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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Dec 13. 2022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오, 윌리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신작 <오, 윌리엄!>은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의 속편이며, 루시의 전 남편이었던 윌리엄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전작에서 윌리엄은 조연처럼 잠깐씩만 등장한 바 있다. 


이 책의 제목이 <오, 윌리엄!>이듯 윌리엄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루시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이는 결국 이 작품이 윌리엄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루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준다.


루시의 이야기는 전작에서 상세하게 나와 있었기 때문에 그 작품을 먼저 읽은 것이 <오, 윌리엄!>의 이해에도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전작을 읽기 않아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 군데군데에서 주석처럼 루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작과 이 작품 간의 시간차는 꽤 크다. 전작이 루시의 30대나 40대(?)의 이야기였다면, 이 작품은 윌리엄이 60대 후반, 70대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이니 (윌리엄과 루시의 나이차가 얼마였더라, 본문에 나왔던 것 같기도 한데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거진 3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작가는 왜 그 시기를 대상으로 삼았을까? 


그러한 시간차가 있었지만 두 사람의 내면은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았다. 이혼 후 루시와 윌리엄은 각각의 삶을 살았다. 루시는 데이비드와 재혼을 했고, 작가로서도 성공했다. 윌리엄도 대학교수로, 연구자로의 인생을 살며, 두 번의 결혼을 더 했다.


윌리엄의 아내들이었던 루시, 조앤, 에스텔은 모두 그를 버리고 떠났다. 루시는 에스텔이 그를 버리고 떠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것은 그녀가 느낀 것과도 동일했을 것이기에.


이 책은 윌리엄의 내면 속 두려움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수시로 악몽을 꾼다. 그 악몽의 근원은 아무래도 아버지 때문인 것 같다. 나치 독일군이었고 포로생활을 했던 아버지, 그리고 그 실상을 알게 된 이후 그것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그를 괴롭혔다.


그는 그때 독일에서 본 것 때문에 겁에 질려 있었다. 거기서 자신의 아버지가 행한 역할이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말할 수 없을 만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뿌리를 흔들어 뽑았을 것이다.


루시는 그런 윌리엄을 걱정했지만 진심이었을까? 루시는 윌리엄과 함께 사는 동안 표면적으로는 행복했지만 그의 내면까지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를 감당하기에 루시는 본인의 삶 자체가 버거웠기 때문이다. 결국 루시는 떠나기로 '선택'했었다. 


이혼에 대해서라면 끔찍한 이야기가 많지만, 헤어짐 자체를 제외하면 우리 이혼은 그렇지 않았다. 이따금 나는 헤어짐의 고통과 그것이 내 딸들에게 일으킨 고통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죽지 않았고, 지금 여기 살아 있으며, 윌리엄도 그렇다.
결혼해서 같이 살 때 나는 그가 정말로 싫어질 때가 더러 있었다. 유쾌한 거리감과 온화한 표정을 지닌 그는, 가슴속에 묵직한 두려움 덩어리를 지닌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나빴다. 그의 고양된 유쾌함 이면에는 청소년이나 할 법한 불평불만이 깔려 있었고, 영혼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번득였다. 
선택이라고, 루시? 사람이 살면서 정말로 뭔가를 선택하는 일이 몇 번이나 될까? 말해봐. 당신이 정말 가족을 떠나기로 선택했어? 아니, 내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당신은...... 당신은 그냥 떠났어. 그래야만 해서 그러는 것처럼. (...) 루시. 그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고, 알고 싶어 정말로 알고 싶어 - 사람이 뭐든 실제로 선택하는 건 언제인가? 당신이 말해봐. 


루시와 윌리엄은 이혼 이후에도 계속 친구처럼 지냈고, 각자 배우자가 있음에도 아이들 때문에 종종 만남을 갖기도 했다. 심지어 에스텔의 파티에도 참석하곤 했다. 내키지 않는 일이었겠지만. 그리고 그 파티에서 에스텔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때는 몰랐겠지만, 그것이 나중에 에스텔이 윌리엄을 떠난다는 암시였을 수도 있다.


이야기는 윌리엄의 숨겨진 가정사로 넘어간다. 윌리엄의 가정사를 찾아가면서 그의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의 과거도 알게 되고 캐서린이 버린 딸, 즉 이부누나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가 평생 믿었던 것들이 흔들렸다. 악몽보다 더 끔찍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충격이 너무 커서였을까, 그는 달라졌고 권위를 버렸다. 아니, 권위를 버렸다기보다는 또 다른 권위로 바뀐 것이다.


작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그 내용은 마치 로드무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두 사람의 갈등은 지속된다. 애초에 루시가 윌리엄을 왜 따라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옛정 때문일까. 


그러한 가운데서 루시도 비로소 느끼게 된다. 그가 윌리엄에게서 안정감을 느낄 수는 있었지만 위안은 느낄 수 없었던 것을. 반면 데이비드는 그러한 위안을 주었던 사람인 것을.


이 권위가 바로 내가 윌리엄을 사랑하게 된 이유임을. 우리는 권위를 갈망한다. 진실로 그렇다. 누가 뭐라고 말하건 우리는 권위라는 감각을 갈망한다. 혹은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힘든 일' - 나는 그걸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 을 겪으면서도 윌리엄은 이 권위를 결코 잃지 않았다. 우리가 숲 속에서 길을 잃은 헨젤과 그레텔이라고 느껴질 때조차 나는 늘 그의 존재 안에서 안전함을 느꼈다.

한 사람에 대해 이런 식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와 결혼한 뒤에도, 심지어 우리가 '힘든 일'을 경험하는 와중에도 나는 윌리엄에 대해 여전히 그렇게 느꼈다. 그와 결혼하고 처음에, 그리고 (앞서 말했듯) 우리에게 곧바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을 때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내가 빙빙 돌며 헤엄치다가 이 바위에 부딪힌 물고기처럼 느껴져." 


루시가 더 원했던 것은 안정보다는 위안이었다. 그래서 데이비드가 죽은 후에 데이비드를 더 그리워했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가 윌리엄과 거의 이보다 더 다를 수는 없다 싶을 만큼 딴판으로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윌리엄과 결혼했을 때 내게 일어난 반응이 데이비드와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하려는 말은 데이비드의 몸이 늘 내게 엄청난 위로가 되어주었다는 말이다. 맙소사, 그 남자는 내게 위로의 존재였다.


루시는 가정형편과 부모님의 무관심, 냉대로 인해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고 경험해본 것이 거의 없었다. 이로 인해 보편적인 경험에 대해서도 무지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고,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었기에 그러한 공동체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로 인해 자신이 그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지조차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투명인간이라고 표현하였다.


어떻게 다들 뭘 하면 되는지 알고 있는 거지? 나는-앞서 말했 듯 - 내가 투명인간이라고 느끼지만 그 상황에서는 투명인간이라는 느낌과 동시에 내 머리 위로 '이 젊은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 다'라고 쓰인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것 같은 아주 기묘한 감각을 경험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에선 루시도 깨닫는다. 자신도 더 이상 헨젤을 따라다니는 그레텔이 아니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음을. 그리고 캐서린, 윌리엄,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이들에 대한 찬사로 마무리한다. 우리 모두, 각자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불은 늘 켜져 있었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내가 지켜본 그 시간 동안 자정을 지나 새벽 세시가 될 때까지, 햇빛이 충분히 밝아져서 전등이 여전히 켜져 있는지 알아볼 수 없게 될 때까지, 거기서 일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여러 해가 지나서야 내가 어떤 신화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나와 윌리엄의 이야기였다.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이 거대한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윌리엄은 뮤지엄의 불빛과 같았고, 다만 나는 내 삶이 뭔가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좋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만들 수 있다면 뭐든 하겠어.

나는 방금 깨달은 이 사실로부터 윌리엄을 보호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 자신 또한 그것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었다. 그랬다. 그건 사실이겠지만, 최대한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윌리엄이 내게서 권위를 잃었다는 것을 그가 어느 수준에서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평생 마음속에 품고 다닌 헨젤과 그레텔의 모습. 그것은 사라졌다. 나는 더 이상 헨젤을 안내자로 여기며 바라보는 꼬마가 아니었다. 윌리엄은 그저 - 아주 단순히 더는 내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 작품은 마치 <사랑과 전쟁>과 같은 느낌도 들지만 그렇다고 자극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그런 요소들을 애초에 제거했기 때문인지 (이미 이혼한 사이, 70대의 나이에 접어드는 시점 등) 담담하게 흘러간다. 


그런데 그러한 담담함이 더 현실적으로 와닿았다. 비록, 각각의 상황 (불륜이라든가 미국식 사고방식 등)은 다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 중년의 성장일기라면, <오, 윌리엄!>은 장년, 노년의 성장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은 평생 동안 성장해 나가기 때문에?


그러다 한 번은 침대에 앉아 소리 내어 말했다. "오 캐서린."
그리고 생각했다. 오 윌리엄!
하지만 내가 오 윌리엄! 하고 생각할 때, 그건 또한 오 루시! 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오 모든 이여, 오 드넓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소중한 모든 이여, 그런 의미는 아닌가? 우리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우 리 자신조차도!
우리가 알고 있는 아주 아주 작은 부분을 빼면.

하지만 우리는 모두 신화이며, 신비롭다. 우리는 모두 미스터리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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