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문학상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자세히는 몰랐고, 수상작품집을 읽어본 것도 처음이다. 일단 이 문학상의 의의가 어떤 것인지 몰라서 책의 뒷부분에 나온 설명을 읽어봤고, 관련된 내용을 찾아봤다. 특이하면서도 의미 있는 상이었다.
그리고 이전에 나온 수상작품집과 앞으로 나올 수상작품집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을 수상하는 것이 작가에겐 영광일 것 같고, 이 상의 수상작들은 믿고 봐도 되겠다고.
올해의 수상작가들 역시 다들 쟁쟁한 분들이다. 나도 좋아하는 분들이라 전작을 한 두 작품씩은 읽어봤었고 (문지혁 작가의 작품만 읽어본 적이 없었지만) 또 널리 알려진 작가들이라 누가 대상이었어도, 수상을 했더라도 납득이 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심사평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대상 수상작은 그 이유가 있었고 수긍이 되었다.
우리는 마른 잎사귀가 떨어져 있는 포도밭을 말없이 걸었다. 수분이 다 빠져나간 채 시커멓게 쪼그라든 포도송이가 종종 눈에 띄었다. 곳곳에 버려진 비닐 무더기를 보자 고등학교 교실에 두고 온 방석이 생각났다. 솜이 다 꺼진 그 방석은 누가 버렸을까. 그 시절 우리는 모두 비슷한 모양의 방석을 깔고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알아서 다른 자리를 찾아갈 줄 알았다. 그때 우리가 가능하리라 여겼던 인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애초에 그런 것이 있기는 했을까.
편혜영 <포도밭 묘지> 중에서. pp.34
이 작품집에는 여섯 작가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대상인 편혜영 작가의 <포도밭 묘지>를 비롯해서 김연수 <진주의 결말>, 김애란 <홈파티>, 정한아 <일시적인 일탈>, 문지혁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등.
각각의 작품들은 모두 특색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느껴진 것은 그 속에 담긴 우리의 삶의 모습이었다. 한 사람의 삶, 여러 사람의 삶. 그 속에서는 특별한 사건도 있었지만 또 별다른 사건이 없기도 했다. 아니, 어찌 보면 각각의 작품 속에 등장한 모든 것이 사건일 수도 있겠다. 사소한 변화라고 하더라도. 때론 위태로워 보이는 것들도.
이연이 넋 나간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며 오대표의 옆얼굴을 살피다 문득 몸이 굳었다. 오대표의 얼굴에 잔을 잃은 서운함이나 원망 대신 묘한 만족감이라 할까 승리감이 얼핏 스치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전혀 놀란 기색 없이 마치 오늘 파티에서 얻을 건 다 얻었다는, 이만하면 괜찮은 계산서가 나왔다는 표정을 지은 까닭이었다. 성민의 표현대로라면 오대표는 '계산이 정확하신 분'인데, 그렇다면 저 미소는 대체 무슨 뜻일까?' 그제야 이연은 오늘 가장 말수가 적은 서가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 대개 '걱정'과 '근황'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렇지만, 아니 그렇다 해도 이연은 가능한 한 이 연극을 이대로 마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김애란 <홈파티> 중에서. pp.121-122
나는 두려워서 질끈 눈을 감았다. 분열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을 붙들었다. 나를 구해줄 것, 마음을 붙일 만한 것, 진짜 삶이라 불리는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가령 캠핑장의 하늘, 모형 비행기, 아이들의 웃음소리 같은 것들. 하지만 그것들은 전부 나와 무관하게 느껴졌다. 그것들을 떠올려도 아무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주인 없는 방처럼 텅 빈 나의 내면을 바라보았다.
정한아 <일시적인 일탈> 중에서. pp.163
그것은 개개인의 특수성일 수도 있지만 보편성일 수도 있다. 나도, 누구도 겪을 수 있는 일들. 그러한 상황이 되면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들. 그것은 섬뜩하면서도 정해져 있는 것들일 수도 있다.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상황을 굳이 이해해보려 하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보편성 때문일 수 있겠다.
우리가 연기를 하고 일탈을 하려고 해도 기껏해야 이 세상에서 단역이나 조연일 뿐, 주인공일 수 없는 현실. 그러나 일상의 소소한 틈새에서 주인공인 척해보기도 한다.
각 작품의 결말은 명확하지 않다. 열린 결말이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그저 뒷 이야기를 상상해보고,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생각해본다. 단편소설의 묘미가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여러 작가의 작품을 모아놓은 작품집이라 그럴까. 그래도 작품 그 자체를 온전히 이해해보려 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 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중에서. pp.236
작품들을 읽으며 작품과 비슷한 배경, 장소, 설정을 나의 기억에서 떠올리기도 했고, 비슷했던 경험들도 생각났다. 그래서인가, 작품을 읽으며 그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어쩌면 그것들이 나의 기억에 맞춰진 것일 수도 있어서 작품의 이해에 방해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는 더 도움이 된 듯했다.
내년도 수상작은 어떤 작품들이 될지 사뭇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