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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Dec 27. 2022

은희경 <새의 선물>

그때 1969년 겨울, 나는 조그만 좌식 책상 앞에 앉아서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목록을 지우고 있었다. 동정심, 선과 악, 불변,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 약속...... 마침내 목록을 다 지운 나는 내 가운뎃손가락 마디에 연필 쥔 자국이 깊게 파인 것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인간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도 뭔가를 쓰다가 이따금 연필을 내려놓고 가운뎃손가락 마디의 옹이를 한참 내려다보곤 한다. 나는 삶을 너무 빨리 완성했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목록을 다 지워버린 그때,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이 1995년 12월 20일이니 딱 27년 전이다. 나는 이 책을 대학 3학년인가 4학년일 때 학교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었다. 출간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였는데, 어느덧 20여 년의 시간이 지났고, 두 번의 개정판과 누적 100쇄를 넘기게 되었다. 


올해 100쇄 기념판이 나왔을 때 이 책을 구매했고 다시 읽었다. 예전에 읽었던 그 기억은 이미 흐릿해진 터라 새로 읽는 기분이었지만 '진희'라는 어린아이를 통해 본 어른들의 세계라는 그 기억은 또렷했다. 그리고 몇 달 뒤, 독파에 이 책이 챌린지로 올라왔기에 신청하고 다시 한번 더 읽었다. (그러고 보면 올해는 재독이 좀 많은 편이었다)


이 책은 분량은 좀 많은 편이지만 재밌고 술술 읽힌다. 은희경 작가의 필력 덕분이긴 한데, 이 작품은 그의 데뷔작이고, 제1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그 뒤로 다양한 작품을 집필했지만 작가 스스로는 '이 작품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라는 불안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후에도 좋은 작품들이 많았고, 지금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는 이번 개정판에서 현재 시점의 사회적 가치관을 고려해서 단어와 표현들을 고쳤다고 하는데, 사실 내가 처음에 읽었던 것이 초판이었음에도 그런 것들에 대해서 기억하거나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나 역시도 그런 1990년대를 살았던 것이겠지.


그런데 이 책이 1990년대 초중반에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시대적인 배경은 1969년의 봄부터 겨울까지이다. 작가가 1959년생이니 아마 비슷한 나이를 생각하며 (작중 진희는 12살이며 초등학교 5학년이다) 썼을 테지만 그 속에 자전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에피소드들은 대체로 상상의 산물이겠지만 단지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비록 시대의 차이는 있다고 해도 그런 인물들이 우리 주변에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1960년대나 1970년대는 더욱 그랬겠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땐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시대착오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진희의 가족을 비롯해서 할머니댁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방식대로 살고 있고 어찌 보면 안쓰러움마저도 느껴진다. 그러한 개개인의 이야기들이 시트콤처럼 코믹하게 그려지기도 하지만 비극도 담겨 있고, 그 속에는 시대적, 사회적 배경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진희의 시각이 더해진다.


내가 왜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내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것을 의식할 만큼 성장하자 나는 당황했다. 내가 딛고 선 출발선은 아주 불리한 위치였다. 더구나 그 삶은 내가 빨리 존재의 불리함을 깨닫고 거기에 대비해주기를 흥미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차피 호의적이지 않은 내 삶에 집착하면 할수록 상처의 내압을 견디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아마 그때부터 내 삶을 거리 밖에 두고 미심쩍은 눈으로 그 이면을 엿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삶의 비밀에 빨리 다가가게 되었다. 


여기에 몇 개의 연애사가 더해지는데 이는 이모의 연애사, 진희의 연애사이기도 하다. 이모의 연애사는 당시의 연인들의 모습을 상당히 자세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진지하기도, 애틋하기도 하다. 혹자는 그것을 당시의 낭만이자 풋풋함이라고 할 것이다. 반면 영악한(?) 초등학생인 진희의 연애는 어찌 보면 계산적이면서도 결국 자기가 자신을 기만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춘기 여자아이의 심리를 보여준 것이라고는 해도 일반적인 모습은 아닐 것 같은데 그런 냉소와 세상물정 다 아는 것 같은 그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그런 상실감에서 온 것일까?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남기 위해서였을까? 아무튼 현실이 더욱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삶에 거리를 두기 위하여. 그리고 그 속에 '보이는 나'와 자신이 '바라보는 나'가 있었다. '환부'와 '동통'을 분리한 결과다. 그 괴리 속에서 외줄 타기를 했지만 우리가 보기에 결국 아이는 아이였을 따름이다. 현재로 치면 '중2병'의 허세 같은. 


그때 나는 남에게 '보이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킴으로써 진짜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진짜 나가 아닌 다른 나를 만들어 보인다는 점에서 그것이 위선이나 가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꾸며 보이고 거짓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키는 일은 나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작위'라는 말을 알게 된 뒤부터 그런 의혹은 사라졌다. 나의 분리법은 위선이 아니라 작위였으며 작위는 위선보다 훨씬 복잡한 감정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부도덕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아는 어른들의 비밀을 털어놓는 데에 나는 아무런 거리낌도, 빚진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소설의 앞부분과 뒷부분에는 현재의 '나'의 이야기가 있다. 그로부터 약 26년이 지난 나는 30대 후반, 아마 작가가 이 작품을 쓰던 시기와 비슷할 것이다. 그는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삶의 비밀'을 너무 빨리 깨달아 더 이상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본인은 성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럼에도 계속 성장했을 것이고 또 바뀌었을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니까, 인간은 평생에 걸쳐 성장하니까. 그래서 12살 진희의 이야기에는 현재의 나의 이야기와 생각이 뒤섞여 다소 과장된 형태로 나타났을 수도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왜 '새의 선물'일까? 이 작품에서 그러한 제목을 유추할만한 것은 전무하다. 하지만 앞머리에 있는 자크 프레베르의 동명의 시가 그 실마리가 될 것이다. 이 시는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해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 주자 해가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 버렸다는 아주 짧은 시다.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 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 버렸네

 -자크 프레베르, 「새의 선물」 전문


이처럼 작가에게 무언가가 '해바라기 씨앗'이 되었고, 그로 인해 1969년의 자신에게로 돌아가버리게 되었다. 그 씨앗은 아마도 현재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새가 준 그 선물이 자신에게 독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현재의 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그 시절의 나라기보다는 현재의 나다. 그 어린 시절의 감옥으로 들어가게 됐지만 결국엔 그 안에서 다시 밖으로 나와야 한다. 시에서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는 얘기는 없지만 다시 밖으로 나왔을 것이라는 짐작할 수 있다. 그 과정이 아마도 선물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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