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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ul 02. 2018

<개들의 섬> 말하지 않아도 알아

농담처럼 마음을 울리는 영화, 웨스 앤더슨의 <개들의 섬>.

올해 베를린 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공개된 웨스 앤더슨의 두 번째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개들의 섬>은 그의 첫 번째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판타스틱 Mr. 폭스>와 마찬가지로 동물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지난 작품과 달리 <개들의 섬>은 원작이 없는, 웨스 앤더슨의 오리지널 각본작이기도 하다. 



<개들의 섬>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20년 후’라는 미래와 일본 메가사키라는 가상의 도시다. 메가사키 시장 고바야시는 고양이를 사랑하고 개를 증오하는 가문의 혈통이다. 그는 메가사키시에 개 독감과 개 열병이 번진다는 이유로 모든 개를 도시 내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한다. 추방된 개들은 쓰레기를 폐기하는 외딴섬에 버려진다. 섬에 버려진 개들은 매일같이 쓰레기를 뒤져 찾아낸 음식물 쓰레기로 연명한다. 그리고 유년 시절 열차 사고로 부모를 잃고 먼 삼촌뻘인 고바야시 시장에게 입양된 아타리가 자신의 충직한 경호견 스파츠를 찾고자 경비행기를 타고 ‘개들의 섬’으로 날아온다. 우여곡절 끝에 그 섬에서 아타리가 만난 건 스파츠가 아닌 다섯 마리의 개, 치프, 렉스, 보스, 킹, 듀크다. 아타리는 그들과 함께 스파츠를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이 영화에서는 두 가지 언어가 사용된다. 개들은 영어로 말하고, 사람들은 일본어로 말한다. 개들의 언어는 번역된 자막을 제공하지만 사람의 언어는 자막이 없다. 일본어에 능숙한 관객이 아니라면 영화 속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길이 없다. 흥미로운 역설이다. 개의 말은 알아듣고 사람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아이러니. <개들의 섬>은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을 개로 만드는 영화인 것이다. 어감이 이상하게 들린다 해도 정말 그렇다. 우리가 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의 언어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개의 관점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사람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어나 상황의 뉘앙스를 간파해 사람의 명령에 따르는 개처럼 관객 역시 정확한 언어의 의미를 파악할 순 없지만 정황을 통해 영화의 흐름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 교묘한 트릭으로 은근한 감각적 체험을 유도하는 셈이다. 

웨스 앤더슨 특유의 장기는 애니메이션에서도 탁월한 재능으로 다가온다. 미장센으로 꽉 채워진 프레임은 언제나 안정적인 구도 위에 놓여 있고, 수직과 수평으로 이동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뚜렷하게 대칭되고 명확하게 균형을 잡는 쇼트와 강박적으로 맞붙는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서 컷과 컷, 숏과 숏, 신과 신의 이동이 스펙터클하게 느껴지는 건 바로 이런 포화 상태에 가까운 미장센의 정보량이 주는 쾌감에 있다. 미니어처 세트로 제작한 미장센과 그 풍경 속을 활보하는 인형들은 웨스 앤더슨을 위해 최적화된 무대이자 배우들처럼 보인다. 특히 <7인의 사무라이>와 같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풍경을 재해석한 웨스 앤더슨식 풍경은 영화광들의 열광을 부를 만하다.

무엇보다도 <개들의 섬>의 탁월함은 영화 속 개들을 인간의 관점으로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생물학적 개의 특성이 반영된 부분은 있지만 <개들의 섬>에서의 개들은 개별적 성격을 가진 주체적 존재로 보인다. 개라는 단일종으로 묶이지 않고 각자의 이름을 지닌 존재로 호명되고 언급된다. 덕분에 관객들은 개들을 하나의 캐릭터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세계관 속에서 끊임없이 온기를 느끼게 되는 것도 어쩌면 그래서다. 사람과 개가 서로 일대일의 관계로 교감하며 살아갔던 순간들이 담담하면서도 명징하게 제시되고, 이는 관객들의 추억과 감정을 형형하게 환기시킨다. 거창한 농담으로 진짜 마음을 건드린다. 정말 대단한 재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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