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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Feb 10. 2023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7년쯤 전에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었다. 문예출판사본이었고,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 중에서는 처음 읽은 것이었다. 워낙 악명 높은 제임스 조이스지만, 그런 선입견 대비 그래도 읽을만했다는 기억이 난다.


예전에 처음 읽을 땐 이 작품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었고, 다른 고전류인 괴테나 헤세, 릴케와 같은 독일 작가들의 작품 비슷한 느낌 정도일 것으로 생각했었다. 실제로, 제목만 듣고는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나 릴케의 <말테의 수기>가 떠오르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공통점은 거의 없었다.


사실 이 책을 다 읽었다고 해도 뭘 읽었느냐고 물어본다면, 부분 부분 기억나는 부분이 있고, 책을 읽으면서 '아!' 하고 와닿은 부분이 있었음에도 잘 모르겠다고 시인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그런 책이었다. 


게다가 그가 '의식의 흐름' 기법의 대표적인 작가라는 사실을 나중에 다 읽고 나서야 알았고, 그러한 것이 작품 내내 독자들을 괴롭힐 것이라는 것도 읽고 나서야 알았다.


그러다가 독파 챌린지를 통해 문학동네 번역본으로 다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예전의 기억은 별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책의 내용은 군데군데서 기억이 났다. 


다시 읽는 것임에도 읽기가 좀 버겁긴 했지만 못 읽을 만큼은 아니었다. 독백 같은, 주인공의 심리에 대한 묘사가 좀 과하긴 했지만 그래도 따라갈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예전에 읽을 때는 그냥 읽었던 것 같은데 다시 읽으니 오히려 더 속도가 나지 않았다. 번역이 문학동네판이 훨씬 더 나았음에도 말이다. 게다가 곳곳에서 친절하게 역자주를 달아두어서 이해를 높여주기도 했다. 그러한 것이 흐름을 끊었다기보다는 그냥 곁가지 지식 정도로 생각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은 줄거리가 중요한 책은 아니다. 줄거리는 참 단순하다. 한 소년이 자라서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는 게 끝. 물론 유소년시절의 이야기도 있고, 학창 시절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주인공의 내면이 둘러싸는 형태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바깥은 외부적 요인들이 둘러싸고 있다. 이는 아일랜드가 처한 현실, 종교적인 문제 등 현실적 억압들인데 주인공은 그로부터 점차 벗어나고자 했고, 결국 예술, 미학을 통해 벗어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영혼은 수의를 벗어던지고 소년 시절의 무덤에서 부활했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자기와 이름이 같은 그 위대한 명장처럼, 영혼의 자유와 권능을 바탕으로 하나의 생동하는 작품, 즉 새롭고 우뚝하면서도 아름답고 감지해 낼 수 없는 불멸의 가치를 지닌 작품을 당당히 창조하리라.
살아가면서, 실수하기도 하면서, 추락하기도 하면서, 승리하기도 하면서, 삶에서 삶을 재창조하리라! 어떤 야성적인 천사가, 인간적인 활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천사가, 삶의 아름다운 궁전에서 보낸 사자가, 실수와 영광의 모든 길로 통하는 대문을 어느 황홀한 순간 활짝 열어주기 위해 그 앞에 돌연히 나타난 것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지.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탄생하기만 하면 당장 그물을 씌워 날아오르지 못하게 해. 네가 지금 나한테 말한 민족이니 언어니 종교니 하는 그물. 나는 그런 그물을 뚫고 날아오르려고 노력할 거야.
오라, 오 인생이여! 나는 백만 번이라도 경험의 실재와 마주쳐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내 민족의 의식을 벼리기 위해 떠난다. 


역자해설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스티븐 디덜러스'가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 스테파노의 이름과 그리스 신화에서 크레타의 미로를 만든 장인 다이달로스에서 따온 것이며, 이를 제임스 조이스가 필명으로 사용하기도 했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몰랐던 이야기인데 그래서 그 이름 때문에 주인공이 겪은 일들을 알 수 있었다. 기독교와 그리스 신화의 결합은 이질적이면서도 상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스타일을 알게 돼서 그런지, 오히려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보였던 요소들이 보여서 반가움도 느껴졌다. 


의식의 '흐름'이라고는 했지만 흐름이라기보다는 '산재'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작품 전반적으로는 4차원의 시공간이 뒤틀린 듯한,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의 후반부에 주인공이 시공간이 입체적으로 구성된 큐브에서 헤매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각각의 사건은 불연속적이고 인과관계도 없으며, 그것에서 파생된 의식 역시 불연속적으로 이는 계속해서 특이점 (singular point)을 양생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튼 두서없이 길게만 나열된 것 같은 이야기는 그럼에도 한 가지 지향점, 즉 작가가 되기 위한 주인공의 결정으로 향하고 있는데 이는 주인공의 유년으로부터 청년기까지의 경험, 그리고 미학에 대한 열정과 동경으로 뒷받침되는 듯하다. 


다만 인과관계의 부실함을 '에피파니'를 통해 뛰어넘고자 한 것 같은데, 차라리 그러한 작중 장치가 해소감을 느끼게 해 주며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게 해 주었다. 그런데 어느 부분에서 에피파니를 느낄 수 있는 것인지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 같았다. 숨겨져 있지만 그걸 찾게 되면 거기서 빛을 볼 수 있는 그런 것.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했지만 얼마큼 그의 경험담이 들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전체적인 방향은 비슷했겠지만 세부적인 부분은 다를 수 있겠지.


독자가 이 책에 대해 이해를 못 하더라도 그건 독자 탓은 아니라고 하고 싶다. 작가가 애초에 독자의 이해를 바라고 쓴 것도 아닐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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