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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Jan 13. 2023

신형철 <인생의 역사>


신형철 평론가는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으며, 평론가로 일하면서 문예창작에 대한 강의를 했었다. 그리고 현재는 영어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평론이나 문예창작으로 가는 경우는 많지만 영어영문학으로, 그것도 교수까지 가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일 것이다. 그를 부교수로 임용한 서울대에서도 파격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가 그동안 평론가로서 활동해 온 것과 특히 비교문학, 비평이론 등에 탁월했던 것을 보면 납득이 되기도 한다. 특히 국내 시들뿐만 아니라 외국 시들도 번역하는 작업도 했었고, 영문학에도 두각을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번역한 시들을 읽어보면 기존의 번역된 시들과는 또 다른, 고심의 흔적들이 많이 느껴지니까.


그런데 나는 그의 평론집이나 작품들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유명하긴 했지만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다. 평론 자체를 그렇게 즐기는 편은 아니기도 했었고.


하지만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것은 그의 명성에 대한 기대보다는 책의 제목이 주는 궁금함 때문이었다. <인생의 역사>라니, 이거 평론집 아니었나? 게다가 시들의 평론집인데 말이다.


이 책은 원래 한겨레신문에 연재했던 시평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기고했던 내용을 다듬고, 내용을 추가하고, 부록도 덧붙여서 제법 두툼함 책이 되었다. 그 가운데 대체된 시도 있었다.


시평이라고 했지만 이 책에 대한 소개에서는 '시화'라고 얘기했다. 시에 대한 이야기. 단지 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래서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책을 받고 읽기 시작했을 때, 조금 어려운 듯하면서도 흡입력이 있었다. 한꺼번에 다 읽지는 못했지만 며칠에 걸쳐 짬짬이 다 읽었다. 소개해주는 시 한 편을 읽고, 그에 대한 해설을 읽고 다시 시를 읽었다. 그중엔 그가 처음 번역한 시들도 있다.


소개된 작가는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작품들은 잘 모르는 것들이 많았다. 일부러 그런 작품들을 선정한 것일까 싶기도 했다.


<공무도하가>부터 박준 시인의 작품까지, 고대부터 현대까지, 국내와 외국을 아우르는 그 시간과 공간의 궤적은 이 책의 제목이 왜 <인생의 역사>인지를 깨닫게 해 준다. 


시에는 개개인의 인생이 담겨 있다. 그러한 인생은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모이면 더 큰 역사가 된다. 그래서 이 책의 역사는 개인의 역사도, 사회의 역사도 모두 담고 있다. 우리가 함께 겪었던 그러한 역사들.


'시'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예술이다. 시는 행과 연으로 이루어진다. 걸어갈 행, 이어질 연. 글자들이 옆으로 걸어가면서 아래로 쌓여가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할 게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고 있다. 걸어가면서 쌓여가는 건 인생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생도 행과 연으로 이루어지니까.
...
'시는 직업이 아니라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은 빈 바구니예요. 당신의 인생을 거기 집어넣고 그로부터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죠." (메리 올리버)

이런 생각까진 못했어도 10대 후반의 어느 날부터 시를 좋아했다. 스물몇 살 때 사람들 보라고 처음 어딘가에 연재한 글도 시화를 흉내 낸 것이었다. 이 책에 실린 글은 그때의 것을 닮은, 내 글쓰기의 원형이다. pp.7


이 책에 소개된 시들은 대체로 아픔이 담겨 있다. 5부로 구성된 내용은 '고통의 각', '사랑의 면', '죽음의 점', '역사의 선', '인생의 원'이라는 다소 철학적인 부제들이 붙었고, 부록에도 '반복의 묘'라는 부제를 붙였다. 


거기에는 죽음과 같은 큰 슬픔도, 헤어짐의 아픔도, 인생의 고독과 고통도 담겨 있다. 그러나 그런 내용들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저자의 문장들에서 오히려 아름다움을 느낀다. '아, 그런 것이 인생이었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마음에 와닿는 문장들이 많았다. 발췌해 둔 문장이 너무 많아서 이곳에 다 옮기기도 버겁다. 그래도 몇 문장을 옮겨본다.


'나는 내 뜻대로 안 된다. 너도 내 뜻대로 안 된다. 그러므로 인생은 우리 뜻대로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나는 수천 년 전의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들어본 적 없는 그 먼 노래가 환청처럼 들린다. 나는 백수광부다. 나는 그의 아내다. 나는 곽리자고다. 나는 여옥이다. 나는 인생이다. pp.36
인간은 자신의 불행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견디느니 차라리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 헤매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내 아이가 어처구니없는 확률(우연)의 결과로 죽었다는 사실이 초래하는 숨 막히는 허무를 감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이 모든 일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섭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 살아 있는 자를 겨우 숨 쉬게 할 수 있다면? 신은 그때 비로소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력히 입증하는 증거 앞에서 오히려 신이 발명되고야 마는 역설.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은 인간이 오히려 신 앞에 무릎을 꿇기를 선택하는 아이러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pp.43-44
"일반적으로 말하는 슬픔이란 스스로를 가여워하는 감정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지만 스스로를 가여워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를 용서해야 한다.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든 사람은 쉽게 슬퍼할 수도 없 다. "세상은 '자식 잃은 엄마'를 "슬픔의 상징으로 생각하나, 정작 그녀는 충격과 분노, 무력감과 굴욕감 등에 시달리며 내내 울었을 뿐, 그런 감정과는 다른 '슬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렇구나. 그렇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pp.48
그러므로 단지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진실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 천사가 껴안으면 바스러질 뿐인 우리 불완전한 인간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법 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사랑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자세 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누구도 상대방에게 신이 될 수 없다. 그저 신의 빈자리가 될 수 있을 뿐. pp.90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

이 말과 비슷한 충격을 안긴 것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다음 말이었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저 말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pp.132
긴 인생을 짧게 줄여놓은 파노라마 영상을 볼 때면 으레 눈물이 흘렀다. 이미 살고 난 뒤에 되돌아보면 일생이란 저렇게 짧게만 느껴지겠구나 싶은 안타까움 때문이었을까. 더 근원적인 감정은 어떤 분함에 가까웠다. 일생이란 결국 하루하루가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왜 살고 나서 돌아보면 그 많은 날은 가뭇없고 속절없는가, 왜 우리는 그 나날들을 '충분히' 살아내지 못하는가. 시간을 사는 인간의 이런 종적 결함이 원통해서 눈물이 났던 것일까. pp.234
"개인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느끼는 강렬한 취약함 vulnerability이라는 감각" 때문이다. 태어난다 는 것은 낯설고 위협적이며 통제 불가능한 세계에 내던져진다는 것인데 유아의 육체적 역량은 세계와 맞서기에 턱없이 부족하므로 타인의 보호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연약한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에도 그에 합당한 보호가 제공되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유년기 인간의 의식은 '상처받기 쉬움' (vulnerability를 이번에는 이렇게 옮겨보자)이라는 속성을 갖는다. 그 의식에 제공되어야 하는 것은 내가 세상에 태어날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확신이다. 그러므로 유년기 인간에게 부모와 그에 준하는 존재가 제공하는 육체적·정신적 돌봄의 역할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취약함이 정착감을 갈구하고 정착감이 취약함을 해결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랑을, 더 정확히는 사랑의 필요성을 배운다. pp.275


그리고 부록으로 담긴 글들에선 작가의 개인적인 성향도 좀 더 느낄 수 있었다. 아직 그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글들에 대해서는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시를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도. 


마침 작년을 보내고 올해는 맞이하는 시점에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타이밍도 적절했던 것 같다. 매년 새해가 되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니까. 올 한 해도 잘 보내고, 연말쯤 이 책을 다시 읽어보게 된다면 1년 동안 나는 또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각해 보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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