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아침, 내가 지불할 꿈값은 뭘까?
쓰디 쓴 커피에 '진정 시럽' 두 스푼. 잠을 잘 오게 해주는 양파우유, 숙면 사탕, 심신에 안정을 주는 쿠키.
나에게 이러한 것을 내밀며 살래? 먹을래? 한다면 난 사먹을거다. 불안증과 불면증이 있는 나로써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밑져야 본전이고 '그래서 무슨 맛일까?'라는 의문점 때문에라도 난 사먹을 기세였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 책을 읽는 내내.
'잠들어야만 입장할 수 있는 상점가 마을'이라고 작가는 서두에서 소개를 하며 이 상점가에서 사는 인물들, 음식들, 꿈 제작자, 꿈을 팔고 받은 대가를 저축하는 은행 및 증권가까지!!!! 이 세상과 다를바 없는 듯 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세계, '환상의 나라' 같다.
잠들어야만 입장할 수 있는 상점가이다 보니 손님들은 그 상점에 간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꿈의 대가 즉, 꿈값은 기가막히게 지불한다. 뭘로? 감정으로.
난 이 포인트가 좋았다. 호기심, 설렘, 신기함, 침착함, 느긋함, 해방감, 아쉬움, 실망감, 열등감, 우월감, 안도감... 등! 느끼지만 표현하지 않으며 살았던 그 감정들을 글로 보게 되고 또 그 감정들이 꿈값이 된다는 것은 굉장한 신선함이었다.
내가 자고 일어나 후에 느끼는 감정으로 나 역시 꿈값을 지불하고 있지는 않을까? 나도 잠들면 그 상가에 가서 어떤 꿈을 사면 좋을지 직원과 대화를 하며 이것저것 꿈을 찾고 있지 않을까?
- 금일 준비한 꿈은 모두 매진입니다!
오늘도 잠드는 길에 저희 매장에 들러 주신 고객 여러분.
금일 준비한 꿈 상품이 전량 소진되었으니,
내일 다시 찾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가게는 연중무휴,
매일매일 좋은 굼을 잔뜩 쌓아 두고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주인 백 -
- "(중략) 주문한 꿈을 제대로 수령하시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지켜주셔야 할 일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죠?"
"매일 밤 꼬박꼬박 최대한 깊은 잠을 주무세요. 그게 전부랍니다."
내가 이걸 못하나부다.
'최대한 깊은 잠을 자는 것'
나는 불면증이 있다. 내 블로그의 다른 글들을 보면 알겠지만 우울증도 있다. 우울증과 불면증은 세트라고 봐야 하는데 요근래들어 불면증이 심해졌다. 불면증 때문에 수면제를 복용하진 않지만 안정제는 먹는다. 이 약을 줄여보려고 나름 조절을 하는데 여지없이 약을 줄이는 날에는 잠을 못 잔다. 그런 와중에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주문한 꿈을 꾸려면 최대한 깊게 자야한다라...'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달러구트님, 저에게도 숙면 캔디 주세요. 일단 하나만 먹어볼게요.' 이 생각을 하고 피식 웃었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동화같은 이야기에 동화같은 감정이 이입된다는 게 재미있으면서도 '나 참, 간절하구나'싶었다.
그런데 나는 그 숙면 캔디를 먹고 어떤 꿈을 꾸고 싶은 걸까?
- 그게 끝이었다. 82세. 짧지 않은 삶이었으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면 할머니의 기일이다.
남자는 음료를 주문하고 홀로 창가의 1인석에 앉았다. 할머니의 기일 즈음이 되면 평소보다 더 많이 생각났다. 그녀는 젊어서는 눈치로 살았고, 늙어서는 어린 손자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학교에서의 배움이 부족하다고 할지언정, 그녀는 얼마나 현명하고 어진 어르신이었고, 또 어릴 적 그에게 얼마나 의지가 되는 존재였는지.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햇수로 4년이 지났고 올해가 5년차다. 우리 나여사가 떠나고 나서 할머니 꿈을 많이 꿨다. 꿈에서는 치매도 아니었고, 나이들어 힘없는 피부를 가진 할머니도 아니었다. 짱짱한 피부와 짱짱한 발걸음 그리고 오른팔 왼팔을 번갈아가며 휙-휙 휘저으며 걷는 뒷모습. 삼청동에서 살았을 때처럼 그 자리에서 텃밭을 가꾸고 있던 모습.
이 모습들을 보고 난 후에는 한동안 얼떨떨하기도 했고, 할머니가 치매 이전의 할머니여서 반갑기도 하고 안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언제나 슬펐다.
추위를 싫어했던 할머니가 춥다며 눈물 콧물 흘리며 우악스럽게 화를 내던 모습을 꿈꾸고 난 후, 화장된 할머니의 함에 무릎담요를 감싸주기도 했다. (할머니 장례를 치르고 발인날 화장터에서 할머니가 담겨진 함을 받아서 집으로 왔다. 그리고 한동안 함께 지냈었다.)
나여사는 자신이 떠날 것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치매였어도 알지 않았을까? 우리 나여사가 항상 하던 기도가 "자는 잠에 데려가세요"였고, 우리에게는 우리 자매가 자고 있을 때 놀라지 않게하고 떠나겠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가셨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는 죽기 전의 사람들이 미리 예약 주문을 한다. 죽고 난 후 누군가에게 어떠한 꿈을 꾸게 해달라고.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보이게 해달라고. 저 남자는 할머니가 주문해 놓은 꿈을 배달 받았으며, 어떤 부부는 6살 아이가 주문한 꿈을 배달 받았다.
어쩌면, 그 꿈이 필요한 시기에 그들에게 갈 수 있도록 그 절묘한 타이밍을 선택한 달러구트의 세심함을 많은 이가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지 않을까?
그 시기에 할머니 꿈을 주구장창 꿔오던 나처럼?
힘들었던 그때. 죄스러움이 컸던 그때. 매일을 자책하며 보내던 그때.
지나가는 할머니만 봐도 눈물이 나던 그때.
그러지 말라고 , 그만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장편소설이라는 느낌보다는 동화책 같은 느낌이다. 이 긴 동화책에서 나여사를 만난 것 같아 반갑기도 하지만 쓰라리고 슬픈 감정이 더 깊게 새겨졌다. 내가 잘한다고 했어도 못했던 것만 생각나는게 남겨진 사람들의 몫인걸까.
오늘 밤에는 잘 잠들고 싶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즐거운 꿈 값은 지불하고 싶다.
- 이 세상에 믿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던가.
- "좋아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부터 사랑이 시작되는 거란다.(중략)"
- "네가 생각하는 대단한 미래는 여기에 없단다. 즐거운 현재, 오늘 밤의 꿈들이 있을 뿐이지."
-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거꾸로생각하면 온 힘을 다해 어려움을 헤쳐 나가던 때일지도 모르죠. 이미 지나온 이상,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랍니다. 그런 시간을 지나 이렇게 건재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야말로손님들께서 강하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 "잊지 마세요. 손님들께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것들을 이겨내며 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이전보다 훨씬 나아질 수 있죠.(중략)"
- "과거의 어렵고 힘든 일 뒤에는, 그걸 이겨냈던 자신의 모습도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 우린 그걸 스스로 상기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단다."
- "여러분은 언제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십니까?"
(중략)
"여러분을 가둬두는 것이 공간이든, 시간이든, 저와 같은 신체적 결함이든... 부디 그것에 집중하지 마십시오. 다만 사는 동안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데만 집중하십시오. (중략)"
- "영감이라는 말은 참 편리하지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뭔가 대단한 게 툭하고 튀어나오는 것 같잖아요? 하지만 결국 고민의 시간이 차이를 만드는 거랍니다. 답이 나올 때까지 고민하는지, 하지 않는지. 결국 그 차이죠. 손님은 답이 나올 때까지 고민했을 뿐이에요."
- "페니, 나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에는 2가지가 있다고 믿는단다. 첫째, 아무래도 삶에 만족할 수 없을 때는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페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은, 쉬워 보이지만 첫 번째 방법보다 어려운 거란다. 게다가 첫 번째 방법으로 삶을 바꾼 사람도 결국엔 두 번째 방법까지 터득해야 비로소 평온해질 수 있지."
"어떤 방법이죠?"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족하는 것. 두 번째 방법은 말은 쉽지만 실행하기는 쉽지 않지. 하지만 정말 할 수 있게 된다면, 글쎄다. 행복이 허무하리만치 가까이에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지."
- "좋습니다. 이제 다 된 것 같군요. 이제 마지막 질문만 남았습니다. 배달 시기는 언제로 할까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주인장께서 우리 가족들을 잘 살펴보시고 괜찮은 때에 해주세요. 너무 이르게는 말구요. 아시잖아요. 다들 괜찮아졌을 때, 하지만 너무 늦어서 섭섭하지는 않은 적당한 때, 그때 배달해주세요."
요즘, 절망적이었던 나에게 희망적인 말을 해주어 고맙고,
할머니 생각을 한번 더 할 수 있게 해주어 고마워요.
할머니, 나 잘 버티고 버텨서
할머니 보내주던 날 했던 할머니와의 약속
꼭 지킬게.
[2021.01.01 - 2021.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