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서 후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칼란드리아 Oct 04. 2022

<기형도 전집>


*2007년에 작성한 글입니다.


대학생 때 (아마 많은 이들이 그랬겠지만) 빠져들었던 두 명의 작가가 있었다.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기형도. 


내가 읽은 그의 시집이라곤 '입 속의 검은 잎' 한 편 밖에 없었지만 (추모시집인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시집이 나온 줄은 몰랐다) 나는 그의 시들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그와 나와의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넘어 진공에서 전류가 통하는 듯한 그러한 느낌(실은 방전인 듯)을 내게 전해 주었고 난 그의 시와 나의 시들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나도 꽤 오래 시를 써왔다고 생각했다. 고등학생 때에도 계속 시를 써왔고 시나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겐 어떠한 의미였을까. 나는 왜 글을(시를, 소설을) 쓰려고 했을까. 그러한 고민은 시인의 고민과도 일치한다. (역시 대다수 작가들의 고민이겠고)


시의 본질의 문제와 감동의 문제. 이것들은 시인의 고민이었던 것 같다. 이 전집의 마지막인 참회록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문학도들이 추구하는 예술이라고 착란하는 언어 조립 상태가 갖는 함정 - 즉 사이비 문학으로서 - 삶의 허약성을 환상적으로 보상하는 수단으로써의 시"
"시란 본질적으로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생의 비밀이나 투시력 혹은 인간을 선하게 이끄는 온갖 에스프리, 생을 풍요롭게 하는 상상력을 제공하는 일인바, 감동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계몽적 생명 (생활-리얼리즘+인상주의-로서의) 유파에 빠져있다. 대학생들의 아카데미즘이나 귀족주의 혹은 언어 심미주의, 사이비 철학, 변용주의 등을 혐오한다"
"기형도, 자네는 말을 아껴라. 너의 감상은 시로써 족하다."
"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일. 그것은 우문이다. 구원할 수 '있다' 혹은 '없다'의 구분은 이미 시에 기능이나 효용의 틀을 뒤집어 씌운다... 시가 '구원'으로서 군림해야 할 지금의 위치는? 그 설정 방향은?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따분하고 졸릴 뿐이다. 그런데 평자들이나 고고한 시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사회학, 철학, 심리학, 심지어 컴퓨터까지 동원하여. 시는 시다. 그리고 말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얘기하고 듣는다. 그리고 감동한다. 감동? 감동..."


하지만 그는 그러한 고민의 끝을 맺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만 29세의 생일을 엿새 남겨두고. 사인은 뇌졸중. 젊은 나이의 요절했기에 그의 짧았던 삶이 더욱 안타까워지는 걸까.


이 전집은 그의 그 짧은 생애의 작품들을 망라한 모음이다.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 등에 수록된 시 77편, 새로 찾아낸 미 발표 시 20편, 소설 8편, 산문 4편 등 습작기 소설과 미완성 시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어떤 시는 마음에 와닿기도 하고 어떤 시들은 거칠고 투박하며 어떤 시들은 감정 어린 울음과 같고 어떤 시들은 미처 피지 못한 꽃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의 시들을 공통적으로 꿰뚫고 지나가는 건 삶에 대한 애착, 그리고 형벌과도 같은 삶에 대한 관조적인 시각이다. 그것은 시뿐만 아니라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작품들은 분명 어둡고 황폐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내가 그였더라도 같은 작품들을 쓰지 않았을까 싶으니.


그의 작품과 산문, 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그와 나 사이의 놀랍도록 일치하는 점들에 대해서 다시금 몸서리쳤다. 그의 일기를 읽을 땐 그의 옆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느새 나는 그와 나를 동일시하고 있음도 느낄 수 있었다. 무서운 일이었다.


특히 그는 죽음에 대한 성찰을 위해 노력한 듯싶다. 그의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가정환경이 어려워졌으며, 그가 열다섯이 되던 때에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어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기 때문인 듯싶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들이 마냥 어둡다고만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죽음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한 역설적인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왜 십 수년 전에 기형도라는 시인에게 빠졌고, 지금도 그러한 지를. 어쩌면 그는 자신의 남은 삶을 자신의 시 속에 불어넣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의 수명도 짧아졌음을. 이제 그의 생은 독자들에게서 이어진다. 물론 내 속에서도 어느 부분만큼 그의 생이 연장되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니퍼 시니어 <부모로 산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