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멜라 작가의 작품들은 처음 읽어보았는데 상당히 필력이 좋아 몰입해서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작가나 작품에 대해 아무 정보도 없었기에 아무런 선입견도 없었다는 장점도 있었다. 만약 그러한 선입견이 있었다면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
이 책에는 모두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세편은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다. <저녁놀>, <나뭇잎이 마르고>, <제 꿈꾸세요> 등.
무엇보다 우리는 현실에서 마주하기엔 지나치게 많은 말을 숨김없이 했다. 빛이 강한 여름에 오히려 태양광 에너지를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너무 많은 비밀을 나누었기에 연인이 될 수 없었다. 연인이 되고 싶단 생각조차 나만의 바람이었다. 희래는 다른 사람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저 언제까지나 희래의 얘길 들어주고 싶었다. 평생, 희래가 자신의 멍들고 다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였으면 했다. pp.150
그런데 우리 문학계가 예전보다 좀 더 개방적이 된 것일까? 심사위원인 기성작가들도 이제는 다양한 주제와 시도에 대해 인정하게 된 것일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조금 의아한 점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능력에 기인한 것이다. 예민할 수 있는 주제들도 유쾌하게 다듬어 둥글둥글 굴리듯이 써 내려갔고, 그러면서도 그 속에 담겨있는 삶의 비장함과 슬픔 등의 감정들도 잘 담아냈다. 주제는 살리면서 그 재료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잘 다듬어낸 것에 대한 인정이겠지.
천사라는 뜻의 그 남성 명사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앙헬은 말했지만 체는 누구보다 잘 어울린다며 그 별명을 고집했다. 체는 '헬 gel'의 스페인식 악센트를 약하게 하면 같은 발음의 영어 단어가 떠오른다며 흐뭇해했다. 천사 안에 지옥이 있다면서. 그런 식으로 체는 신이 나 종교에 관한 농담을 즐겼고 동시에 운명이나 초월적 존재에 대한 사색이 담긴 예술작품을 좋아했다. pp.73
두 여자는 파를 두고 다툼을 벌였다. 파 따위에 흔들리는 너희의 관계를 보며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희를 분열시키기 위해선 거창한 종교나 사상 따윈 필요치 않았다. 그저 생활물가 급등과 대파를 반려 식물로 키우는 너희의 본성이면 충분했다. pp.121
걱정해줘서 고마워. 네 편지를 받고 깨달았어. 사람이 언제 우는지 아니? 자기 자신을 동정할 때 울어. 난 네 편지를 받고 울었어. pp.147
작품 전반에 퀴어 요소도 있었고 죽음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읽는 이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잘 풀어냈다.
특히 <저녁놀>과 <제 꿈꾸세요>는 특히 더 인상적이었다. 그 외 다른 단편들도 단편소설이 갖는 장점을 잘 살려냈다. (이곳에 다 옮기지 못함이 아쉽다)
그러고 보니 나는 죽어서도 쉬지 못했다. 이유를 찾느라, 인과관계의 인因에 매달리느라 죽음의 효과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나는 나라는 존재를 빈 괄호로 두고 싶었다. 이제 죽은 나를 발견해주길 원하지 않았다. 내 죽음의 경위와 삶의 이력들을 오해 없이 완결하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 나는 나와 이어진 사람의 꿈으로 가 그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pp.295
전반적으로 기발하기도, 발칙한 느낌마저 들기도 했는데 거기에 우울함은 덜어내고 유쾌함을 살짝 가미한 것들이 김멜라 작가의 강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작품들도 읽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