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살아있으면 잘 살고 있는거지

by Bwriter

이 쓰라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여자의 이 쓰라림을 말이다. 생각이 많은 사람. 마음이 복잡한 사람. 그렇지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사람. 책으로만 본 공지영 작가는 나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자전소설을 주로 이루다보니 공지영 작가의 생각을 조금 더 들여다 볼 수 있었고 같이 생각할 수 있었고 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생각이 많고, 마음이 복잡하고... 그러나 겉으로는 단순하다는 듯이 보이려는 그녀의 모습이 묵직하고 쓰라리다.


작년 겨울에 모교에서 선배와의 대화라는 것을 하는데 와서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냐고 고등학교때 담임선생님이 연락을 주셨다. 그때 나는 "제가 뭔가 잘 살고 있어야 뭐라고 말을 하죠."라고 했는데, 그때 선생님은 "살아있으면 잘 살고 있는거지."라고 하셨다. 그 한 말씀에 "네, 갈게요." 했다. 그 말이 나에게 무슨 결정권을 줬을까? 어떤 용기를 준걸까? 그 순간에 받은 느낌은 "너가 뭐가 어때서?"라는 말 보다 컸고, "너 잘 하고 있잖아."라는 말보다 씩씩했다. 아니, 위대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있으면 잘 살고 있는거다. 책에서 작가는 죽지 않았으면 됐어, 죽지 않았으면 꽃 피울 수 있어,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라고 했다. 줄기 꺾인 가지를 보고 한 말이지만, 이 말이 가지만을 보고 하는 말이었을까?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고,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우리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씀처럼 말이다.


그때 모교에서 했던 이야기는 책에 대한 이야기였다. 책을 읽으라고. 책 읽을 시간을 굳이 만들려 하지말고 틈틈이 읽어야 하는게 책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 안 바쁜 사람이 어디있겠냐고. 지금이 책 읽기를 시작하기에 좋은 시점이라고. 그리고 읽기만 하지 말고 읽고 난 후에는 꼭 생각할 시간을 갖으라고 했다. 그걸 글로 적어보라고. 읽고 흘리는게 아니라 내것으로 만들라고. 그 시간에 답이라는 것이 나오니깐.


선생님의 저 말씀, "살아있으면 잘 살고 있는거지."에 대한 생각은 제각각일텐데, 생각하는 힘이 없다면 그냥 웃어 넘길 말이, 나는 곰곰히 생각하게 되고, 앞으로의 내 삶의 기준이 되는 말이 되었다. 이런게 책을 읽는데서 나오는 힘이 아닐까.


작가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끔 내게 삶이, 책이, 사람이 기적만 같다 라고. 나에게도 이 책은 기적같다. 쓰라릴만큼 나를 드려다볼 수 있었다. 그녀의 쓰라림은 나에게 동정심과 안쓰러움을 안겨줬다.


"죽고 싶었지만 신기하게도 진짜로 죽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이상하게 운명에 대한 대결 같은 거. 그것은 맞서는 대결이 아니라 한번 껴안아보려는 그런 대결이었는데, 말하자면 풍랑을 당한 배가 그 풍랑을 이기고 가는 유일한 방법은 그 풍랑을 타고 넘어가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대결...... 내게 이것을 가르쳐준 것은 글이었는데 글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서 넘치다가 엎질러져 나오는 것이고 그렇게 엎질러져 나온 글들은 상처처럼 빨간 속살에서 터져나온 석류 알처럼 우리를 기르고 구원하니까요."


이 말이 나에게는 응원이 되었다. 있는 그대로 껴안아보리라. 아프면 아픈대로, 좋으면 좋은대로. 아픔은 원망하지 않고 흘려보내려고 노력하고, 좋음은 껴안고 흐려질때까지 즐기려고 할 것이다. 지금 보다 더 많이. 왜냐면, 나는 이제 상처를 그대로 두고 싶지 않으니깐.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제는 용서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 원망과 받은대로 해주겠다는 마음보다는 용서가 낫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제 시작되어진 마음이라 아직은 "그들을 용서했어."라고는 말 못한다. 다만 "용서하려고 노력해. 용서하게 해달라고 기도해."라고 바뀌었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 삶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며 우리 삶의 비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끝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사는 것이라고. 이 말을 기억하려고. 당연히 나도 누군가에는 상처가 되는 사람이고 용서가 필요한 사람일테니깐.


이 책은 나와 당신의 삶의 쓰라림을 쓰라림으로 위로 받을 수 있는 책이라고 하고 싶다.




살자리인 줄 알고 도망친 곳이 죽을 자리였고, 죽겠다고 도망친 곳이 때로는 살자리였다. 그러나 나는 오직 그 사실을 알 뿐, 그것의 법칙은 알지 못했다. 다만 살기 위해 죽을 자리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죽을 각오로 뛰어들 때만이 그것이 아주 가끔 살자리가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는 비록 부질은 없었지만 오래도록 외워왔던 주문을 생각했다. 늦는다고 못 가는 건 아냐, 그래 못 가는 게 아니면 되잖아. 가면 되는거야, 그게 언제든 그게 언제든......


생이 나를 부르면 그것이 공평하든 그렇지 않든, 예, 하고 큰소리로 대답하기로 결심했다. 좋아하는 선생이 부르든 싫어하는 선생이 부르든, 출석 시간에 대답했던 학창 시절처럼 생이 부르거든 큰 소리로 예,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진실보다 무서운 건 질실이 밝혀진다는 것이라는 걸. 거짓이라도,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붙들고 있는 편이 나을 때가 있다.


생각이 언어로 표현해 소통하고자 하는 행위는 언어 자체의 한계에 궁극적으로 방해받는다.


희망이 절망적인 유혹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희망을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는 몰랐다.


운명이 직접 우리를 겨냥해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면, 두려움과 불안의 저 밑바닥에서 일종의 끌어당기는 힘. 인가간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목숨을 부지하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있더라고, 위험과 죽음을 무릎쓰고라도 운명을 접해보고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이가 프리모 레비였던가 아니면 역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온 빅터 프랭크였던가 아니면 나였던가.





[2019.03.01 - 2019.03.05]


- 감사합니다, 이홍식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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