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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ul 01. 2022

이창동 감독 인터뷰

모든 산업에는 문화적인 창의성이 필요하다고 이창동 감독이 말했다.

감독 이창동은 참여정부 초대 문화부장관이었다. 그저 상징적인 이벤트가 아니었다. 이창동이 문화부장관으로서 남긴 족적은 지금의 전 세계적인 K컬처 시대의 열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의 고민은 한국 문화가 맞이할 놀라운 시대를 향한 포석이었고, 그 포석은 지금도 유효한 집을 짓고 있다.


<버닝>(2018) 개봉 이후로 뵐 기회가 좀처럼 없었습니다. 지난 3년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특별한 근황은 없고요. 영화감독의 일이라는 게 항상 다음 영화를 준비하고, 영화 제작에 매진하는 것이죠. 지금은 시나리오 작업 중인데 쉽진 않아요. 작년에는 단편영화를 하나 찍었고, 요즘에는 프랑스에서 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 해서 찍히고 있는 중입니다.(웃음) 아무래도 통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좀 힘들었습니다.


통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건 팬데믹 상황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렇죠. 원래 프랑스 제작진이 한국에 들어올 예정이었는데 코로나19 유행 때문에 계속 미루다가 그쪽 방영 스케줄 문제로 원격 제작하게 됐어요. 줌으로 비대면 인터뷰를 하고 원격으로 촬영까지 진행하다 보니 아무래도 힘들었죠. 인터뷰까지는 그런대로 할 수 있었지만 영화 촬영 현장이나 제 소설에 나오는 공간 심지어 제가 성장기에 살았던 공간까지 찾아가 보는 기획을 직접 오지 못한 제작진의 주문에 따라 원격으로 촬영하는 걸 보니 의외로 힘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를 찍는 다큐에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고요.


어떤 면에선 팬데믹을 제대로 경험하신 셈이네요.

기묘한 경험을 했죠. 어쩌면 앞으로 이런 제작 방식이 하나의 대안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 인터뷰만 해도 힘들었어요. 인터뷰라는 게 기본적으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대화하는 건데 어딘가를 인위적으로 바라보며 준비된 영상 메시지 같은 걸 찍는 듯한 기분이 드니까요. 아무래도 제가 그런 방식의 소통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도 하고요.


작년에 촬영한 단편은 어떤 작품일까요?

아직 공개 전이라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순 없지만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전 세계 몇몇 감독에게 단편 작업을 의뢰했고, 한국 감독 중에서는 저한테 제안한 거죠. 상업적인 목적이 아닌 교육적인 의미로 사람들의 인식을 돕는 프로젝트라 하니 취지도 괜찮아 보이고, ‘놀면 뭐하니?’라는 심정으로 수락했어요.(웃음) 적당한 때가 되면 공개되겠죠.


지금까지 단편 작업을 하신 적이 없었던 만큼 그 결과물이 궁금하고 귀하게 느껴지는데요.

보통 영화 학도로서 공부하는 과정에 단편을 찍으며 학습하고, 자기 역량을 증명하는 단계를 거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런 식으로 데뷔한 영화감독이 아니라 단편을 찍을 기회가 없었죠. 그런데 <박하사탕> 같은 경우 일곱 개의 챕터로 구성된 영화이고, 작품 성격상 각각의 챕터가 독립적으로 제작되는 형식이었어요. 20년이라는 시간 안에서 한 인물의 특정 기간을 비좁게 들여다보고 점프하는 형식이라 챕터마다 주인공의 머리 모양도 바뀌고, 심지어 체중까지 변하기 때문에 각각의 챕터를 독립적으로 제작해야 했죠. 한 챕터가 완성돼야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식이었어요. 각각의 챕터를 독립적인 단편처럼 완성한 셈이죠. 그래서인지 이번 단편 작업이 특별히 새로운 시도나 경험 같진 않았어요. 그전에 학생들 단편을 지도한 경험도 꽤 있고요.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한 해외문화홍보원 단행본에 게재될 이 인터뷰는 감독님께서 참여정부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재임하셨던 경력 덕분에 진행하게 됐는데요. 당시 감독님께서 문화부장관으로 취임하신다는 소식 자체가 굉장히 놀라운 뉴스였습니다.

사실 피하고 싶었어요. 실제로 내각 출범하기 직전에 인선 과정까지 꽤 도망 다녔죠. 여러 가지 숨은 일화들이 있어요. 그런데 결국 맡게 된 데에도 이유가 있죠. 우선 노무현 대통령께서 대선 후보 시절 문화예술계에 공약하신 바가 있어요. 참여정부 초대 문화부장관은 예술계 현장에서 발탁하겠다는 거였죠. 현장 출신 장관 발탁은 양쪽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였어요. 대통령은 공약을 지킨다는 점에서, 예술계 현장은 문화행정에 직접 참여해 틀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죠. 문제는 정작 장관을 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는 거예요. 그러다가 저를 추천한 사람들이 있었는지 제가 인선 후보에 올랐다는데 정말 하기 싫었죠. 지금 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생각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물론 참여정부가 성공하는 것도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었지만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고, 이래저래 도망 다녔죠. 그런데 점점 하기 싫지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람들은 그런 자리에 앉는 걸 출세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죠. 저도 그랬고요. 주변에서 하라고 떠미는 사람도 있지만 하지 말라는 사람도 있고, 가족만 해도 그랬어요. 심지어 한 동료 영화감독은 그걸 한다니, ‘바보냐’라고도 하고.(읏음) 그런데 싫어도 받아들여야 되는 일도 있는 법이죠. 그게 장관이 되는 일이었어요.


결국 장관직을 맡기로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은 그 자리에서 해내야 할 일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죠. 나름대로 결심을 했으니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깊게 고민하는 것이 수순이었죠. 일단 제가 영화계를 대표해서 장관이 됐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문화예술 전반의 현장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고, 참여정부의 문화예술 정책 방향의 틀을 짜는 임무가 맡겨진 거라 생각했죠. 영화계에서는 제가 문화부장관이 됐으니 스크린쿼터를 확실히 지킬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있었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런 요구도 여러 문화예술 현장의 목소리 중 하나라 여겨야만 했어요. 종합적인 관점으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문화 홍보도 그중 하나였죠. 문화를 홍보한다는 게 사실 특별한 게 아니에요. 국내 문화가 활성화되면 그 힘이 자연스레 해외까지 넘어가게 돼있어요. 홍보만으로 문화를 알리길 기대한다는 건 과거의 발상이죠.


문화 홍보에서 중요한 건 홍보가 아니라 문화라는 의미의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렇죠. 사실 국가를 홍보할 때 가장 긍정적인 수단도 문화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참여정부의 정부 기능 통합 과정에서 국정 홍보가 문화 중심으로 돼야 한다는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피력했고 그 결과 지금 문화부 산하 소속기관으로 해외문화홍보원이 들어선 거죠. 하지만 정부 부처 간의 이해가 충돌하는 지점이 있어서 당시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다만 그 필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참여정부 초기부터 그런 틀을 짠 거죠.

문화부장관 재직 시절에 문화부에서 만든 두 개의 보고서 ‘창의한국’과 ‘예술의 힘’은 지금도 문화 정책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한 보고서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전화번호부에 비유할 정도로 두꺼운 보고서이기도 한데요. 장관직을 맡기까진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막상 장관이 되신 이후에는 정말 열심히 일하신 거 같더군요.

맡은 이상 해야만 하는 것을 고민해야 했으니까요. 사실 박정희 정부 시절의 문화행정이란 문화재 보호 같은 1차원적인 것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문화재가 함부로 도굴돼서 해외로 반출되고, 문화재가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거든요.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 문화재를 보호하고 발굴하는 게 당시 국가가 할 수 있는 문화행정이었죠. 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그런 시대였어요. 그리고 문화는 감독, 관리 대상이기도 했죠. 문학이든, 영화든, 노래든, 건전한 방식으로 검열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죠. 그러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고 그런 방향을 문화 정책 기조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영화만 해도 1996년에 사전심의제가 위헌 판결이 났거든요.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처음 전면적인 문화 지원책이 마련됐어요. 요즘 보기에는 미비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당시 처음으로 문화 예산이 1% 책정됐을 때 유리천장을 깨는 듯한 사건으로 여겨졌으니까요. 문화도 산업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정부 내에서도, 민간이나 기업 차원에서도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됐으니 정책적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여긴 것이죠.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논리도 그때 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때까지도 문화정책이 정부 중심으로 시행되다 보니 정부와 가까운 관변 단체에서 주도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한계가 있었어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로 말이죠.


하방식 구조인 거죠.

그렇죠. 그러다 보니 이게 사람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있고, 제대로 흘러가는지 불분명한 구석들이 있었죠. 사실 문화가 산업이 될 수 있다는 말은 문화도 돈이 된다는 말이니까 문화보단 산업적 가치가 우위에 있다는 의미거든요. 원래 문화는 일단 지원하는 대상이어야 하는데 돈을 벌어줄 수단이라는 인식이 지배하는 사고가 보다 강한 거죠. 그래서 저는 참여정부부터 문화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관주도가 아니라 민간 주도의 문화행정을 펼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야 했죠. 민간에서 현장에 필요한 정책을 요구하고 그에 따른 수단을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방향으로, 그러니까 문화행정이 정부 중심이 아닌 민간 자율이 돼야 한다고 믿었어요. 시대적으로도 이미 그런 변곡점에 와있었고요. 그러니까 그걸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결국 그런 방향을 정하고 정책적 수단을 찾아내는 건 정부가 아닌 현장의 몫이었던 거예요.

 

그런 방향을 총합적으로 정리하고 제시하는 노력이 앞서 말한 두 개의 보고서였던 거고요.

네. ‘창의 한국’이나 ‘예술의 힘’은 현장의 목소리를 최대한 받아서 만든 정책 보고서예요. 큰 선에서 각 분야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그러기 위해 필요한 어떤 정책적 수단에 대해서 총합적으로 정리한 것이죠. 말로만 떠든다고 되는 게 아니라 예산도 필요하고, 제도도 바꿔야 되고, 다양한 정책 디테일이 필요했어요. 정부에서, 지자체에서, 민간에서 제각각 할 수 있는 게 있으니 그에 대한 종합적인 정책 매뉴얼을 만들고자 했던 거죠. 우스갯소리 같지만 전화번호부만큼 두꺼운 책이 나와야 한다고도 했어요. 모든 전화 정보가 있는 전화번호부처럼 그 안에 모든 문화정책 매뉴얼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죠. 실제로 두꺼운 두 권의 책이 완성됐지만 내부 자료는 훨씬 두꺼웠어요. 각 분야의 현장을 대표하는 이들과 함께 토론하고, 방향을 찾아가고, 합의하는 과정을 통해 얻어진 기록이죠. 저도 되도록 그 과정에 참여하며 적지 않은 실무 시간을 보냈어요. 그만큼 민간의 자율성을 어떻게 보장하느냐라는 고민을 최대한 거친 결과물이었죠. 문화에서 자율성이란 생명이나 다름없으니까 행정 하는 사람들 책상 위에서 이뤄지는 많은 결정 사항을 민간에 넘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였죠. 그 전까진 정부 산하 기관으로 분류되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었거든요.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민간 분야를 대표하는 전문가들이 들어와서 각 분야에서 어떤 사업을 해야 하는지, 누구에게 지원해야 하는지, 예산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이런 걸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었죠.


정부 산하 기관을 민간화하는 과정에서의 이해 충돌도 상당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욕 많이 먹었어요.(웃음) 특히 보수 언론에서 좌파들이 자기들끼리 해 먹으려고 그런 기구를 만든다는 식으로 비판이 심했어요. 사실 정반대였죠. 오히려 정부에서 지원 사업을 주도하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때까지 그렇게 했던 거고요. 그런데 이걸 민간에 넘긴다는 건 정치성을 배제하고 현장에 필요한 사업을 육성해서 거기 돈을 쓰게 만든다는 거잖아요.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방식을 만든 거죠. 그걸 진영 논리로만 보는 거예요. 결국 그 진통을 겪고 제가 문화부장관을 사임한 뒤인 2005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출범했죠. 당시 초대 위원장이 한국 사회에서 합리적인 보수 인사로 꼽히는 문학평론가 김병익 선생이었는데 모시기 쉬운 분은 아니었어요. 취지에 공감해도 연세가 많으셨고요. 그걸 제가 찾아가서 설득했어요. 비록 그때 장관은 아니었지만 결자해지 한다는 심정으로 말이죠. 그렇게 위원회가 출범했고 초기에 시행착오는 있었을지 몰라도 정치적 편향 없이 중립적으로 잘했다고 봐요. 정작 문제는 정권이 바뀐 다음이었죠. 다 알다시피 편향된 정부 시각이 반영된 블랙리스트가 만천하에 드러났잖아요. 정부가 일탈 행위를 한 거죠. 자율적인 정책 기조를 병들게 만든 거예요. 그럼에도 큰 방향이 정해졌기 때문에 한국 문화가 발전하는 흐름까진 막을 수 없었던 거 같아요. 해외에서 홍보하는 분들은 특히 실감하겠지만 우리도 느낄 수 있잖아요. 결국 우리가 나름의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고, 이런 흐름이나 추세는 되돌릴 수 없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과거 한류라는 이름으로 몇몇 나라의 인기를 짐작하게 만들던 상황이 K컬처라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됐죠.

한류가 어떻게 시작됐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앞으로 두고두고 되돌아보며 분석하고 공부해볼 필요가 있어요. 사실 한류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건 제가 장관이 됐을 무렵이었을 거예요. 당시에는 한류라는 말을 쓰긴 하는데 정말 그만한 영향력이 있긴 한가라는 의구심도 들었죠. 물론 피부로 느껴지는 현상도 있었어요. <겨울연가>로 일본에서 욘사마라 불린 배용준 씨 인기가 정말 대단했고, 중국에서도 한국 드라마 인기가 상당하다는 거예요. 한류가 전 세계적인 현상까진 아니라 해도 지속 발전시켜야 한다는 고민이 필요했죠. 문제는 정부가 나서는 순간 경계심을 부를 가능성이 있다는 거였어요. 실제로 당시 중국에서는 한국 가수 공연이 금지된 상황이었고요. 2000년도에 H.O.T.가 중국 공연을 했는데 현지 반응이 너무 뜨거워서 중국 당국이 놀란 거예요. 그 뒤로 한국 가수 공연을 금지시킨 거죠. 2000년 이후로 한국 가수가 중국 무대에 설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음성적인 인기가 상당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 일어나는 일이었던 거예요. 이게 지속되게 만들 필요가 있잖아요. 일단 정부가 나서야 했죠. 민간에서는 아직 그럴 여력이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다만 정부에서 주도하되 주도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게 중요했죠.


마치 첩보전을 펼치는 느낌인데요. 어떤 과정이 이어졌을지 궁금합니다.

아시아문화산업교류재단이라는 걸 만들었어요. 그게 지금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됐을 거예요. 국가가 주도한다는 경계심을 갖지 않도록 민간이 중간 역할을 할 수 있는 다리를 만든 거죠. 그런데 당시 사스가 유행하면서 일시적으로 국제 관광이 막혔어요. 지금 우리가 겪는 팬데믹 이전에 바이러스가 국제적인 인적 교류가 막을 수 있다는 첫 사례가 바로 사스 유행이었을 거예요. 당시 중국에서 사스 퇴치에 사활을 걸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말하는 시점이 왔어요. 그래서 사스 퇴치 위문 공연을 기획했죠. 우리가 중국 의료진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정부 차원에서 협의하고 한국과 중국 가수가 함께하는 합동 공연을 기획한 거죠. 당시 제가 중국 문화부의 장관급 인사였던 손가정이란 분과 죽이 잘 맞기도 했어요. 그래서 북경전람관이라는 굉장히 큰 극장에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의료진을 모아놓고 공연했는데 관계자들이 자식들에게 티켓을 준 건지, 아니면 음성적으로 팔린 건지, 뒤쪽 절반 이상은 일반 젊은 관객으로 북적이는 거예요. 그 당시 한국에서는 강타, 보아 같은 스타 가수들이 무대에 섰는데 객석 뒤쪽의 열기가 정말 대단했어요. 저도 놀랐지만 중국 정부 관계자들은 거의 문화적 충격을 받는 것 같았어요. 심지어 공안들이 쭉 서서 앞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막는데도 파도처럼 넘어오는 열기를 느꼈어요. 그때 알았죠. 한국 사람들에게는 뭔가 있구나. 흔히 끼나 흥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만 가진 어떤 에너지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게 2003년 8월이었으니까 벌써 18년 전인데, 지금 그게 세계적으로 전달되는 거라고 봐요. 음악도, 영화도, 드라마도, 그렇게 각 분야별로 말이죠.


장관이기 전에 감독으로서 해외 영화제에 나가서 경험한 바로는 어땠을까요?

제 첫 영화 <초록물고기>(1997)로 처음 나간 해외 영화제가 밴쿠버영화제였어요. 당시 밴쿠버영화제는 아시아 영화를 서구에 소개하는 영화제로 권위가 있었죠. 지금 그 역할을 부산국제영화제가 하고 있고요. 그런데 당시 밴쿠버영화제에서 알게 된 건 관객들이 한국영화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일본영화, 중국영화, 이란영화, 인도영화에는 다 관심을 갖는데 한국영화는 알 필요가 없는 거예요. 실망했죠. 그 뒤로 해외 영화제에 열심히 나갔어요.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알리고 싶어서. 그런데 큰 도시에서 열리는 영화제에는 한국 관객이 찾아와요. 교민들이죠. 그리고 교민 반응이 제일 안 좋았어요. 우리나라도 좋은 게 많은데 왜 깡패 이야기만 하냐고, 쪽팔리게 어두운 면만 보여주냐고 말이에요. 그분들에게는 영화가 영화로 안 보였던 거죠. 그런데 불과 20여 년 사이에 한국영화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잖아요. 이제 웬만한 영화제에서 한국영화 프로그램을 만들지 못하면 역량이 부족해 보일 정도가 됐어요. <초록물고기> 때만 해도 한국영화 전문이라 자처하는 해외 평론가가 두세 명 정도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도처에 전문가예요.

과거 문화부장관 취임 당시 문화부 열린장관실 게시판에 올린 취임사가 화제였어요. 특히 ‘문화를 산업적, 또는 경제적 측면으로만 바라본다면 “문화도 돈 된다”는 식의 단순논리에 머물기 쉽다는 것입니다’라는 문장은 오히려 지금처럼 한국문화가 각광받는 시대에 더욱 유효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돈 되는 문화가 있죠. 그러나 그걸 산업적으로 얼마만큼 수익성이 발생하고 경제적 효과 여부로만 따지면 문화는 그냥 사람의 논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문화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산업도 발전하는 시기가 됐다는 거였죠. 문화가 산업을 이끈다는 인식이 소위 말하는 콘텐츠 산업이라는 거예요. 예를 들면 VHS라고 하는 옛날 비디오테이프가 나사 기술로부터 온 거잖아요. 우주에서 생활하는 걸 녹화하기 위해 만든 게 비디오 테크였던 거죠. 엄청난 투자를 해서 만든 물건이었지만 일반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었죠. 대중적으로 팔릴 물건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걸로 집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고 하면서 상품화가 된 거예요. 비디오 플레이어라는 가전제품이 미국 영화라는 콘텐츠 덕분에 팔린 거죠. 콘텐츠가 일반 제조업 매출을 증대하는 역할을 한 거예요. 그러다가 콘텐츠가 가전제품을 파는 시대를 넘어 콘텐츠 자체로 수익을 낼 수 있다고 믿는 시대가 된 거죠. 한때 유명했던 말이 있잖아요. 현대자동차 100만 대 판매 수익보다 <쥬라기 공원> 한 편 수익이 더 많다고 했던, 그게 말장난 같지만 거기엔 콘텐츠 산업이라는 의미심장한 본질이 있는 거죠. 콘텐츠가 더 이상 제조업의 견인 상품이 아니라는 거예요. 결국 모든 산업이 문화적인 상상력을 가져야만 발전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죠. 디지털 시대에 핸드폰을 팔려고 해도 문화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는 거예요. 결국 그렇게 나름대로 문화와 산업이 불가분의 관계로 융합될 거란 생각을 취임사에 썼던 거죠.

 

결국 그런 관점으로 만들어진 정책이 지금 한국 콘텐츠를 향한 세계적인 관심에도 영향을 미쳤다 해도 과언은 아닐 거 같습니다.

예술의 본질은 창의성이에요. 없는 걸 만들어내는 거죠. 우리가 문화산업이라 말하는 부분에도 그 창의성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결국 문화라는 게 다른 산업과 융합될 수밖에 없으니 분리해서 접근하는 게 아니라 한 데 있다는 걸 강조한 거죠. 다만 정책 보고서를 만들 때에는 편의상 분리했어요. ‘창의 한국’은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가 창의적인 발상을 해야만 산업적인 에너지와 생명력을 얻을 수 있을 거란 결론으로 만든 보고서인데 거기 기초 예술까지 포함시켜버리면 기초 예술이 너무 간과될 거 같아서 기초예술 지원책은 ‘예술의 힘’으로 따로 편성한 거죠. 집에 예술품 하나 건다고 예술의 힘이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예술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창의성이 전 분야에 영향을 미칠 거고, 결국 그런 예술의 힘이 국가의 힘이 될 것이라는 의미에 힘을 준 죠. 지금 우리가 그걸 실감하고 있는 거고요. <오징어 게임>이 잘 되면 그 작품 하나만 외국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게 아니에요. 지금 전면적인 한국 문화 혹은 한국 자체를 세계인들이 매력적으로 받아들이잖아요. 말 그대로 한국의 소프트파워죠. 군사력이나 경제적 압박과 같은 하드파워와 달리 소프트파워는 자발적으로 흡수하는 거예요. BTS든, <기생충>이든, <오징어 게임>이든, 무엇을 좋아하게 됐건 그걸 통해 한국 음식을 먹고 싶어 하고,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 하고, 그렇게 전방위적으로 한국을 알고 싶어 하는 거죠. 각기 창이 다를 뿐이지, 그렇게 융합적으로 다가가는 거예요. 결국 누구만의 것이 아닌 모두의 노력이 닿은 결과라고 볼 수 있겠죠.


문화부장관 취임 당시 취임식을 비롯한 대부분의 의전을 생략했습니다. 그리고 온라인 게시판에 올린 취임사에 대구 지하철 참사 현장을 돌아보고 느낀 관료제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통렬하게 쓰셨죠. 취임사를 통해 관료주의를 타파하겠다는 의지를 미리 선언하는 인상이었습니다.

일단 그 취임사를 쓸 당시가 대구 지하철 참사 직후였어요.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죠. 더군다나 저는 대구 출신이라 실감하는 게 남달랐던 거 같아요. 그래서 그 충격이 바탕이 된 것 같고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문화 정책 방향을 자율적으로 바꾸는 게 장관으로서 수행하는 행정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자율성과 대척점에 있는 게 관료주의거든요. 사실 관료주의는 관료의 생각으로 뭔가를 방해하거나 자기들 방식대로만 일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안 하는 거예요. 설명하기가 좀 어렵지만.


일은 하지만 대외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의미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렇죠. 관료주의는 기본적으로 책임질 일을 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들 관료라면 일을 열심히 안 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일은 열심히 해요. 책임지지 않을 일만 하니까 안 보이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뭘 바꾸는 일이란 말이에요. 뭔가를 바꾼다는 건 책임져야 되는 일이 되는 거죠. 그런데 그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니까 뭔가 바뀔 수 없죠. 그게 관료주의의 전형인 거예요. 그러니까 권위주의가 오래가면 관료주의가 따라와요. 권위주의는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니까 상명하복만 하는 관료주의가 유용하죠. 그래도 별 문제가 없으면 관료주의로도 무난하게 지나갈 수 있는데 그게 결국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돼있어요. 문제가 생기면 변화해야 하는데 변화하지 않으니까 문제가 쌓여서 터지는 거죠. 상품백화점도, 성수대교도, 대구 지하철 참사도, 한국 사회에서 대형 사고가 계속 터진 것도 그런 까닭과 무관하지 않아요. 환경이 변할수록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변화해야 하는데 그걸 안 했던 거죠. 그래서 문화부부터 그 변화를 주도해야 했는데 관료주의가 그걸 가로막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것이죠.


결국 그런 분위기를 바꾸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을 거 같은데요.

좋아할 리 없죠. 관료주의를 떠나서 민간 자율 기조를 주장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같은 걸 출범시키는 게 내부 권한을 내놓으라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걱정도 생겨요. 민간 자율이라는 말이 좋긴 해도 정말 민간에 자율 능력이 있는지 말이죠. 실제로 당시 민간에 그 정도 능력은 없을 거라 봤어요. 그런데 능력이 없다고 안 주면 계속 없는 거죠. 그러니까 당장 문제가 생겨도 일단 하도록 해줘야 되는 거예요. 그에 대한 내부 합의가 쉽진 않았어요. 그래도 제 예상보단 내부에서 그렇게 가야 한다는 방향성을 잘 이해해줬고 참여정부의 문화부가 다른 부처보다 빨리 탈관료주의에 적응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크게 힘을 쓴 게 정부 혁신이었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분명 문화부가 가장 앞서 있었어요. 그런데 그 뒤로 정부 전체에서 혁신 과제가 내려오면서 이미 혁신이 된 문화부가 혁신 과제에 맞추기 위한 혁신을 해야 하는 모순도 일어났죠. 관료주의가 그렇게 무서운 겁니다. 혁신을 한다면 내부적으로 혁신하면 되는 건데 그게 과제가 되는 순간 혁신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한 시스템이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더 이상 혁신이 아니죠. 그게 전형적인 관료주의고요. 그리고 한국 사회는 문화 외에도 생활 전반에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어요. 제 나이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 문화를 따라갈 수 없어요. 그렇게 세상이 바뀌는데 옛날 틀을 고집하면 적응할 수가 없죠. 그나마 관료주의의 덫에 걸린 일본에 비하면 우리는 그보단 많이 벗어났고 그로부터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문화부장관이라는 자리가 묘하게 정부의 기조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될 때도 많았던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비정치인이자 문화계 인사가 장관직에 임명되는 것 자체로도 독특한 위치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감독님께서도 장관 시절에 문화정책과 무관한 정부 정책을 대변하는 입장에 서야 할 때도 있었죠.

말씀하신 것처럼 문화부 장관이 정부 정책 방향을 대변해줄 거라는 암묵적인 기대가 있었죠. 특히 문화부는 정기간행물 신고를 받는 기관이라 언론담당 부처처럼 오해하는 경우도 많은데 언론을 직접 관리하는 부처는 또 아니거든요. 다만 언론 환경을 지원하고 좋은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언론을 상대할 일이 생기고 문화부장관이 언론 문제에 관한 사안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인사로 분류될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기존의 문화부장관과 비교했을 때 언론 문제와 각을 세우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언론의 비판 대상이 됐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참여정부의 태도와 연관된 태도이기도 했어요. 그 전까진 정부가 언론과 어떤 식으로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부터 언론과 거리를 둔다는 태도로 임했고, 언론 주무 부처 장관으로서 그런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했죠. 특히 방아쇠를 당긴 듯한 역할을 한 게 문화부에서 상주 기자실을 없애고 모든 기자가 들어와 브리핑받을 수 있는 브리핑룸을 만든 거예요. 단순히 기자실의 성격을 변화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동안의 기자실은 정부 부처와의 관계나 관행 심지어 적폐 같은 것이 뒤엉킨 자리였거든요. 그런 변화를 시행하면서 엄청난 저항과 비판에 직면했어요. 그래도 일관되게 밀고 나갔고 참여정부 말기에는 전 부처로 확대됐죠. 요즘 검언유착 이야기가 나오면서 다시 언론 개혁이 화두인데 검언유착이라는 게 사실 언론과 정부가 얼마나 건강하게 거리를 둘 수 있느냐라는 문제에서 비롯돼요. 그걸 참여정부에서 시도했죠. 당시 보수 언론에서는 저를 편향성을 가진 사람처럼 비판하면서 정치적인 논리로 공격했지만 제 입장은 단순했어요. 그냥 거리를 둔 거죠.


참여정부 당시 스크린쿼터 폐지 문제를 두고 영화계와 정부가 치열한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당시 감독님께서는 장관이셨지만 영화인으로서 첨예한 갈등을 감내해야 하는 중간자처럼 보이기도 했는데요. 20여 년 전에는 그렇게 뜨거운 감자였던 스크린쿼터 제도가 지금은 딱히 언급되지 않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만큼 한국영화의 저변이 넓어진 덕분이기도 한데 지금 관점에서 보자면 그 당시의 갈등이 조금 아이러니하게 다가올 때도 있을 거 같습니다.

반대로 생각합니다. 한국영화가 이렇게 발전한 건 스크린쿼터 덕분이에요. 한국영화의 역사에는 두 가지 동력이 있었어요. 하나는 표현의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스크린쿼터죠. 제가 조감독으로 입문한 게 1992년 무렵인데 그때 처음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판에 오게 됐어요. 그리고 제 첫 영화를 연출한 게 1996년이고, 개봉한 게 1997년이에요. 그런데 1992년 무렵에는 스크린쿼터가 유명무실했어요. 있었지만 거의 지켜지지 않았죠. 감시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한국영화 산업에서 몇 차례 큰 변화가 있었는데 첫 번째가 1988년에 외국영화 직배제를 허용한 것이었어요. 그전까진 중국처럼 수입 허가제였어요. 미국 영화든, 프랑스 영화든 허가받은 작품만 극장에 걸릴 수 있었어요. 허가만 받으면 영화가 돈이 되는 시절이었죠. 한국영화 제작은 외국영화를 수입하기 위한 수단이었고요. 한국영화 여덟 편을 제작하면 해외 영화 한 편을 수입할 수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한국영화가 발전할 리 없죠. 그런데 문화 개방 정책 차원에서 직배제가 허용된 거예요. 허가받을 필요 없이 외국영화 배급이 가능해진 거죠. 그때부터 한국영화 산업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1년에 40편 이상의 한국영화를 상영해야 한다는 스크린쿼터가 마지막 보루였죠. 그래서 영화인들이 스크린쿼터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스크린쿼터 감시단도 운영하고 실제로 지켜지면서 1997년쯤 바닥을 쳤던 한국영화 산업이 다시 활력을 찾기 시작합니다. 한국영화의 발전을 주도한 인재들도 그 무렵부터 나왔고요. 사실 그 당시가 한국 관객들도 한국영화는 돈 줘도 안 본다고 했던 시절이었어요. 그런 관객에게 억지로나마 한국영화를 보게 만든 게 스크린쿼터였죠.

아이러니하지만 장관 시절에 그런 스크린쿼터 제도 축소에 관여하게 돼서 여러모로 곤란하셨을 거 같습니다.

말하자면 제 손으로 동의해주고 나온 셈인데 스크린쿼터 축소를 두고 겉으로는 영화계와 심하게 갈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부적으로는 어느 정도 서로 합의한 상태였어요. 왜냐면 더 이상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우리는 미국과 FTA(자유무역협정)를 체결해야 했고, 미국의 FTA 체결 전제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스크린쿼터 제도를 완화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실질적으로 미국에서 FTA를 강하게 원했고, 우리 내부에서는 걱정이 많았어요. 그런 걱정과 우려를 돌파한 사람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었어요. 그리고 결국 문을 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필 영화가 걸림돌이 된 거예요. 사실 FTA를 액수로 보자면 영화는 정말 미미한 산업인데 그걸 전제조건으로 주장하는 걸 보면 자신감이 상당했던 거예요. 한국시장을 개방하면 얼마든지 압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미국이 얼마나 영화 산업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스크린쿼터는 절대적인 상영 기회를 보장하는 제도잖아요. 1년 365일 중에 상영관의 40%는 한국영화의 절대 상영 시간을 보장하라는 거죠.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런 절대량보다도 다양성이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 이미 한국영화가 40~50%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한 상황이었으니 한국영화가 앞으로 다양성을 얼마나 보여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봤어요. 절대적인 상영시간에 대한 정책과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정책을 변환할 기회라고 생각한 거죠. 스크린쿼터를 어느 정도 양보하는 대신 다양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지원 정책 예산을 마련하고 경제적 지원을 확보하는 게 한국영화 전반에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어요. 그래야 한국영화가 보다 발전하면서 영상 산업 전반에 다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고요. 그리고 한국영화 산업이 다른 영상 매체의 발전을 견인할 거라 생각했어요. <오징어 게임>도 영화감독이 만들었고, 배우들도, 현장에 있던 스태프도 대부분 영화와 관련이 있잖아요. 그렇게 다 연결돼 있는 거죠. 그리고 스크린쿼터를 지키는 싸움이란 문화 주권자가 되겠다는 싸움이잖아요. 스크린쿼터를 사수하는 투쟁에 들어갈 때 영화계뿐만 아니라 문화계가 총력전을 펼쳤는데 문화주권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그런 인식이 끝내 지금의 문화 발전에 동력이 됐을 거라 생각해요.


한국영화의 동력이 스크린쿼터 외에 표현의 자유라고 하셨는데 결국 그런 제도를 통해 버틴 한국 영화계가 다양한 창의성을 가진 감독들을 만나면서 이렇게 발전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이름이 대거 쏟아져 나온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우연이라 봐도 되겠지만 사실 이것도 역사라고 한다면 역사에 우연은 없겠죠. 어떤 인과관계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크게 보면 이렇게 볼 수도 있겠죠. 과거 몇십 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는 민주화였어요. 그러니까 전 사회의 에너지가 수십 년 동안 민주화에 집중된 셈이죠. 그래서 변화가 막혔어요. 다른 나라는 문화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문자에서 영상 중심 시대로 넘어가고 있었는데 한국은 늦어진 거죠. 그런데 80년대 초 일부 대학에 영화 동아리 같은 게 생기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고 사회 전반까지 확산되진 못했지만 제도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점차 그 관심이 에너지를 옮기기 시작한 거죠. 실제로 90년대 초반에 영화 하겠다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어요. 심지어 작가들이 모이면 문학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 이야기를 했죠. 그 정도로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드디어 막혀 있던 둑이 터진 거예요. 그리고 인식의 차원에서 보자면 영상은 관념이 아니라 느끼고 표현하는 거라 사고 체계가 달라져야 해요. 그러면서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영화를 하게 된 거죠. 다양한 성분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영화판으로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이 그때 조성된 거예요.


코로나19 유행으로 전 세계적인 분위기가 침체된 것 같지만 한편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여느 때보다도 높아진 상황입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해외 문화 홍보에 필요한 건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새로운 인식의 변화가 필요할 거 같아요. 한글 배우는 사람 많으니까 한글 가르치고, 영화 보여주면 좋아하니까 영화 보여주거나 영화제 하고, 이렇게 수동적인 이벤트 중심으로 하는 홍보는 이제 지양해야죠.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전 세계적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수요는 분명 예전에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거기에 맞는 시스템이나 콘텐츠를 개발해야 할 거예요. 노력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고 예산도 뒷받침될 필요가 있겠죠. 결국 이 모든 과정이 국내 문화 예술 현장과 연결된 문제일 거예요. 동시에 예전처럼 현지 교민을 위해 신경도 써야 하니 옛날보다 할 일은 보다 많아졌겠죠. 좀 더 정교한 계획이 필요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이들이 궁금해할 질문일 텐데요. 감독님의 신작을 언제 볼 수 있을까요?

지금 쓰는 시나리오를 다 써봐야 하는데 아직 잘 안 되고 있어요. 물론 항상 잘 안 됐지만.(웃음) 개인적으로는 내년에 촬영할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만 늘 알 수 없는 일이죠.


(현재에는 절판된 도서 <케이컬처: 대한민국 해외 홍보 50년의 기록>에 실린 인터뷰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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