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우연과 상상'에 관하여.
<아사코>와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건 ‘무해한 변태’의 끝판왕이 만든 이야기 같잖아. <우연과 상상>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다시 했다. 아니, 확신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이토록 매끄럽고 유연하게 금기의 썰을 풀어내고 무장해제시키는 재능이란 분명 비범한 것이다. 평범한 얼굴로 만만치 않은 이야기를 자연풍경처럼 풀어버리는 통에 뒤늦게 쫓아온 것마냥 체감하게 되는 생경함과 생소함마저 일종의 영화적 체험으로 승화된다.
<우연과 상상>은 제목에 나열된 ‘우연’과 ‘상상’이라는 두 단어 사이에 벌어지는 필연적인 상호 인과를 나열한 것처럼 보인다. ‘우연’히 어떤 순간을 맞이했을 때,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 우연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그 우연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마다 여지없이 ‘상상’력이 발휘된다. 다만 상상력이란 개개인의 편차가 명확한 재능이기에 저마다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의 너비와 밀도가 다르고, 누군가가 발휘한 상상은 현실 안에서 손쉽게 휘발되는 단편적인 사건이 되지만 누군가의 상상은 그것을 공유할 만한 허구의 영역까지 도달한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은 지극히 현실적인 틀 안에서 제시할 수 있는 우연의 양태를 누구보다 독보적인 상상력으로 구현하는 화술의 영화다. 대화로 점철된 부조리극 형식성이 끊임없이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단조롭다는 인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건 대사로 함축된 갖은 이야기가 불쑥 고개를 들고 튀어나와 구조화되는 다음 순간이 등장하는 덕분이다. 대수롭지 않을 것 같았던 직진의 서사가 갑자기 예상할 수 없게 유턴해 원점에서 새롭게 시작되고, 불발탄 같던 이야기가 단박에 클라이맥스로 도달해버린다.
<우연과 상상>은 연극적인 가설을 일상적인 풍경에 적용하는 무대 실험 같기도 한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 특유의 작법을 단명하게 나열한 옴니버스이기도 한데 긴 호흡의 이야기만큼이나 짧은 호흡의 이야기안에서도 특유의 분위기는 여실하고, 그래서 되레 끝에 걸린 뭉특한 여운을 더 돌아보고 싶게 만든다. 너무 재미있어서 귀를 뗄 수 없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에 사로잡혔다가 단정한 어투 사이에 은현한 어휘의 매혹에 완전히 끌려갈 수밖에 없다.
우연은 자연스럽고 상상은 기묘하며 감상은 무한하다. 실로 독보적인 이야기다. 정말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