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대작과 한국영화 화제작이 연이어 개봉하는 올여름 극장가에 관해.
끝났구나, 마침내. 이번 여름은 드디어 팬데믹의 터널에서 완전히 벗어난 첫 번째 여름이 될 전망이다. 지난여름과는 분명 다른 여름일 것이다. 덕분에 다시 찾아온 여름 성수기 대목을 즐기려는 이들과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이들의 기대감이 벌써부터 함께 이글거리는 것만 같다. 극장 역시 지난 몇 년과는 다른 여름을 기대하고 있다. 팬데믹 이전까지만 해도 여름철 극장가는 영화 산업에서 중요한 성수기로 꼽혔다. 한국만의 사정이 아니다. 여름 시즌에 맞춰 개봉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매년마다 찾아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름 극장가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2020년부터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유행과 함께 찾아온 팬데믹으로 인해 관객도, 영화도 사라진 극장의 화두는 흥행이 아닌 생존이었다. 그리고 엔데믹을 맞이한 이번 여름은 지난 몇 년간 유례없는 불황을 감당해야 했던 극장가가 기다리던 진정한 대목일 것이다. 이미 지난 5월부터 할리우드 대작과 한국영화 화제작이 매주 단위로 연이어 개봉하며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당기고 극장의 여름 분위기를 예열했다. 마블 스튜디오의 프랜차이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me 3>와 <분노의 질주> 10번째 시리즈인 <분노의 질주: 라이드 오어 다이> 그리고 디즈니 100주년 기념작 <인어공주>와 지난해 천만 관객을 동원한 <범죄도시> 시리즈의 속편 <범죄도시3>까지, 매주마다 굵직한 작품들이 이어달리기를 하듯 개봉했다.
6월부터 극장가의 기세는 예사롭지 않다. 할리우드 대작 영화와 한국영화 화제작의 행렬은 계속될 전망이다. <트랜스포머> 프랜차이즈를 리부트 하는 <트랜스포머: 비스트의 서막>과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신작 <엘리멘탈> 그리고 새로운 반등을 기대하는 DC의 슈퍼히어로 영화 <플래시>와 큰 반향을 일으켰던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속편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가 매주마다 순차적으로 개봉하는 가운데 무려 15년 만에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소견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도 6월 개봉을 예고하고 있다.
7월과 8월에도 극장의 기세는 꺾이지 않을 전망이다. 톰 크루즈의 초인간적인 스턴트 액션을 앞세워 일찌감치 화제를 모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7번째 작품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은 올해 최고의 흥행작 중 하나가 될 전망이다. 마고 로비와 라이언 고슬링이 바비 인형을 연기하는 <바비> 역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대작이다. 이렇듯 할리우드 대작의 공세가 만만찮은 가운데 김혜수, 염정아, 조인성이 출연하는 류승완 감독의 신작 <밀수>가 7월 26일 개봉을 확정했고, 한 주 뒤인 8월 2일에는 설경구, 도경수, 김희애가 출연하는 김용화 감독의 우주 SF영화 <더 문>이 개봉한다.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이 출연하는 엄태화 감독의 아포칼립스 재난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도 8월 개봉을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도 8월 15일 국내 개봉을 예고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는 가히 올해 최고의 화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핵무기를 개발한 이론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관한 영화로 알려진 <오펜하이머>는 킬리언 머피, 에밀리 블런트, 맷 데이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플로렌스 퓨 등 내로라하는 스타배우들이 즐비한 출연진 리스트만으로도 굉장한 예감을 부르는 작품이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테넷>의 전 세계 개봉을 강행한 극장주의자 크리스토퍼 놀란이 <오펜하이머>를 통해 또 한 번 극장에서 만끽할 수 있는 시네마틱 체험을 선사하리라는 기대감이 지난 여느 때보다 크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위기가 지나가면 함께 살고 사랑하고 웃고 울어야 하는 인간의 집단적인 참여가 가능한 공간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강력해질 것이다. 영화가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극장이 필요하다.” 지난 2020년 초 미국 최대 멀티플렉스 체인인 AMC가 영화관을 폐쇄하던 당시 크리스토퍼 놀란이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갑작스럽게 창궐한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해 극장은 가장 먼저 갈 수 없는 공간 중 하나로 변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사정은 비슷했다. 덕분에 스트리밍 기반의 OTT서비스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극장 관객이 아닌 시청자로서, 스크린이 아닌 모니터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 점차 익숙해졌다. 불과 3년여 만에 극장을 바라보는 관점이 돌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통계에 따르면 극장을 찾은 관객수는 팬데믹 이전인 2019년에 비하면 절반에 불과하지만 팬데믹에 압도됐던 2020년과 2021년과 비교하면 두 배 가까이 상승한 1억 명 수준을 회복했다. 그리고 2023년 4월까지 기록을 보면 2022년과 비교했을 때 매월 두 배 이상 관객수가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지표로 보자면 확실히 극장가가 팬데믹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팬데믹 이전 수준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흥행 지표가 예년 수준을 회복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분위기가 여전히 영화 극장가 풍경을 보다 우울하게 만드는 것 같다. 팬데믹 이후 능동적으로 극장 관람을 선택하는 관객이 확연히 줄어든 인상이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볼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확실히 비좁아졌다. ‘나중에 OTT에 올라왔을 때 보면 되지’라는 말을 손쉽게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부정적인 관람평의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 강해진 인상이다. 자신의 주관보다는 타인의 평가에 의존해 영화를 선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모험을 하지 않는다. 경제불황과 물가상승도 이런 분위기를 부채질하는 요인으로 보인다. 그만큼 그 어느 때보다 극장 경험을 설득하고 각인시킬 블록버스터, 즉 텐트폴 영화의 역할이 중요해진 상황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세가 거세게 느껴지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미국 극장가 역시 팬데믹 기간과 비교했을 때 회복세가 두드러지지만 팬데믹 이전 기간과 비교했을 때에는 아직 한참 모자란 상황이다. 반등의 계기가 필요하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물량 공세가 두드러지는 것도 이러한 기대 심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영화 한두 편이 흥행한다고 해서 극장 분위기가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낙관은 어렵다. 하지만 확실한 건 결국 관객을 다시 극장으로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선 그런 기대감을 부추기는 영화가 먼저 돌아와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름 시즌에 개봉할 화제작들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 보인다. 텐트를 세워도 사람이 들어오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세워야 맞이할 수는 있는 법이므로, 여름 대작들이 극장을 구원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관객의 이목을 끄는 영화가 돌아온다는 건 분명한 조짐처럼 보인다. 영화의 여름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