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창 시절 원래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첫 문장부터 재수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수학 경시반에서 활동하며 여러 경시대회에서 수상도 했다. 중학교 때는 전교 1등도 해봤다.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며 3년 통합 최종 성적은 전교 4등이었다. 수학, 과학 경시대회에도 계속 입상했다. 완전 이과 머리였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과학고와 외고를 놓고 고민했다. 둘 다 갈 수 있는 성적은 되었다. 학원의 특목고반 친구들 중에 괴물 같은 놈들이 모두 과고를 선택했다. 쫄았다. 나는 그들을 피해 외고를 선택했다. 실패였다. 외고에 가서 보니 과목들이 나랑 너무 안 맞았다. 머리는 이과인데 외고 과목들은 문과에 특화되어 있었다. 전공 언어 하나를 가지고 독해, 청해, 회화 등으로 나눠서 가르치고 시험을 봤다. 문과 위주의 과목들이 70~80% 정도 되었다.
공부해야 하는 과목들도 나랑 잘 맞지 않았는데 여학생들과 경쟁을 해야 했다. 여학생들은 내신에서 정말 강하다. 경쟁 자체가 되지 않았다. 남학생들 중에서는 계속 2등을 유지했는데 여학생까지 합친 통합 성적은 중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외고는 과별로 성적을 매기기 때문에 등수가 1등만 떨어져도 내신에서 엄청난 타격을 입는다. 결국 대학 진학할 때 내신이 발목을 잡았다. 내가 외고에 입학하기 직전에 비교내신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특목고 비교내신제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내신에서 불리한 특목고 학생들을 위해 만든 제도로 대학 입학 시 약간의 가점을 받을 수 있는 제도였다.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비교내신제가 폐지되었다. 특목고 학생들한테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내신도 불리할 수밖에 없는데 하필 내가 봤던 수능 시험은 역대급으로 쉽게 출제되었다. 정말 물수능이었다. 대학 수학능력시험이 도입된 이래 가장 만점자가 많이 나왔던 수능 시험이었다. 주변 친구들도 모의고사보다 대부분 40~50점 정도 점수가 올라갔다. 나는 항상 만점을 받던 수학에서 1문제 틀렸다. 그것도 앞부분에 굉장히 쉬운 문제에서 틀렸다.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실수를 하필 수능날 했다. 항상 수학을 40~50점 받던 친구는 만점을 받았다. 그만큼 문제가 쉬웠던 것이다. 치명적이었다.
출처 : JTBC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외의 대학은 관심도 없었다. 당연히 갈 거라고 믿었다. 물론 내 수능 점수도 그렇게 낮지는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친구들의 점수 증가폭에 비해 적게 올랐다. 여기서 내신까지 발목을 잡았다. 내 수능 점수였고 일반 고등학교였다면 SKY 대학은 무난하게 갔을 것이다. 근데 내신 성적이 중간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약간 불안했다.
SKY 대학 중하위권 과에는 당연히 갈 수 있었지만 나는 경영, 경제 쪽으로 가고 싶었다. 담임 선생님은 원서를 써주려고 하시지 않았다. 선생님은 안정 지원하라고 하셨다. 예전에는 대학원서 접수를 본인이 인터넷으로 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수기로 작성해주시면 우편으로 접수하거나 대학 원서접수창구에 방문해서 직접 접수해야 했다. 경쟁률도 실시간으로 공개되지도 않았다.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야 했다.
결국 SKY 대학은 지원조차 하지 못했다. 하향 지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보다 낮은 점수의 다른 반 친구는 SKY 중상위권과에 합격했다. 정말 많이 아쉬웠다. 아무튼 나는 특목고 비교내신제 폐지, 역대급 물수능, 담임 선생님의 하향 지원 권유 등의 삼단 콤보를 맞으며 생각지도 않았던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내 기준에서는 대학 입시 실패였다. 부모님을 비롯한 친척들도 모두 실망했다. 대학명은 공개하지 않으려고 한다. 진짜 쌍욕 먹을 수도 있다. 아무튼 SKY는 아니다. 그렇게 나는 SKY 캐슬 입성에 실패했다.
대학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내신이 좋지 않아 재수를 선택할 수도 없었다. 특목고 가점이 없는 상태에서 또 수능을 봐도 불리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학교 1학년을 다니면서 수능을 한 번 더 봤다. 그해 수능은 전년도 물수능으로 교육부가 엄청 욕을 먹어서 그런지 역대급 불수능으로 나왔다. 너무 어려워서 1교시 언어영역이 끝나고 짐을 싸서 나가는 수험생도 많았다. 그해 수능 점수는 다들 엄청나게 하락했다. 50~100점씩 떨어진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그냥 이 대학에 다니라는 하늘의 계시인가 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학 입학 원서조차 쓰지 않았다. 이번에는 수능이 너무 어려워서 그런지 다들 하향지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대 법대도 미달이었다. 내 점수는 이번에는 그렇게 낮은 점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미친 척 하고 서울대 법대에 원서만 냈으면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예 원서를 넣지 않았는데 다들 하향지원했다니 어이가 없었다. 운명의 장난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원래 다니던 대학을 그냥 다니기로 했다. 2번 시도한 나의 대학 입시는 그렇게 실패했다. 그래도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말을 믿었다.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을 믿고 싶었다. 인생 역전의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번째 수능마저 실패로 끝난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부모님의 권유로 나는 고시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