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감옥으로부터의 편지 7
어둠 속에서
- 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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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늦은 저녁에
변두리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마석행(行) 버스를 기다립니다.
그 때 누군가를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를 기억해 낼 수 없었습니다.
한참 만에 그를 기억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 맞아”
중학교 2학년 때의 미술 시간이었습니다.
미술 선생님은 주제를 정해 주지 않고
자기 맘대로 자기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얘들은 한참 동안이나
무얼 그릴 것인가에 대하여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유독 한 녀석,
그 녀석은 생각도 없이 스케치도 없이 물감을 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도화지에 짧은 시간 그는 광기에 젖어 미친 듯이
물감을 칠했습니다.
그것은 도무지 말로 설명하기 힘든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내 붓이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어떤 덧칠은 하지 않았습니다.
미술 선생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 녀석의 자리로 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미술 선생님의 얼굴 표정은
일그러졌습니다.
순간 미술 선생님의 손이 그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온힘을 다한 그런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어떤 참기 힘든 분노를
겨우 참아 내고 있는
그런 표정이었습니다.
“무얼 그린 거지”
선생님은 격노한 목소리를 억지로 숨기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하려 했지만
억양은 높았습니다.
일순간 아이들은 무엇을 그릴까 하던 생각을 멈추고
모두 그 녀석이 앉아 있는 자리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때 선생님의 그런 표정을 처음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분한 듯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그 녀석은 원래
약간의 반항기와 문제아 기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태초의 시간을 그렸습니다.”
그 녀석은 어떤 동요나 두려움 없이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그 녀석의 눈빛에는 분명
그 어떤 광기가 서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태초의 시간이라,
이것이 어째서 태초의 시간인지 설명해 보아라.”
그 녀석이 말을 그럴듯하게 했는지
선생님은 조금 전의
그 격한 분노에서 벗어난 것 같았습니다.
“설명은 할 수 없어요. 다만.”
그 녀석은 말을 하려다가 그만 중단했습니다.
“다만이라니…….”
“말씀 드릴 수 없어요.”
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어떤 그림을 가지고
선생님이 그러시는 가에 대해서,
그 녀석의 자리가 내 앞이래서 내가 일어서면
그 녀석의 그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난 그 녀석의 그림을 보다
입에서 알 수 없는 신음이 새어나오면서
힘없이 내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림은 어둠, 어둠뿐입니다.
온통 시커먼 물감으로 도화지 전면을
불규칙하게 채우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수업 시간이니 수업 다 끝나고
미술실로 와라. 그리고 너의 스케치북은 내가 잠시
보관한다. 이따가 찾아가라.”
미술 선생님은 그 얘의 스케치북을
교단에 갖다 놓았습니다.
나는 그 날 미술 시간에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습니다.
그 녀석의 그림은 내게 너무도 충격이었습니다.
단순히 그 어떤 충격이 아니라,
그 것은 내 마음을 그대로 그려낸 것이었습니다.
다만 난 용기가 없어,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몰라,
그려낼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질긴 어둠들, 나는 어둠에 익숙했습니다.
밝음은 오히려 나에게 어색함을 주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지하의 방에서 살았습니다.
전등을 밤낮으로 켜 놓을 수 없어
불을 끌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면 사방 천지의 세상은 어둠뿐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세계를
정직하게 채색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까?
만약 탄광촌에서 막 이사 온 아이에게
자기가 살던 고향의 모습을 그리라고 할 때
그는 시커먼 집들과 시커먼 사람들과
시커먼 강을 그리겠지요.
그러나 탄광촌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그 그림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그림을 그린
그 아이를 야단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 아이는 거짓 없이 자기가 살던 세계를 그렸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야단친다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중학교 때 미술 시간 그 아이는
그 아이의 세계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난 그 그림에 매료되었습니다.
그 그림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아이의 환경과 그 아이의 정신세계를…
그 후 그 아이는 몇 개월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그 후 연락은 두절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시간이 흐른 오늘,
비가 내려 초겨울로 접어드는
11월말에 가로등이 없어
침침한 서울의 변두리에서
그 녀석을 봅니다.
그 녀석이 웃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쓸쓸히 웃습니다.
그리고 표정은 너무나 슬픕니다.
주머니에 단지 토큰 하나 있는데
시간이 늦어 안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허름한 행인처럼
그는 이 변두리에서 웃고 있으면서
또 슬프고 너무나 절박합니다.
어디 가서 소주라도 한잔하자고 해야지
나는 그 녀석에게로 다가갑니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은
아득한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