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놀음
.
.
.
.
.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어떤 친구가 충청도 보은의 속리산에는 신선(神仙)이 있다고 우겨대었다. 이 소리를 들은 임형수가 말했다.
“그런 실없는 소리는 하지 말게.”
그런데 그 친구는 반드시 있다고 굳이 우겨서 양보함이 없었다. 그러다가 신선이 있다고 우기고 주장한 친구가 어찌어찌해서 마침 충청감사가 되어 부임하게 되었다. 가는 길에 명산(名山) 구경차로 속리산에 들리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달은 밝아 교교하데 풍광(風光)이 그럴 듯한 데를 당도하니까, 멀리서 신비스럽기 짝이 없는 퉁소 소리가 처량하게 났다. 감사가 한참 귀를 기울이고 듣다가,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
“옳다, 이제야 신선을 만났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홀로 신선의 소리를 따라 산속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가까이 가니까 그 소리가 홀연히 뚝 그치고 또 저 멀리서 났다. 감사는 그래도 그 소리에 홀려서 감질은 나지만 야금야금 쫓아가고 또 쫓아가고 해서, 결국은 자지대(紫芝臺)란 곳에 다다르니, 과연 수염이 허옇게 난 신선을 만나게 되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니, 신선은 반갑게 맞으면서 말했다.
“자네 올 줄 알았네.”
이렇게 말하면서, 선주(仙酒)와 녹포(鹿铺) 안주를 대접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 헤어질 때, 시(詩) 한수를 지어주었다.
감사는 그 후 서울에 돌아와 그 전 친구들을 한 자리에 만나게 되었다. 이때에 임형수도 끼어 있었다. 임형수가 그 친구에게 말했다.
“자네, 속리산에 들렀다더니 그래 신선을 만났나?”
“아무렴 만났지. 선주와 녹포 안주까지 대접 받았네.”
“그래 술맛이 좋든가?”
“어느 선주라니, 그야 이를 데 있겠나.”
“시를 지어 주지 않든가?”
“그래. 그건 자네가 어떻게 아나?”
“알다마다.
紫芝臺美少年(자지대미소년)이요
塵世間奇男子(진세간기남자),
一壺酒相送罷(일호주상송파)하니
俗離山雲萬里(속리산운만리)라
지조 잇는 곳의 미소년과
티끌세상의 기남자로다.
주거니받거니 한 잔 술
속리산 구름은 만리를 뒤덮네……
이렇지 않든가?”
“자네가 그 글을 어찌 알았나?”
감사는 놀라서 껑충 뛸 수밖에 없었다. 임형수가 태연스럽게 말했다.
“이 사람, 그 신선이 바로 나였네. 말 오줌에 개고기포를 먹고 와서 왜 야단인가. 자네 골탕 좀 먹이 자고 내가 꾸민 장난일세.”
.
.
.
임형수 林亨秀(1504 ∼ 1547)
명종 때 사람으로 자는 사수요. 호는 금호다. 을미에 등과(登科)하여 수찬의 벼슬을 거쳐 회령판관, 제주목사(濟州牧使) 등의 외임(外任)을 지낸 뒤 나주 본가에 돌아와서 누웠다가 을사사화에 화를 입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錦湖). 전라남도 나주 출생. 아버지는 북병사 준(畯)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현감 석(錫)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격이 강직하였다.
1531년(중종 26)에 진사가 되고, 1535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기사관·사서 등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설서·수찬·회령판관·전한 등을 거쳐 부제학에 승진되었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가 일어나면서 제주목사로 쫓겨났다가 파면되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良才驛)벽서사건이 일어나자, 소윤 윤원형(尹元衡)에게 대윤 윤임(尹任)의 일파로 몰려 절도안치(絶島安置)된 뒤 곧 사사되었다. 생전에 호당(湖堂)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친교를 맺고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
문장에도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뒤에 신원되었고, 1702년(숙종 28) 나주의 송재서원(松齋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금호유고가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