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도, 교사도, 약자라면 버틸 수 없는 교실의 시대에 관하여.
‘그러니까 체벌을 해야 돼.’
며칠전 버스에서 옆에 서있던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됐다. 아무래도 최근 교실에서 자살한 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마음이 심란해졌다. 교권 강화를 위한 수단이 체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더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학생이 교사를 패고, 학부모가 선생님을 협박하는 건 선생이 약자가 됐기 때문이며 선생님을 강자로 만드는 건 때리는 힘에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면 앞으로 선생님이 때려도 그걸 막을 수 있는 학생은 역시 선생을 팰 수 있는 것 아닌가? 체벌의 규칙은 어떻게 정립할 수 있을까? 교육부에서 기준을 정해서 체벌 도구를 직접 배포할 것인가? 학부모 동의를 얻어서 체벌 요건을 정립할 것인가? 그럼 드디어 스승의 날에 존경받는 선생님의 시대가 올 것인가?
교사가 학생보다 강자가 되면 해결된다는 힘의 논리가 일찍이 폐기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찍이 교실은 힘의 우위를 배우는 경쟁터였고 전장이었다. 누가 누굴 때린다는 문제를 넘어 치열한 경쟁이 당연하다는 것을 천편일률적인 테스트 방식으로 가리는 순위 발표로 체득해온 학생과 선생과 학부모가 뒤엉킨 소리 없는 아우성 같은 공간이었다. 학교 폭력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생성되고 가려진다. 남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가 누군가에게는 일류대학을 가기 위해 학창시절을 모범적인 우등생으로 버티게 만드는 비결이 된다면 누군가에게는 당장 센 힘을 과시해서 왕놀이하기 좋은 터전이라는 깨달음으로 번쩍 다가올 것이다. 힘이 있으니까 누군가를 괴롭혀도 된다는 심리를 억제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무리지어 약자를 사냥하듯 괴롭힌다. 그리고 학교에서 이를 교화하고 선도해야 할 선생님들은 힘이 없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철 지난 유행가 후렴구 같은 교육 개혁이라는 말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차트 1위에 오른 이유를 모르겠다 싶은 노래 제목처럼 찾아왔다. 그런데 과연 개혁이 됐는가. 개혁의 대상이 늘 입시 방법과 수능 정책에만 집중되는 사이 교육의 본질은 애초에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처럼 내팽개쳐졌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지금 교육 현장에서 얼마나 가능한지 궁금하다. 공교육이 사교육에 밀리는 건 결국 지금의 입시 시스템 하에서 애들을 갈아넣어 좋은 대학 보내는 노하우는 사교육이 월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시험 잘 보면 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학교의 교육 정책이고, 시험 잘 보는 애들을 관리하고, 그와 무관한 애들은 지들끼리 뭘 하든, 누가 누굴 때리든, 누가 누구에게 맞든,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게 학교의 현실일 것이다. 무력한 벌점 같은 건 통하는 애들에게나 통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공교육 강화를 위해 사교육을 통제한다는 정책은 썩은 강을 살리겠다고 강 주변에 보를 더 짓는 짓거리와 다를 바 없다.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힘 없는 교사도 힘 없는 학생 꼴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선생님은 무섭지 않다. 만만한 애를 때리고 괴롭혀도 되는 곳이 교실인데 무섭지 않은 선생 따위가 심기를 건드리는 걸 참아야 하는 이유를 학교는 가르쳐준 적이 없다. 엄마, 아빠도 그게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결국 지금 날카롭게 튀어나온 이 비극은 어느 누군가의 특별한 사연이 아닐 것이다. 그냥 다들 그렇게 버티고, 대부분 나가떨어지고 있는데 이제 와 눈에 띄는 쓰러짐을 모두가 목격한 것뿐이다. 힘이 없는 학생도, 힘이 없는 교사도 괴롭힘을 당하는 학교에서 전인격적인 교육이란 전설 속의 유니콘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이 단순히 대학 입시를 위한 사다리타기에 불과한 교육 정책이 개선되지 않는 이상 학교는 갈수록 더더욱 학교가 아닐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사교육과 공교육이 분리되는 것 자체가 기이한 날도 올 것이다. 정말 죽거나 미치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