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미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동양인들이 주류로 떠오른 이유에 관하여.
“할리우드에 처음 왔을 때가 기억난다. ‘너는 소수자야’라는 말을 듣고, ‘아니, 그럴 순 없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누군가는 ‘영어 할 줄 알아?’라고 물었다. 그들이 한국이나 일본, 말레이시아, 아시아, 인도를 모르는 건 잠시 잊자. 그래서 난 ‘여기까지 오는데 비행기로 13시간이나 걸려서 그동안 영어를 배웠다’고 했다.”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영화 코미디/뮤지컬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양자경이 남긴 수상 소감이다. 양자경은 오스카에서도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무대에 올랐다. 아시아 배우로서는 최초였다. 그에 앞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키 호이 콴도 무대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내 여정은 보트 위에서 시작됐고, 난민 수용소에서 1년을 머물렀다. 그런데 지금은 할리우드의 가장 큰 무대 위에 있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나 일어난다고 말하고, 나도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아메리칸드림이다!”
그렇다. 여전히 아메리칸드림의 시대다. 혹자는 21세기에 무슨 철 지난 아메리칸드림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일찍이 아시아의 스타 배우였던 양자경도, 한때 스스로 배우 경력이 끝났다고 여겼던 키 호이 콴도, 오스카 트로피를 감격스러운 증명이자 기적처럼 여기는 것을 보면 되레 확실하다. 지금 할리우드는, 오스카는, 아시아 출신 배우들의 아메리칸드림을 위한 무대다. 어쩌면 이게 다 봉준호 감독 때문일지도 모른다. 2019년 미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오스카 시상식이 ‘글로벌이 아닌 로컬 시상식’이라 정의한 봉준호 감독의 도발(!)에 응수하듯 2020년 오스카 시상식은 <기생충>에게 4관왕의 영예를 안겨버렸다. 마치 ‘로컬이 아닌 글로벌’이 되겠다는 야심을 발표하듯 그랬다. 그 뒤로 <미나리>에 출연한 배우 윤여정이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중국계 감독 클로이 자오가 연출한 <노매드랜드>가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올해에는 동양인 이민자 가족의 삶을 바탕에 둔 기상천외한 멀티버스 SF 가족 드라마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주요 부문을 휩쓸며 7관왕에 올랐다. 이는 비단 영화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돼 좋은 반응을 얻은 <성난 사람들(Beef)>은 아시아계 미국인 캐릭터를 앞세운 미국 드라마다. 길거리에서 운전 중 분노를 표출하고 갈등을 벌이는 ‘로드 레이지(Road rage)를 소재로 둔 이 작품은 주연을 맡은 스티븐 연과 앨리 웡을 비롯해 동양인 배우가 대거 등장한다. 한국계 배우들도 적지 않게 등장하기 때문에 한국어 대사의 분량도 상당하다. 미국 사회에 정착한 동양인의 삶이 영화의 주요 맥락이라는 점 자체가 이색적이다. 작품의 제작 총괄 책임자인 쇼러너를 맡은 이성진은 직접 각본을 썼고, 연출도 맡았다. 동양인의 시선으로 미국에서 살아가는 동양인 이민자의 삶을 그려냈다. 그러니까 동양인 캐릭터는 더 이상 추가로 덧붙여 배달되는 양념 소스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아시안 퀴진에는 아시안 셰프가 필요하다. <미나리>를 연출한 정이삭이나 <파친코>를 공동연출한 코고나다와 저스틴 전은 모두 한국계 감독이다. 중국계 가족의 삶을 그린 <페어웰>이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역시 모두 중국계 미국인 감독 룰루 왕과 존 추가 연출했다.
아시안 디아스포라 영화/드라마가 연이어 제작되고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는 현상이 이어지는 건 결국 다양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윤리적/도덕적 영역에 국한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미국의 영상 콘텐츠 산업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이윤을 염두에 두고 기획되며 제작된다. 장르와 규모를 불문하고 동양인 캐릭터 중심인, 동양인의 삶을 반영한 영화나 드라마가 제작된다는 건 그 산업 내에서 그것이 팔릴 만한 콘텐츠라고 확신하고 투자를 결정하는 기준선이 마련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플TV플러스나 넷플릭스 같은 OTT 플랫폼은 동양인 창작자나 배우들을 위한 유니세프 같은 후원 단체가 아니다. 공짜는 없다. 그들이 지갑을 연 건 동양인 일색의 드라마가 전 세계적인 열광을 부르는 신드롬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바로 <오징어 게임> 말이다. <오징어 게임>의 성공은 완벽한 점프였다. 동양인 캐릭터가 대거 등장하고, 그들의 삶을 그린 드라마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볼거리를 이루고, 보편적인 공감대를 건드릴 수 있는, 신선한 재미와 보편적 쾌감을 함께 안길 수 있는 새로운 텃밭이라는 사실의 완전한 증명 말이다. 동시에 아시아 시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글로벌 OTT플랫폼이 이러한 현상을 지속적인 흐름으로 이어가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건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지난 2020년 이후로 전 세계 어느 곳처럼 미국도 팬데믹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코로나19 발원지가 중국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동양인에 대한 혐오 범죄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국적은 상관없었다. 애초에 한국인과 일본인과 중국인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동양인은 중국인처럼 공격해도 되는 대상이었다. 미국의 ‘증오 및 극단주의 연구 센터’에서 발표한 증오 범죄 데이터에 따르면 2021년에 동양계 미국인 증오 범죄가 전년 대비 339% 증가했다고 한다. 뉴욕,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 몇몇 도시에서는 사상 최대치를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고 한다. 흑인과 유대인, 동성애자와 함께 동양인이 증오 범죄의 주요 표적으로 떠오른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는 동양계 미국인이 비로소 미국 사회 내에서 주목받는 대상이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양계 미국인 혐오 범죄는 예전에도 분명 존재했지만 다른 인종차별만큼 중요한 문제로 다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동양계 미국인을 인식하는 경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렇다.
대부분의 아시안 디아스포라 영화와 드라마는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수렴된다. 이는 장르적 클리셰가 아니라 실존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고민을 반영한 아시안 디아스포라 영화와 드라마가 진중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것을 넘어 다채롭고 신선한 오락으로 존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거듭 증명하고 있다는 건 결국 그들의 고민이 그 사회의 주류 문화로 떠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금은 절정기가 아닌 과도기일 뿐이다. 놀라운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장담은 어렵지만 이제 ‘동양인 최초’라는 수식어가 요원한 시대는 지나갔다. ‘아시안 인베이젼’은 당분간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그리고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 같은 한국 콘텐츠가 아시아 콘텐츠의 힘을 증명하고 그 흐름을 주도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한국 콘텐츠에는 분명한 저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