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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Apr 12. 2023

스티븐 스필버그, 그렇게 영화가 되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생이 담긴 영화 <파벨만스>가 전하는 사랑에 관하여.

“지난 25년간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면 내 마음도 바뀌고, 만들고 싶은 영화도 달라질 텐데, 인생이 변해온 것처럼 열린 마음으로 그 변화를 지켜볼 것이다.” 


2001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뉴욕 타임스>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파벨만스>는 2001년 이후로 만든 15번째 영화다. 197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2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감독이 된 스필버그는 7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35편 이상의 영화를 만들었다. 지난 50여 년간 기복 없이 현재형의 감독으로 살아왔다.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여전히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거듭 만들어 나가는 할리우드의 고유명사로서 공고한 지위를 지켜왔다.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만 놓고 봐도 현존하는 감독 중 197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자기 작품을 꾸준히 주요 부문 후보로 올려놓은 감독은 스필버그가 유일하다. 할리우드 주류 감독으로서 그만한 명성을 꾸준히 지켜온 이는 스필버그 밖에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에는 거창한 역사적 맥락이 없다. 아주 적나라한 영화다.” 스필버그와 함께 <파벨만스> 각본을 작업한 토니 커쉬너의 말처럼 <파벨만스>는 스필버그의 유년시절 일화를 가감 없이 반영한 작품이다. 하지만 전기 영화를 만들겠다는 야심에서 비롯된 결과물은 아닌 것 같다. 퓰리처상, 토니상, 에미상을 수상한 극작가 토니 커쉬너는 <파벨만스>에 앞서 <뮌헨>(2005), <링컨>(2012),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2021) 각본을 쓰며 스필버그와 연을 이어왔다. 그리고 과거 <뮌헨>을 통해 스필버그를 만났을 당시 그의 인생과 관련한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야 될 거다.” 그때는 몰랐다. 자신이 그 이야기를 함께 만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스필버그의 제안은 팬데믹과 함께 갑작스럽게 시작됐다. 비대면 화상 통화를 통해 인터뷰를 시작한 토니 커쉬너는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81페이지 분량의 소설을 쓴 뒤 일부를 스필버그에게 보냈다. 그렇게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했다. <파벨만스>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자신이 연출한 장편 영화의 엔드 크레딧에 각본가로 이름을 올린 네 번째 영화이기도 하다.


<파벨만스>는 어린 유년시절부터 영화 찍기를 거듭해 온 스필버그의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이자 영화와 가족, 예술과 인생이라는 양가적이고 양면적인 세계를 조명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일찍이 영화에 매혹된 소년 샘(가브리엘 라벨)은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 <지상 최대의 쇼>(1955)에 등장하는 기차 충돌 신에 사로잡혀 아버지 버트(폴 다노)가 선물한 장난감 기차를 동원해 그 장면을 거듭 재현한다. 그러다 어머니 미치(미셸 윌리엄스)의 권유로 그 장면을 재현한 영화를 찍게 되고, 그렇게 완성한 3분짜리 영화를 자신의 두 손바닥 위에 영사한다. 자신이 통제한 세상을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경험으로 소년은 빠져들었다. 스필버그는 “카메라는 내게 사회적 여권”과 같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열정이 있었지만 초대받지 못한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다는 열망”도 있었기에, 외형적으로 왜소하고 별볼 일 없어 보이는 유대인 소년 입장에서 “영화를 만드는 건 마법의 약을 먹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10대 시절 자신이 든 8mm 카메라는 “영화 출연을 희망하는 멋지고 잘 생긴 애들의 호감을 살 수 있는 사교 생활의 무기”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일찍이 영화를 통해 자기 삶을 일굴 수 있다는 사회적 경험을 해본 셈이랄까. 

유년시절의 스티븐 스필버그
스티븐 스필버그의 아버지 아놀드(왼쪽)와 어머니 레아
스티븐 스필버그와 세 여동생 앤, 낸시, 수(왼쪽부터 차례로)

“아이가 언제부터 부모를 인간적으로 보기 시작하는지, 그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7세에서 18세 사이에 그런 경험을 했기에 그것이 영화에 반영된 셈이다.” 스필버그의 말처럼 <파벨만스>는 가족을 통해 알 수 없었던 진실을 깨닫는 소년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가 가족의 진실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지만 영화를 통해 목도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성장드라마이기도 하다. “내 눈이 보고자 하는 진실을 믿는 대신 영화가 말하는 진실만 믿었고, 그것이 결국 내게도 진실이 된 셈이다. 그래서 영화가 내게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나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됐다.” 가족 캠핑 영화를 만들던 샘이 정작 자신의 두 눈으로 감지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외도 정황이 찍힌 영상을 보고 그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영화가 진실을 담아내는 눈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세상에 미칠 수 있는 거대한 영향력을 깨닫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은 샘이 영화를 찍기를 중단하게 되는 계기로 이어지지만 끝내 다시 카메라를 잡게 된다. 함께 졸업하는 동창들을 위한 영화를 찍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을 곧잘 위협했던 학우로부터 의외의 질문을 받게 된다. 나는 너를 괴롭혔는데 너는 왜 나를 영웅 같은 존재로 만들었냐는 의문이 전해진다. 이 뜻밖의 상황은 마치 배우와 감독의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비유적인 상황처럼 보이기도 하고, 현실을 포착한 이후로 편집된 현실은 결국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시선과 마음이 투영되고 관통한 결과임을 새삼 되짚게 만드는 해프닝이 된다. 


<파벨만스>는 스필버그를 위한 이야기이자 영화에 관한 이야기이며 끝내 영화라는 세계가 촉매한 성장드라마일 것이다. 토니 쿠쉬너가 “<파벨만스>를 생각할 때 조금 아쉬운 건 이것이 그의 이야기라는 걸 반복해서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라 말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는 이 진실된 성장드라마가 한 사람의 인생을 재현했다는 사실 안에서 저평가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작가로서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벨만스>는 분명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혹은 영화가 아니라 해도 무언가를 아끼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보다 그것을 사랑하고 아낄 수 있는 위로와 용기를 주는 영화로 남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결국 사랑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그 사랑을 응원한 이들에게 위안을 안기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파벨만스>는 엔드 크레딧 이후에 등장하는 자막처럼 스필버그의 어머니 레아와 아버지 아놀드에게 헌정된 영화인데 스필버그의 유년시절에 이혼한 두 사람은 서로 힐난하거나 비난하는 사이가 아니었고, 말년까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스필버그의 유년시절을 함께 한 세 자매는 <파벨만스>의 제작과정을 지지하고 응원했으며 그만큼 영화를 보는 게 떨리는 일이었지만 결국 영화를 보고 나서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다. 결국 자신의 영화를 지지하고 응원한 가족의 사랑을 통해 길어 올린 재능이 자신의 가족은 물론 전 세계 모든 이들의 마음을 온화하게 만드는 재능으로 투사된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건 <파벨만스>가 노년에 이른 대가가 남긴 만년의 소회가 아니라 여전한 청년의 영화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대단한 경력이 아닌 원점을 조명한 영화라는 점 역시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겠다는 야심처럼 읽힐 정도다. 스필버그는 35mm 카메라로 찍은 26분짜리 단편 <앰블린>으로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감독으로 낙점돼 21살이라는 빠른 나이에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만큼 기념비적인 영화라 할 수 있는 <앰블린>은 스필버그가 세운 영화사의 이름이 됐고, 스필버그의 영화는 늘 <E.T.>에 등장하는 자전거 비행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미지와 함께 떠오르는 앰블린 스튜디오의 로고로 시작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앰블린 스튜디오에는 그가 애장하는 미국 일러스트 작가 노먼 록웰의 작품이 곳곳에 걸려있는데 그중에서도 스필버그는 <고공 다이빙대 위의 소년(High Dive)>이라는 작품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겁에 질린 듯한 소년이 다이빙 보드 위에 웅크리고 누워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 그림은 스필버그가 늘 영화를 시작할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라고 한다. 영화는 그에게 여전한 경외와 동경의 세계인 것이다. 

노먼 록웰의 <High Dive>

“나는 영화 제작을 너무 좋아하기에 그 어떤 것도 나를 방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어떤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파벨만스>는 결국 스필버그라는 이름과 영화가 만인이 거듭 돌아갈 영원불멸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는 예언에 가깝다.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영화는 영원할 것이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법이다. 스필버그, 그렇게 영화가 되었다.


(격주간으로 발행하는 '1st Look' 매거진 2023년 4월 첫 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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