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was the best of times,
it was the worst of times,
it was the age of wisdom,
it was the age of foolishness,
it was the epoch of belief,
it was the epoch of incredulity,
it was the season of Light,
it was the season of Darkness,
it was the spring of hope,
it was the winter of despair,
we had everything before us, we had nothing before us, we were all going direct to Heaven, we were all going direct the other way— in short, the period was so far like the present period that some of its noisiest authorities insisted on its being received, for good or for evil, in the superlative degree of comparison only.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도입부의 원문이다. 워낙 유명하기도 하지만 고전문학을 비롯해서 문학작품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도입부이다.
이 작품은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서 제공하는 원서로 읽다가 버거워서 번역본으로 다시 읽었는데, 저 도입부만큼은 원서로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번역본마다 차이는 있지만 저 느낌을 잘 살리기는 어려운 듯하니.
먼저, 내가 찰스 디킨스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어릴 때나 중고등학생 때 그의 작품 중 <올리버 트위스트>, <데이비드 카퍼필드>, <위대한 유산>, <크리스마스 캐럴> 등을 읽어본 적은 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그런 작품들에 한정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사실 그 작품들 조차 완역본은 아니었을 것이고, 그의 작품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다시 읽어본다면 훌륭한 작품들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듯하다.
<두 도시 이야기>, 이 책도 제목만 알았을 뿐 내용은 몰랐는데 읽고 나니 그가 정말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소설도 정말 잘 쓰는구나 싶어서.
대작이다. 이런 류의 작품에 대해서 내가 이런 느낌을 받은 건 <레 미제라블>과 <웃는 남자> 이후 오랜만인 것 같다. 솔직히 그 감동은 <레 미제라블>보다는 덜했지만 위의 두 작품 중간 정도의 느낌은 되는 듯했다. 물론 프랑스 작가와 영국 작가의 차이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위고처럼 긴 설명의 압박은 덜해서 좋았다. 그래서 더 잘 읽혔던 것 같다.
이 작품의 시대적인 배경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인 18세기 후반이다. 이 작품은 찰스 디킨스가 1859년에 썼는데 프랑스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태였다. 약 70여 년간의 시간차가 있고, 영국인의 입장에서 프랑스 대혁명과 그 이후의 일들을 본 것이라 다르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짐작한 대로 이 책의 제목인 '두 도시'는 런던과 파리를 의미한다. 그 제목만큼이나 이 책은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큰 스케일을 보여준다.
엄청난 피를 흘리게 했던 프랑스 대혁명의 중심지 파리.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던 런던. 그러한 분위기만큼이나 두 도시를 오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의 긴장감도 다르다. 아니, 극단적인 차이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이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리고 있다. 그게 전체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그러한 이유들이 모여서 하나의 혁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디킨스는 그러한 프랑스 대혁명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듯하다. 전반적으로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혁명 그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이라기보다는 그 과정과 특히 단두대에서의 처형을 그렇게 본 것이리라.
그 가운데서는 억울한 죽음도 있었을 것이다.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이성을 상실한 대중들 또는 개인들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고, 복수가 파도친다. 그러나 응당 그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들의 종말은 그나마 답답함을 조금 해소해주기는 했다. 몰입감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무너가 답답함도 느껴졌었기에.
공간적인 배경의 스케일만큼이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다 보니 그 등장인물 간의 관계가 조금 복잡해서 머릿속으로 정리는 잘 안 될 수도 있다. (고전문학을 읽을 때 느끼는 것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체적인 구성이 잘 짜여서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이 작품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해피엔딩이 될 수가 없음을 느꼈지만,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는 것은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 <레 미제라블>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새드엔딩.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일까? 디킨스가 하고 싶었던 말은 마지막의 시드니 카턴의 속마음을 추측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알고 있다. 바사드와 클라이, 드파르주, 방장스, 배심원, 판사 같은 옛 체제가 붕괴된 후 생겨난 기나긴 대열의 새 압제자들이 더는 지금처럼 사용하지 않아도 결국 이 보복적인 도구에 의해 멸망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깊은 구렁텅이에서 솟아난 아름다운 도시와 현명한 사람들이, 시간이 걸릴지언정 진정한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승리와 패배를 겪음으로써, 현재의 악행과 그것을 잉태한 예전의 악행이 스스로 속죄하고 사라지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생명을 내려놓음으로써 다시는 보지 못할 그들이 영국으로 돌아가 평화롭고 보람되고 번창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녀가 내 이름을 딴 아이를 품에 안고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이 들고 허리는 구부정해졌지만 건강을 되찾은 그녀의 아버지가 병원에서 환자를 정성껏 돌보며 편안하게 지내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신이 가진 것으로 그들을 풍요롭게 해 준 인자한 노신사가 그에 대한 보답으로 편안히 세상을 떠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들, 아니 대를 이어 그들 후손에게도 마음의 성소가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할머니가 된 그녀가 나의 추도일에 나를 위해 울어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녀와 남편이 이승의 행로를 마치고 지상의 마지막 침대에 나란히 누우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서로에게 귀하고 존경하는 존재인 만큼 나 또한 그들에게 그러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품에 안긴 내 이름을 딴 사내아이가 한때 나의 길이기도 했던 인생길을 훌륭히 걸어가리라는 것을. 게다가 그 길을 훌륭히 걸어 내 이름을 빛내주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내 이름에 묻었던 오점이 지워지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공정한 재판관, 명예로운 인물이 된 그가 내가 너무도 잘 아는 이마에 금발, 그리고 내 이름을 딴 사내아이를 이 장소로 그때가 되면 지금의 끔찍한 흔적도 사라져 아름다운 곳이 되리라 데려오리라는 것을. 그리고 들린다. 감격에 겨워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리가.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은 지금까지 했던 그 어떤 행위보다 훨씬 더 숭고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려고 하는 곳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곳보다 더없이 편안한 곳이리라."
즉,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웠던 그 혁명이 남긴 것이 무엇이었으며, 그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정의'와 '희생'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