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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Apr 04. 2018

<쓰리 빌보드>인간은 무엇으로 답하는가

<쓰리 빌보드>는 인간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강력한 물음이다.

“그들은 격노하고 있었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으며, 비극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경찰을 부르고 있었다.” <쓰리 빌보드>는 영화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감독 마틴 맥도나가 20년 전 미국 남서부에서 우연히 본 두 개의 광고판으로부터 떠올린 이야기다. 그 광고판을 보고 곧바로 어떤 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광고판에서 목격한 분노와 고통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러다 강력한 여성 캐릭터를 앞세운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마틴 맥도나는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던 그 광고판을 다시 떠올렸고, 여성 캐릭터를 어머니로 설정한 뒤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었고, 프랜시스 맥도먼드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완성해나갔다. 그렇게 완성된 이야기가 바로 <쓰리 빌보드>다.



미주리의 소도시 에빙 외곽에 자리한 드링크워터 도로 옆으로 세 개의 낡은 광고판이 나란히 서 있다. 나름의 쓸모를 자랑해본 것이 언제였는지 짐작조차 안 되는 그 광고판 옆 도로에 차를 멈춰 세운 채 한참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여자는 차를 몰고 어딘가로 이동한다. 여자가 찾아간 곳은 한 사무실, 그녀가 응시하던 광고판의 운영권을 소유한 작은 광고 회사다. 그녀는 회사에서 방치해둔 낡은 광고판 세 개를 1년간 임대하겠다며 계약금 5000달러와 광고판에 명시할 카피가 적힌 종이를 전달한다. 그리고 시종일관 의아한 표정으로 여자를 응대하던 광고 회사의 남자는 종이 속 문구를 읽은 뒤 고개를 들어 말한다. “당신이 안젤라 헤이스의 엄마군요.”


안젤라 헤이스는 7개월 전 살해당한 소녀다. 소녀는 드링크워터 도로 옆 낡은 광고판 아래에서 새까맣게 불에 탄 주검으로 발견됐다. 소녀를 강간하고 살해해 시체를 불에 태운 것으로 추정되는 범인의 행방은 알 길이 없다. 진전 없는 사건이 세상에서 잊힐 때쯤 홀로 분노를 삭이던 안젤라 헤이스의 엄마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 분)는 딸의 주검 위로 우두커니 서 있었을 낡은 광고판을 통해 강력한 질문을 던진다. “죽어가면서 강간당했다.” “그런데 아직 범인을 잡지 못했다고?” “어째서 그렇지, 월러비 서장?” 간밤에 채워진 세 광고판의 문구는 다음 날 경찰서와 마을을 시끄럽게 만든다.


<쓰리 빌보드>는 한 면을 맞추고 나면 다른 한 면이 흐트러지는 정육면체 큐브의 모순적인 구조, 그리고 하나의 패가 쓰러지면서 다른 패들을 연이어 쓰러뜨리는 도미노의 즉각적인 상호 관계성을 떠올리게 만든다. 밀드레드는 에빙 경찰서 서장 월러비(우디 해럴슨 분)를 겨냥한 광고판을 세웠고 그 광고판은 월러비를 좋아하는 마을 사람들의 분노를 야기시킨다. 하지만 정작 월러비는 자신에게 밀드레드의 험담을 전하는 이들과 동조하거나 조력하지 않는다. 물론 밀드레드를 찾아가 회유해보거나 가볍게 으름장을 놓기도 하지만 안젤라 헤이스 사건 기록을 다시 한번 열어보는 건 결국 밀드레드에 의해 광고판에 소환된 월러비다. 반대로 월러비 서장을 존경하는 에빙 경찰서의 경관 딕슨(샘 록웰 분)은 흑인을 구금해 가혹 행위를 저질렀다고 공공연하게 알려진 차별주의자다. 그는 월러비에게 모욕을 줬다고 생각하는 밀드레드에게 적의를 품고 그녀를 주시하지만 손쉽게 꺾이지 않는 그녀의 강한 기질을 압도하지 못한 채 그녀의 동태를 살필 뿐이다.



여기까지의 내용만 놓고 보자면 <쓰리 빌보드>는 딸을 살해한 진범을 찾길 원하는 어머니의 절박함과 강인함, 그리고 진범을 찾지 못하는 경찰들의 무능함이 대립각을 세우는 영화라 예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쓰리 빌보드>는 그런 대치 상태를 신속하게 무너뜨림으로써 관객이 예상했던 이야기의 노선에서 빠르게 이탈한다. 안정적으로 구축된 듯한 중심 캐릭터의 대오를 무너뜨림으로써 이야기를 예측할 수 없는 궤도에 올리고 작품이 제시하던 물음표를 두텁게 강화시킨다. 병세가 심각해 항암 치료를 받던 월러비 서장이 가족과 평화로운 하루를 보낸 뒤 자신이 돌보던 마구간의 말들 곁에서 자살을 하는 순간부터 <쓰리 빌보드>는 예측할 수 없는 흐름으로 격류를 타기 시작한다.


월러비의 자살은 딕슨과 밀드레드의 삶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격발한다. 월러비 서장의 죽음을 전해 들은 딕슨은 그 상실감을 증오와 혐오의 에너지로 방출해 광고를 집행한 광고사 직원에게 끔찍한 폭력을 휘두르고 창문 밖으로 던져버린다. 그리고 그는 새롭게 전출 온 흑인 경찰서장을 깔보다 자신의 편이라 믿었던 경찰 조직에서 손쉽게 축출된다. 뉴스를 통해 월러비의 부고를 전해 듣게 된 밀드레드는 아들을 학교에 바래다주고는 자신의 차를 향해 계란을 던지는 학생들을 만나고, 그녀가 근무하는 가게에서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폭력적인 위협을 당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럼으로써 딕슨과 밀드레드 모두 죽은 월러비의 영향력 아래 놓인 존재로 거듭난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각 월러비가 보낸 편지를 받게 된다.


월러비는 밀드레드와 딕슨에게 유언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진심을 전한다. 밀드레드에게는 딸의 진범을 찾지 못한 미안함과 광고판을 통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자신을 겨냥한 문제의 광고판에 한 달 계약금을 지불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딕슨에게도 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애정 어린 충고와 약자를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 편에 설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설득한다. 역시나 아이러니하게도 밀드레드와 딕슨은 월러비의 편지를 받고 난 이후 각각 불로 인한 피해를 입게 된다. 누군가가 불을 지른 탓에 엉망이 된 광고판을 보고 격분한 밀드레드는 화염병을 던져 경찰서를 불태우는데, 그로 인해 하필 그 시각에 월러비의 편지를 수령하기 위해 경찰서에 왔던 딕슨이 큰 화상을 입게 된다. 역시나 아이러니하지만 밀드레드는 경찰서 맞은편 건물 2층의 광고 회사 창문을 통해 화염병을 내던지는데 그곳은 딕슨이 월러비의 죽음 이후 찾아가 광고 회사 직원을 내던져버리기 위해 창문을 깼던 곳이다.



그러니까 이는 끊임없이 돌고 도는 업보의 순환과도 같은 이야기이자 타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돌림노래처럼 이어 부르던 이들의 소음이 뒤엉켜 하나의 화음으로 어울리게 됐다는 기묘한 아이러니 그 자체다. 영화 초반부부터 대립적 관계를 형성하며 강력한 갈선을 구축하던 밀드레드와 딕슨은 영화 말미에 다다르면 공통의 적으로 규정된 존재를 처단하기 위해 나란히 앉아 먼 길을 떠나는 관계로 거듭나 있다. <쓰리 빌보드>는 인간이라는 것이 수학의 이진법처럼 단순하게 선과 악으로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면서도, 복잡다단한 한계와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모순이 되레 세계의 절망과 희망을 가늠하게 만드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역설 그 자체로 관객을 휘몰아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것들 사이를 잇는 반복과 강조를 통해 인물의 심리를 추측하게 만드는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를테면 광고판 아래 잔디의 그을린 자국은 밀드레드의 딸이 그곳에서 불에 타 죽었음을 예감하게 만드는데, 방화범에 의해 광고판이 불에 탄다는 것은 밀드레드 입장에서 한 번 더 딸을 죽이는 행위처럼 이해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녀가 광고판의 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건 바로 그런 불명예스러운 두 번째 죽음을 막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밀드레드가 낡은 광고판에 새로운 광고를 주문하는 것도 죽은 딸이 발견된 곳에 서 있는 쇠락한 광고판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심지어 그녀는 광고판 주변부에 꽃을 심고 주변 풍경을 가꾸고자 노력한다.


이 영화는 스스로를 혐오와 증오의 구렁텅이로 내몬 이들의 각축전에 주목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인간의 선의를 무심하게 조명하고 이를 통해 모종의 희망을 예감하게 만든다. 창가에 뒤집혀져 바둥거리는 벌레를 잡아 뒤집어주는 밀드레드의 이타심과, 딕슨에게 구타당해 병원에 입원한 광고 회사 직원이, 심각한 화상을 입고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입원한 딕슨의 정체를 뒤늦게 알고 격분하지만 끝내 빨대를 꽂은 오렌지주스를 건네는 배려심은 거대한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증오와 혐오로 점철된 영화 속 풍경 안에서 소소한 대비를 이루며 역설적인 교훈을 남긴다. 결국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이끄는 건 세상의 곳곳에 자리한 저런 소소한 선의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걸출한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현실감 넘치는 캐릭터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밀드레드 역을 맡은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모래알갱이가 씹힐 듯한 퍼석퍼석한 표정으로 힘 있는 여성상을 제안하는 동시에 인물의 내면에 억제된 슬픔이 분출되는 순간 잠시 드러나고야 마는 연약함까지 잘 끌어안으며 호연을 펼친다. 샘 록웰은 혐오스럽고 거만한 차별주의자 행세를 함으로써 마음 한편에 숨겨둔 연약한 심성이 미약하게 드러나는 인물을 능수능란하게 연기해낸다.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타악기의 박력처럼 다가온다면 샘 록웰은 건반 악기의 유연함과 풍요로움으로, 우디 해럴슨은 깊고 선연한 관악기의 울림처럼 다가온다.



마틴 맥도나의 준수한 각본과 탁월하게 조망하고 첨예하게 좁혀나가는 탁월한 연출력은 <쓰리 빌보드>의 캐릭터들을 제각각 물음표처럼 세워 넣는다. 강한 힘과 독한 마음이 으르렁거리는 세상에서 자신의 한계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믿어야 할 것은 결국 일말의 양심과 진심 어린 배려일 수밖에 없다. “복수는 더 큰 복수를 낳을 뿐”이라는 뻔한 잠언이 여전히 통용되는 것도 어쩌면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런 한계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매일같이 각자의 한계를 마주 보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쓰리 빌보드>는 바로 그런 인간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강력한 물음 그 자체다. 답은 결국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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