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시간과 인생에 관한 영화, '센티멘탈 밸류' 읽어보기.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연출한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신작 <센티멘탈 밸류>는 지난해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노르웨이 작품임에도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과 작품상 같은 주요 부문을 포함한 9개 부문 후보로 지명됐으며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한 화제작이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풍경을 조망하듯 시작하는 <센티멘탈 밸류>는 어느 집의 외관을 찬찬히 비추며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말문을 연다. 그 집에 사는 어린 소녀 노라는 6학년 무렵 사물의 입장에서 글을 써보라는 숙제를 받은 뒤 집이 되기로 결정한다. 덕분에 답해야 할 물음들이 생긴다. 바닥은 밟히는 걸 좋아할까? 벽은 간지럼을 탈까? 집은 고통을 느낄까? 알 수 없는 물음 사이에서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집은 텅 빈 것보다는 가득 찬 것을 좋아한다는 것.
그런 어느 날 아버지는 집을 떠났고 돌아오지 않았다. 부모가 일으키던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노라의 방에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길게 벌어진 긴 금이 있다. 100년 전 완공할 당시 이미 집이 비뚤어진 탓에 일찍부터 어긋난 것이다. 그래서 어린 노라는 집이 느리게 가라앉으며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라가 성장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대신 노라의 가족들이 하나둘씩 그 집을 떠나갔을 뿐이다. 아버지가 떠난 이후로 성인이 된 노라(레나타 레인스베)와 여동생 아그네스(잉가 입스도테 릴레오스)는 각자의 방식으로 독립했고, 그 집에 홀로 남은 어머니 역시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 노라가 썼던 글처럼 아버지가 떠난 후 가벼워진 집은 점점 더 가벼워졌다.
일찍이 젊은 시절부터 유명감독이었던 노라의 아버지 구스타브(스텔란 스카스가드)는 오랜만에 과거 자신이 떠난 집을 찾는다. 아내의 장례식 후 이어지는 리셉션이 열리고 있는 그곳에서 두 딸과 재회한다. 반가움과 당혹감 사이 어디일지 모를 어색한 미소로 마주하는 세 부녀의 재회를 집도 반기는지 알 수 없지만 가벼웠던 집은 다시 무거워진 것만 같다. 그 어색한 재회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구스타브는 노라에게 시나리오를 건넨다. 자신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주길 제안한다. 그것이 노라를 위해 쓴 각본이라 부연한다. 그러나 노라는 거부한다. 연극배우인 노라는 아버지가 자신이 출연한 연극을 끝까지 본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아버지의 작품에 출연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답한다. 잠시 살가웠던 분위기는 급속히 냉랭해진다.
<센티멘탈 밸류>는 오래된 집의 역사를 통해 어느 가족의 시간을 형성하는 결과 폭을 인식시킨다. 시간이란 흐르기도 하고 쌓이기도 한다. 흐르는 시간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지금으로 나아가는 삶의 결을 이룬다면 쌓이는 시간은 밀려난 지금들이 그리고 확보한 삶의 폭을 이룬다. 가족이라는 시간 역시 마찬가지다. 일찍이 운명적으로 구획된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형성된 경험이나 감정은 그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 영향력이란 저마다 다를 것이고, 그 차이에 따른 인과 역시 각기 다를 것이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의 개별적인 삶은 어떤 식으로든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으로 수렴하는 사연이 되고, 크든, 작든, 비좁든, 너르든, 서로에게 상호적인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노라가 아버지의 시나리오를 거절한 건 아버지와 단절된 시간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인해 가벼워진 집을 체감했고, 사라진 소음 대신 침묵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낸 어린 시절의 인과인 것이다. 아버지가 노라에게 시나리오를 제안한 것도 그 시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부재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을 주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서먹한 관계를 풀어보고자 내미는 화해의 제스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감독이기에 가능한 제안이기도 하다. 딸의 재능을 아끼는 진심의 발로일 수도 있다. 실제로 구스타브는 노라의 재능을 알아봤다고 말한다. 하지만 노라는 믿지 않는다. 믿고 싶지 않다. 감독을 대하는 배우가 되기에는 아버지에 대한 골이 깊은 딸의 시간이 여전히 흐르고 거듭 쌓이는 중이다. 그것이 바로 노라가 지금 느끼는 ‘감정적 가치(Sentimental Value)’인 것이다.
노라의 거절 이후로 구스타브에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찾아온다. 우연히 영화제에서 만난 당대의 스타배우 레이첼(엘르 패닝)을 섭외하는 행운을 얻는다. 구스타브는 가족의 일원 중 그 누구도 살고 있지 않은 오슬로의 집에서 새로운 영화를 찍으려 한다. 자신이 맡은 역할이 그의 어머니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레이첼은 그녀에 대해 듣고 싶다고 말하고, 구스타브는 이렇게 답한다. “주인공은 우리 어머니가 아니에요.” 시간을 두고 이뤄진 대본 리딩 과정에서 레이첼은 여전히 궁금하다. 구스타브의 어머니는 촬영이 예정된 집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레이첼이 연기하는 인물 또한 그런 선택을 할 것으로 보인다. 배우 입장에서는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이를 두고 자살하는 어머니의 심경이란 무엇일까? 감독에게 묻는다. 구스타브는 다시 답한다. “그게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잖아요. 당신만의 답을 찾아야 해요.” 그러자 레이첼은 다시 묻는다. “감독님 어머니는 어떠셨어요?” 구스타브도 다시 답한다. “이건 우리 어머니 얘기가 아니에요.”
창작이란 대체로 창작자 본인의 직간접적인 경험을 고유한 시선과 관점을 바탕에 두고 해석하거나 반영한 결과로 다다르는 작업이다. <센티멘탈 밸류>에도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인생과 경험이 반영돼 있다. 일찍이 영화인 집안 출신이었던 요아킴 트리에는 두 딸을 키우는 아버지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물론 그는 구스타브도 아니고, 노라도, 아그네스도 아니지만 요아킴 트리에의 가문과 가족 내력은 <센티멘탈 밸류>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센티멘탈 밸류>는 요아킴 트리에의 가문과 가족을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영화일까? 그렇다면 영화가 삶을 반영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영화를 통해 인생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영화가 누군가의 인생을 반영한 결과물이기 때문일까?
“창작을 할 때에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은 알고, 반은 모른다. 그러다 그 끝에서 자신과 닮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신이 해온 일들이 거울처럼 비치게 된다.” 요아킴 트리에의 말은 영화 속 구스타브와 노라의 어떤 모습을 연상시킨다. 대본 리딩 중 북받쳐 오르는 격정이 여실한 레이첼을 보는 구스타브의 표정이 어딘가 생경하다. 자신도 모르는 것을 보았다는 듯한 표정이다. 이후 영화는 아그네스의 설득 끝에 비로소 구스타브의 시나리오를 보고 레이첼과 같은 대사를 리딩하는 노라의 모습을 보여준다. 노라의 리딩은 담담하지만 억누른 감정이 선연해서 더욱 격렬하다. 동일한 인물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입장의 대비가 선명하다. 레이첼은 구스타브의 어머니 입장이 되려 노력하나 노라는 그냥 자기 자신으로 이입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구스타브는 자신의 시나리오가 노라를 위한 것이라 말했다. 그가 레이첼에게 거듭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가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도 그런 의미다. 레이첼도 노라를 만난 뒤 알게 된다. 레이첼은 자신이 연기할 대상이 구스타브의 어머니가 아니라 노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금발을 노라처럼 어둡게 물들이고 인스타그램 계정을 염탐하기도 하지만 녹록지 않다. 구스타브는 자신의 어머니를 반영했지만 끝내 자신의 딸을 위한 이야기를 썼다. 레이첼은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할수록 명확한 한계를 체감한다. 재능이 모자란 탓이 아니라 되레 뛰어나서 아는 법이다. 자신의 연기로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그들 사이에 형성된 ‘감정적 가치’가 근본적으로 자신에게 부재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센티멘탈 밸류>는 한 가족의 현재를 조명하는 과정이란 그들이 함께 지나온 시간은 물론 구성원 개개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길 권하는 제안 같은 영화다. 일찍이 온전했던 가족의 형태에 균열이 생기는 과정을 겪었던 노라의 유년 시절은 노라의 기억을 넘어 지금의 아버지를 판단하게 만드는 기준선이 됐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재를 동일하게 경험한 노라와 아그네스 사이에서도 구스타브를 대하는 방식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하지만 두 사람이 받아들이는 시간이란 각자가 받아들인 기억을 통해 고유한 시간으로 구별된다. 감정의 깊이는 유사하나 반영의 방향은 상이하다. 그 모든 깊이와 반영은 가족이라는 시간을 공유하는 구성원들에게 서로를 의식하고 모종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감정적 가치로 융화된다.
구스타브에게도 가족에 관한 고유한 시간이 있다. 노라와 아그네스와 함께 축적된 지층 아래에는 두 딸이 부재했던 시절부터 형성된 시간이 있다. 구스타브에게도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구스타브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절 그의 어머니와 관련된 선대의 시간이 있었다. 이렇듯 가족의 시간이란 지금 이전부터 켜켜이 쌓인 층위로 유구하게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시간은 아들의 시간이 되고 언젠가 딸의 시간이 된다. 선대의 시간이란 후대에 이를수록 희미해지고 퇴색되겠지만 새로운 시간을 이루는 씨앗이 되어 그 가치는 계승되고 전승된다. 이처럼 우리가 아는 가족이란 지금의 시간을 지나는 구성원 각자와 모든 줄기의 역사로 연결된 지난 가족들의 시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 시절 아버지는 결핍을 준 존재였지만 그 시절 동생에게 언니는 의지가 되는 존재였다. 같은 사건 속에서도 가족의 시간을 달리 흘렀고, 다르게 쌓였다. 그렇게 흐른 시간이 언젠가 한 줄기로 만나 치유를 도모하게 되고, 그렇게 쌓인 시간이 언젠가 한데 섞여 화해로 아물기도 한다.
“예술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 가족 이야기를 더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내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센티멘탈 밸류>는 바로 그런 시도였다.” 요아킴 트리에의 말처럼, <센티멘탈 밸류>는 가족을 시간과 역사로 소화하고 승화하는 예술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단위를 인류학적인 시선으로 확장하는 동시에 영화라는 매체를 필터 삼아 가족이라는 인과를 탐구하는 인문학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구성원 개개인의 삶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내면에 잠재된 다원적인 심리가 모여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내면과 외연을 이루는 인과라는 것을 풍요롭고 사려 깊게 제시한다. 이를 통해 영화가 거리를 두고 삶을 바라보는 예술이 아니라 삶에 밀착하며 함께 호흡하는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마음껏 감각하고 사유하며 다시 살아가길 권한다. 그것이 바로 삶이고, 거기서 영화도 시작되는 법이므로.
(한국교직원공제회에서 발간하는 'The-K 매거진' 2026년 4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