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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un 12. 2023

우리에겐 더 다양한 '인어공주'가 필요하다

흑인 '인어공주'를 혐오하는 이들이 되레 지향하게 만드는 미래에 관하여.

2019년 7월 3일, 디즈니는 공식 SNS 계정을 통해 <인어공주>의 에리얼 역으로 할리 베일리가 선택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의외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 배우가 캐스팅됐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놀랐다. 하지만 놀라움을 넘어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들도 상당했다. 애니메이션 원작과 달리 백인이 아닌 흑인 배우를 캐스팅했다는 소식에 분개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SNS를 비롯한 온라인상에서 ‘#NotMyAriel’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과격한 반응을 쏟아내는 이들이 적지 않게 등장했다. 심지어 할리 베일리의 외모 비하를 바탕에 둔 혐오적인 표현까지 횡행했다.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 우리는 그저 그 역할에 가장 적합한 배우를 찾고 있었을 뿐이다.” <인어공주>를 연출한 롭 마샬 감독은 에리얼 역을 위한 오디션 과정에서 배우의 피부색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밝혔다. ‘대단한 열정과 기쁨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이 목표’였다고 설명했으며 그러한 자질을 할리 베일리에게서 발견했다고 밝혔다. 본래 할리 베일리는 <인어공주> 오디션에 참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9년 그래미 시상식 무대에 선 할리 베일리를 본 롭 마샬은 에이전시를 통해 오디션 참가를 제안했다. 그렇게 마법이 시작됐다.


<인어공주>의 메인 넘버 ‘Part of Your World’는 할리 베일리를 위한 송가였다. 롭 마샬은 할리 베일리의 감미로운 보컬과 당당한 태도에 완전히 매료됐고, 오디션 과정에서 이를 압도하는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다. 정작 자신이 캐스팅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할리 베일리는 오디션 이후 긴 시간에 걸쳐 이어진 스크린 테스트를 받는 과정에서도 별다른 기대를 갖지 못했다. 하지만 <인어공주>는 할리 베일리를 위한 무대였다. 

할리 베일리는 유년시절 <인어공주>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캐스팅에 불만을 갖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되레 <인어공주>의 에리얼이 유색인종이었다면 그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생각해 보게 됐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건 참 흥미로운 사건이다. 실사영화로 제작된 <인어공주>에 대한 감상은 각기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기 전부터 혐오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반응하는 이들의 태도는 분명 이상한 징후다. 


<인어공주>의 주인공을 흑인으로 캐스팅한 것이 디즈니가 PC 강박에 빠진 탓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은 논리적으로 기이한 주장이다. 백인 캐릭터를 흑인 캐릭터로 바꾸는 게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에 포함된다는 발상은 결국 백인 캐릭터를 흑인으로 변환하는 발상이 정의롭다는 기준 안에서 해석돼야 마땅하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다. 아귀가 맞지 않다. 창작의 영역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건 그만큼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기 위한 보편타당한 노력에 가깝다. 이는 결국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자 창작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얕은 소견에 불과하다. 

역설적이지만 할리 베일리의 캐스팅을 디즈니의 PC 강박이라 주장하는 이들에게서 비뚤어진 PC 강박이 드러나는 것만 같다. 다양성은 21세기의 화두다. 그리고 다양성이 새로운 시대의 화두가 된 건 올바름을 인식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사회적 진화나 다름없다. 인종과 국적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시대를 지나 개별적인 재능과 성향을 염두에 두고 더 나은 가능성을 탐색하는 건 결국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염원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영화를 비롯한 창작자들은 그러한 분위기를 최전선에서 반영하는 부류다. 이런 시대에서 흑인 인어공주를 상상하는 건 결코 이상한 인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흑인 인어공주를 향해 혐오적인 발언을 내뱉는 이들의 비좁은 마음들이 이 세계가 나아갈 길을 보다 선명하게 가리키는 것 같다. ‘내가 저 세상의 일부가 될 수 있다면’이라는 ‘Part of Your World’의 가사가 백인의 전유물이 아닌 세상은 이제 현실이다.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다. 세상은 나아가고 있고, 함께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은 도태될 뿐이다. 우리에게는 더 다양한 피부색과 표정을 가진 인어공주가 필요하다. 그렇게 될 것이다.


(고려대학교에발행하는 학보 신문 <고대신문>의 '타이거살롱' 섹션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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