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용준 Jan 26. 2023

'더 퍼스트 슬램덩크' 소년이 온다

영원불멸의 청춘을 향한 적막한 열광,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관하여.

적막했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는 듯 그랬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모든 관객들은 영화 말미에 전개되는 ‘라스트 1분’ 신에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랬다. 일찍이 만화책이나 TV 애니메이션으로 <슬램덩크>를 접한 세대라면, 분명 대부분 이미 알고 있을 그 결말을 보고 있을 것임에도 마치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그랬다. 객석의 모두가 숨을 죽이고 사운드를 완전히 증발시킨 듯한 묵음 상태로 진전되는 스크린 너머의 마지막 순간을 목도하는 상영관의 분위기란 마치 진공 상태의 우주 같았다. 어차피 그리 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소리 없는 아우성 같은 에너지가 상영관 내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일본 전국고등학교 농구선수권대회를 의미하는 인터하이 32강전 토너먼트에서 만난 북산고와 산왕공고의 대결은 <슬램덩크>의 오든 에피소드를 통틀어 대단원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사실 새로운 작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퍼스트(The first)’ 즉 ‘처음’이라는 수사를 선언하듯 제목에 명명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일단 북산고와 산왕공고 전을 다룬 <슬램덩크> 애니메이션은 제작된 바 없다. 애니메이션으로 ‘처음’ 만나는 명경기인 것이다. 그런데 그 ‘처음’이라는 의미가 단지 <슬램덩크>의 하이라이트를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한다는 의미로 국한되는 것 같진 않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오프닝 시퀀스는 바닷가 인근의 야외 농구장에서 1:1 승부를 벌이는 두 소년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슬램덩크>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송태섭의 어린 과거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일찍이 중학교 농구부 유망주로 꼽히던 형 신준섭과 함께 유년시절부터 농구를 하며 유대감을 쌓아온 송태섭은 불의의 사고로 사라진 형의 빈자리를 간직한 채 성장해 산왕공고와 일전을 치른다. 그러니까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슬램덩크> 팬이라면 익숙하다고 여겼던 송태섭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제대로 처음 들여다보는 자리이자 송태섭의 시선으로 ‘처음’ 재구성한 <슬램덩크>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대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송태섭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단편만화 <피어스>의 설정에서 착안된 것이기도 하다. 단편에서는 송태섭과 이한나로 추정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초등학생 6학년인 송태섭이 우연한 계기로 이한나로 추정되는 인물을 만나 해안가 동굴에서 대화를 나누며 각자의 상실감을 털어놓게 되는 내용을 다룬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피어스>를 원안 삼아 새롭게 구성한 송태섭의 과거사와 <슬램덩크> 팬들이 기억하는 영광의 순간을 교차편집하며 진전된다. 그럼으로써 전하지 못했던 감동과 전율을 새로운 틀에 담아 새로운 시대에도 여전히 <슬램덩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선물 같은 시간을 선사한다. 

산왕공고는 <슬램덩크> 세계관에서 전통적인 농구 명문 고등학교로 꼽히는 동시에 전국제패를 꿈꾸는 모든 고교 농구팀이라면 반드시 넘어야 할 초고교급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다. 반대로 북산고는 지역 예선을 가까스로 통과한, 인터하이 ‘초짜’팀에 불과하다. 소위 말하는 ‘네임드’와 ‘언더독’의 대결인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그렇듯, 승부를 그리는 모든 이야기에서 언더독의 승리는 언제나 늘 새롭고 짜릿한 법이다. 다만 그 승리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과정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성장을 설득해 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문제아에서 농구 풋내기가 된 강백호의 성장담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다섯 멤버가 북산고라는 원 팀을 이루는 과정은 유년시절을 지나온 모든 언더독들을 위한 희로애락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일까? 자막판으로 한 번, 더빙판으로 한 번, 그렇게 두 차례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관람하는 관객 사이에서 적지 않게 들었던 흐느낌이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서러운 울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CGV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월 10일 기준으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예매한 관객 중 44%는 30대가, 35%는 40대가 차지했다고 한다. 성별 기준으로는 남성 관객이 63% 정도를 차지한다는데 여성 관객이 30% 이상이나 된다는 게 되레 놀라웠다. 실제로 주변에서 <슬램덩크>를 봤다는 여성 지인의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듣기도 했다. 그러니까 남녀를 막론하고, 2023년을 30대 혹은 40대로 지나고 있는 그들이 기억하는 <슬램덩크>의 시대는 분명 10대 혹은 20대였던 1990년대일 것이다. 그렇게 20여 년의 시절을 지나온 뒤에도 여전히 그 코트에서 치기와 패기로 좌절하고 또 일어나는 <슬램덩크>의 캐릭터들을 만난다는 건 멋진 포물선처럼 올려다보고 싶은 어린 시절의 열망과 다시 대면하는 경험처럼, 분명 기분 좋은 일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다시 선명해지는 기억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처음 시작되는 경험일 것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로 다시 불어온 <슬램덩크> 열풍은 극장을 넘어 서점을 강타하고 있다. <슬램덩크> 단행본이 주요 온라인 서점 판매 상위권을 차지하며 품절되거나 예약판매로 전환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주요 구매층은 역시 3040 세대로 파악되지만 <슬램덩크>를 접한 적 없는 젊은 세대의 비율도 1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이 지난 시절에만 유효한 추억이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만든다. <슬램덩크>와 함께 10대를 보내며 성장한 40대가 돼서 다시 만난 감격을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은 유산처럼 느낀다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영광의 시대가 지난 과거도, 먼 미래도 아닌 지금이라고 말하는 강백호의 얼굴은 세대를 막론하고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그렇게 다시 한번 마법 같은 주문을 외운다. ‘포기하면 그 순간이 시합 종료예요.’ 소년이 온다. 마음이 웅장해진다.


(격주간으로 발행하는 '1st Look' 매거진 2023년 1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랑의 달' 이것은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