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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Oct 11. 2023

'오펜하이머' 이토록 광활하고 심대한 야심

'오펜하이머'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경력을 총집약한 야심작이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서 빌려왔다는 이 구절은 이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를 상징하는 언어가 된 것 같다. 인류 최초의 핵폭발 실험으로 알려진 트리니티 실험을 재현하는 순간, 관객에게 진공의 체험을 선사하듯 완전히 사운드를 소거한 상영관 내에서 나직이 들려오는 이 독백 내레이션은 영화의 전후를 가르는 기표로서 관객의 뇌리에 삽입된다.


이는 실제로 오펜하이머가 1965년 TV에 출연해 언급한 내용을 영화적으로 인용하고 반영한 결과다. 오펜하이머는 해당 TV 연설에서 핵폭발 실험에 성공할 당시 이 문구를 떠올렸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이 사실을 바탕으로 영화의 전후를 가로지르는 극적인 기표를 마련한다. <오펜하이머>에서 이 대사는 핵폭탄이 개발된 세계의 전후 역사를 구분하는 언어로 제시되는 동시에 오펜하이머라는 개인의 명망이 폭발하고 추락하는 대단원의 전조 같은 복선으로 자리한다. 전 세계 역사를 좌우하던 전쟁을 종식시킬 만큼 위력적인 파괴를 창조해 낸 과학자는 그로 인해 거대하게 폭발하는 듯한 명성을 얻지만 이것은 끝내 전례 없는 추락의 운명으로 그를 인도한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핵개발 프로젝트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한 오펜하이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오펜하이머의 명성을 끌어내린 정치적 야심가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핵분열과 핵융합으로 구별된 컬러영상과 흑백영상은 각기 다른 관점의 세계를 살아가는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세계를 교차편집하며 거듭 진전된다. 우주만물의 신비를 들여다보고 그 진리를 밝히고자 하는 과학자의 야망과 자신의 권위를 드높일 경력에 천착해 모든 정황과 관계를 판단하고 재단하려는 정치가의 야심은 한 시대와 한 세계의 역사를 가늠하는 주요한 바늘이자 태엽처럼 작동한다. 공통의 시간 속에서 교차하는 이질적인 관점의 세계는 한 세계를 이루는 기이한 분열과 융합의 역사로서 맞물려 돌아간다.


빛은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는 양자역학의 증명은 역설적이지만 불가지론의 절대적 신비를 강화하는 역설이다. 자연적 신비의 근원을 알 수 없지만 그 신비가 실존한다는 증명은 결국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근본적인 진실의 권위를 보다 두텁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오펜하이머>는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상반된 관점이 평행선을 이루듯 한 세계 혹은 한 인간으로 수렴하고 공존한다는 사실을 양자역학처럼 반영하고 응용한 관점의 영화로 보인다. 과학자로서 가상의 이론을 실제로 증명하고 실제로 목격했다는 성취감과 유례없는 살상력을 가진 무기를 만들어냈다는 죄책감이 공존하는 오펜하이머의 태도는 모순적이지만 <오펜하이머>는 그것이 한 인간의 내면 안에 공존할 수 있는 양가적 입장일 수 있다는 사실을 영화적으로 증명하는 것만 같다. 

트리니티 실험을 마주한 오펜하이머의 모습은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작은 원형 창문으로 거대한 핵폭발의 순간을 목도하는 오펜하이머는 거대한 빛에 둘러싸인 완전한 침묵 속에서 종교 경전의 경구를 떠올린다. 거기서부터 영화는 본격적인 질주를 시작한다. 정확히 1시간 58분의 러닝타임에 다다라 재현되는 트리니티 실험은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서막이다. 한 인간의 모순이 분열하고 두 인간의 상반된 야심이 융합된 세계의 풍경을 하나의 스크린에 세워 넣는 야심, 그리고 이 야심을 목격할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거대한 중력의 형성, 영화 역사상 가장 광활하고 심대한 야심의 순간. 나는 완전히 그 야심에 매혹돼 빨려 들어가 이 속삭임에 압도되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Marie Claire Korea> 10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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