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유희사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용준 Mar 10. 2023

Z세대를 위한 아이콘은 없다

슬램덩크, 타이타닉, 뉴진스, 90년대 유행의 재림과 Z세대의 징후들.

무려 25년 만이라고 했다. 1998년에 처음 개봉한 <타이타닉>이 25년 만에 재개봉한다고 했다. 그래서 <타이타닉: 25주년>이라는 부제까지 붙었다. 그렇지만 <타이타닉> 재개봉 소식이 대단히 특별하게 들리진 않았다. 4K 3D 리마스터링 버전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미 두 번이나 재개봉한 전력이 있는 작품이라 이번이 세 번째 재개봉이었다. 물론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물의 길>이 전작에 이어 또 한 번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상황에서 <타이타닉>이 재개봉한다니 상징적인 세리머니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재개봉 영화가 개봉 첫 주에 신작들을 뒤로 밀어내고 박스오피스 2위에 오르는 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다. 심지어 <아바타: 물의 길>을 박스오피스 3위로 밀어내고 2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분명 그 자체로 흥미로운 사건이다. 제임스 카메론이 1990년대에 만든 <타이타닉>이 제임스 카메론이 21세기에 만든 <아바타>를 2위로 밀어냈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으로 회자될 사건처럼 보였다. 게다가 <타이타닉>보다 한 단계 높은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작품이 <더 퍼스트 슬램덩크>라니, 만약 1998년에 타임머신을 타고 2023년 2월로 찾아온 이가 즉시 박스오피스 순위라도 보게 된다면 시간여행에 실패했다고 느낀다 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 누가 2023년 2월에 <슬램덩크>와 <타이타닉>이 지배하는 극장가 풍경이 펼쳐질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을까. 개봉 2주 차에도 여전히 대부분의 신작 영화보다 높은 박스오피스 3위를 유지하고 있는 <타이타닉>과 역시 그보다 한 단계 위인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흥행세는 시대착오적인 감각을 일깨울 정도로 특별한 현상처럼 보인다. 1990년대에 큰 사랑을 받았던 만화가, 1990년대에 대단히 흥행했던 영화가, 21세기 영화관을 지배하는 상황에 추억 돋는 관객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은 추억의 힘에 불과한 걸까?

다소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타이타닉>이 처음 개봉했을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학교에서는 단체관람으로 <타이타닉>을 선택했다. 아무래도 학교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는 동시대 영화를 학생들도 목격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교육적이라는 판단으로 <타이타닉>을 선택한 것 아닐까 새삼 추측해 보는데 내 입장에서는 이미 친구와 함께 한 차례 관람한 터였기에 뜻밖의 N차 관람을 하게 된 셈이었고, 주변에도 그런 친구가 더러 있었다. 그래서인지 중간에 몰래 도망가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세 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 중간에 상영을 끊고 쉬는 시간을 제공하는 인터미션은 도망칠 결심을 한 학생들에게 요긴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렇듯 25주년 기념으로 재개봉한 <타이타닉>에 대한 소식을 통해 지난 추억을 반추하는 관객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들이 <타이타닉>의 재개봉 이벤트를 뜻밖의 흥행으로 견인하는 주관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CGV 앱에서 제공하는 세대별 관객 지수는 의외의 답변을 하고 있다. 재개봉한 <타이타닉>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이들 중 50% 이상을 차지하는 건 10~20대 관객이다. 그러니까 다시 찾아온 <타이타닉>을 그리는 향수에 젖은 세대가 아니라 극장에서 처음 만나는 <타이타닉>의 저력을 확인하고 싶은 세대가 재개봉 흥행을 주도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역시 극장 흥행은 20대가 이끌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했다면 오해다. 현재 극장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세대는 30대다. 물론 20대와 40대 관객의 지분도 적은 편은 아니지만 세대별 관객 지수를 보여주는 그래프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세대는 대체로 30대 관객이다. 그러니까 지금 극장계의 큰 손은 30대라는 것이다. 극장가의 흥행을 이끄는 세대가 20대로 분류됐던 과거와 비교했을 때 이는 분명한 변화다. 지금은 30대가 먼저 보고, 20대와 40대가 따라 본다. 그리고 이건 비단 극장가만의 사정은 아닌 것 같다.


지난 2월 1일 오후 8시 LG그램 스타일 뉴진스 한정판 빅버니 모델 200대가 선착순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6분 만에 완판 됐다. 249만 원으로 책정된 가격이 무색할 정도로 ‘순삭’된 셈인데 곧이어 중고거래 플랫폼에서는 200만 원의 웃돈을 얹은 가격대로 판매글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400~500만 원대로 책정된 중고 가격대가 역시 무색할 정도로 예약 완료 표시가 중고 판매글마저 덮어버렸다. 이후로 LG에서 추가 판매를 예고한 뒤로 중고가가 다시 떨어졌다는 후문이 있지만 뉴진스에 대한 열광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실질적인 지표나 다름없었다. 

이는 뉴진스의 팬덤은 주로 30~40대에 형성돼 있어서 구매력이 없다는 항간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한때에는 10~20대가 트렌드를 이끄는 소비의 중심 세대로 일컬어졌지만 현재 돈을 가장 잘 쓰는 세대는 그들이 아니다.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에서 발표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계소비행태변화 분석’에 따르면 지난 2008년에서 2019년 사이 10~20대가 다수를 차지한 MZ세대가 여가 및 취미활동 등을 위해 필수 소비를 절약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고 밝혔다. 반대로 40~50대로 분류되는 X세대의 소비 지표가 가장 적게 변동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만큼 세대 간 경제적 여건의 차이가 크고 그에 따른 소비 심리 행태의 변동성이 크게 나타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결국 10~20대가 동시대 소비의 주축을 이루지 못하는 건 주머니 사정에 대한 기우가 이전 세대보다 확실히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확신을 갖지 못하는 소비를 주저하는 경향이 있고, 상대적으로 필수 소비재로 분류되지 않는 문화 소비 양상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기회비용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있을 때 확실한 소비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N차 관람처럼, 비교적 만족감을 보장한다고 느껴지는 작품을 거듭 관람하는 행위를 주도하는 경향은 다른 세대보다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다. 주도적으로 소비문화를 이끌어가기보단 상대적으로 안전한 것을 확실히 즐기겠다는 의식이 여실히 드러난다고 할까. 이는 10~20대를 대변할 수 있는 동시대 아이콘이 부재한 이유를 설명하는 근거이기도 할 것이다. 


모든 세대에게는 자신의 젊음을 대변할 분신 같은 존재가 있다. 그런데 지금 10~20대에게는 향후 자신들을 대변한다고 말할 아이콘이 있을까? 그들의 현재를 최고의 시대였다고 말해줄 고유명사란 무엇일까? 일찍이 90년대를 주름잡았던 <슬램덩크>와 <타이타닉>이 30~40대를 위한 유물 같은 추억을 넘어 20대를 사로잡은 상황은 결국 고유명사를 추앙해 본 적 없는 세대의 결핍을 목격하는 것과 유의한 현상 아닐까? 무엇보다도 급격하게 탄생 인구가 줄어들고 늙어가는 인구 비율이 늘어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젊은 세대가 주도하고 다음 세대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화적 현상을 목격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지금 혹은 이후의 젊은 세대가 자신들의 시대를 선언하고, 무게중심 세대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지금 이 사회는 그럴 만한 여건을 제공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이 조용한 열광은 점차 낡아가는 동력으로 시대를 버티고 있다는 암담한 징후 아닐까? 자신들을 대변할 아이콘이 부재한 젊음의 시대에 찾아온 이 모든 물음표가 불길한 예고편처럼 보이는 건 그저 기우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격주간으로 발행하는 '1st Look' 매거진 2023년 3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욕망하는 여자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