동안 마냥 기다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2011년에 개봉한 <도가니>로 400여만 명의 관객을, 2014년에 개봉한 <수상한 그녀>로 800여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감독의 반열에 오른 황동혁 감독은 2017년에 개봉한 <남한산성>이 300여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기대에 비해 낮은 흥행 기록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작품성을 인정받고 백상 예술대상 작품상과 청룡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역량 있는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그런 황동혁 감독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를 기획하고 연출한다는 소식은 다소 의외였다. 심지어 제목이 <오징어 게임>이라니, 유년시절에 했던 그 오징어 게임을 전면에 내세운 제목 자체가 작품을 가린 베일 같았다. 심지어 포스터가 공개되니까 더 아리송했다. 마치 죄수복처럼 숫자가 쓰인 트레이닝복을 입은 이들과 이상한 가면을 쓰고 점프슈트를 입은 무리가 나란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포스터만으로 짐작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내용은 단순하고 명확했다. 벼랑 끝으로 인생이 내몰린 이들을 대상으로 주어지는 머니 게임의 기회, 유년시절에 즐긴 추억의 놀이를 잔인무도한 게임의 테마로 설정한 미스터리한 존재, 그야말로 동시대의 세태를 극렬하게 실감시키는 우화는 전 세계적인 공감대를 사로잡을 만한 밑그림이 됐다.


“시나리오를 쓸 당시에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고,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게임을 한다면 참가하겠다는 사람이 전국에 몇 백 명쯤 있지 않을까 싶었다.” 황동혁 감독의 말처럼 <오징어 게임>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봉준호 감독의 말에 부합하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사실 황동혁 감독은 시작부터 그런 창작자였다. 장편영화 연출 데뷔작이었던 <마이 파더>는 미국으로 입양된 고모가 오랜만에 만난 경험이 투영된 작품이었다. 이렇듯 현실에서 길어 올린 허구의 모티브는 <오징어 게임>이라는 신랄한 메시지와 발랄한 디자인으로 이어지고 발전했다. 양극단의 감정과 감각을 한데 세워 넣은 엔터테인먼트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예상하지 못했던 경계를 넘고, 새로운 시대를 만났다. 바야흐로 K의 시대다. 그리고 <오징어 게임>은 바로 그 시대의 강력한 증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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