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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Apr 04. 2018

<더 포스트>그들은 왜 썼는가

<더 포스트>는 선택한 자들에게 허락된 자유에 관한 영화다.

1971년 6월 13일, <뉴욕타임스>는 정부의 1급 기밀문서 일부를 1면에 게재했다. 1945년부터 1968 년까지 무려 23년간 트루먼, 아이젠하워, 존 F. 케네 디, 존슨에 이르는 무려 네 명의 미국 대통령이 대외적으로는 전쟁 제한과 억제에 노력했다는 평화적인 제스처를 취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차근차근 베트남 전쟁을 준비해나가고 있었다는 것이 기록된 이 보고서, 이른바 ‘펜타곤 페이퍼’는 당시 미국 사회의 불만을 폭발시키고도 남을 만한 뇌관이었다. 이 문서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이유로 잘 알려진 통킹만 사건, 즉 북베트남군이 미군을 선제공격했다는 것 자체가 완전한 조작이었음을 명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베트남 전쟁 자체가 조작된 전쟁이며 미국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대사기극을 벌이고 있음을 명시하는 정부의 기밀문서였던 것이다.  


당시 백악관 주인이었던 닉슨 대통령과 그의 행정부는 이에 강력하게 대응했다. 미국의 국방 안보에 심각한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뉴욕타임스>에 보도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후속 보도는 진행되지 못했다. 이는 미국 정부가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건 초유의 사태이기도 했다. 어쨌든 언론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정부의 의도 가 제대로 먹히는 듯했다. 하지만 6월 17일 자 <워싱 턴포스트> 1면에 펜타곤 페이퍼에 관한 새로운 보도가 실렸다. 무려 4000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입수한 특종이었다. 이로 인해 <워싱턴포스트> 역시 닉슨 행정부의 소송 대상이 됐다. 그러나 끝내 법원은 닉슨 행정부가 아닌, 언론의 손을 들어줬다. 이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에 대해 확실한 권위를 세워준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 



<워싱턴포스트>가 펜타곤 페이퍼를 보도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더 포스트>는 시대극이면서 전기물이기도 하다.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은 <워싱턴포스트> 발행인이다. 그녀는 선친이 운영하던 신문사를 물려받은 남편이 죽음으로써 신문사의 경영자가 됐다. 벤 브래들리(톰 행크스)는 <워 싱턴포스트> 편집장이다. 그는 과거 존 F. 케네디와 막역한 관계로 지낼 정도로 유력한 기자였다. 두 사람에게 <워싱턴포스트>는 지켜내야만 하는 무엇이었다. 그레이엄에게 <워싱턴포스트>는 선친과 남편의 유지에 따라 잘 지켜내야만 하는 유산이었다. 브래들리에게 <워싱턴포스트>는 언론인으로서 해내야 할 사명을 지켜내야만 하는 전선이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워싱턴포스트>는 소중한 것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자의 입장에서 <워싱턴포스트>를 지켜내기 위해 서로에게 각을 세우기도 하고 때론 합을 맞추기도 한다.  


그레이엄과 브래들리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레이엄은 증권거래소에 상장하기 위해 투자자를 유치하고, 장기적으로 회사의 이익을 강화하고자 고민한다. 브래들리는 진실을 보도하는 언론의 사명감을 중시하면서도 경쟁 신문사보다 한발 빠르게 특종을 보도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흥미로운 건 두 사람의 행동이 각기 다른 가치를 창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워싱턴포스트>라는 언론사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한 행위로 수렴하는 것이란 사실이다.  


덕분에 그들에게 펜타곤 페이퍼는 신문사의 존속을 박살내는 폭탄일 수도 있었고, 신문의 기조를 드높일 수 있는 훈장일 수도 있었다. 선택해야 했다.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정부와의 송사에 휘말린 <뉴욕타임스>에 관한 보도를 본 <워싱턴포스트>의 이사진은 이렇게 말한다. “저 난리통에 끼지 않아 다행이군.” 그러자 옆에 있던 브래들리가 이렇게 말한다. “저기 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는데.” 이 순간 신문사를 비롯한 언론사가 필연적으로 품을 수밖에 없는 역설을 대변한다. 신문사는 필연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영리 회사다. 동시에 여느 회사들과 달리 언론사로서의 사명감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론적으로는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가치를 높이는 행위로 여겨지는 한편, 사회적 불의를 겨냥함으로써 권력층과 사회 지도층의 압력을 받고 경영적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고민에 직면한다. 펜타곤 페이퍼의 보도를 두고 사측 입장과 편집부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은 각자의 논리 안에서 합리적이고 서로의 논리 안에서는 모순적이다.  



<더 포스트>는 그 누군가의 손을 들지 않는다. 정의를 위해 보도를 해야 한다는 입장도, 회사를 살리기 위해 눈을 감아야 한다는 입장도, 동의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결국 어떻게 선택했는가라는, 그 결정적 순간의 용기에 주목하게 만든다. 영화는 그레이엄이 펜타곤 페이퍼의 보도를 결정하고 승인하게 된 과정을 대단히 소소하고 충동적으로 그린다. 그럼으로써 그 소소하고 충동적인 결정이 마주하게 된 이후의 현실들을 나열하고 묘사한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워싱턴포스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목도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어쩌면 <더 포스트>는 익히 잘 알려진 펜타곤 페이퍼를 선택한 이후의 <워싱턴포스트>가 어떻게 거듭날 수 있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만든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용기를 낸 자만이 성취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해 설득한다. 


무엇보다도 스티븐 스필버그의 연출적 혜안과 윤리적 관점이 이루는 균형 감각은 <더 포스트>를 담담하면서도 종종 들끓는 심정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치열한 취재와 기사 작성 끝에 신문을 제작하는 체계적인 과정을 유려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후반부는 이 영화가 지닌 품위를 대변한다. 그리고 메릴 스트립과 톰 행크스를 필두로 한 다양한 배우들의 얼굴은 <더 포스트>를 신뢰할 수 있는 단단한 약속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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