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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02. 2023

윌리엄 트레버 <마지막 이야기들>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불리는 윌리엄 트레버는 생전에 백 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마지막 단편집인 <마지막 이야기들>은 사후 2년 뒤인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서는 올해 번역본으로 출간되었다.


그의 단편집을 읽어본 것이 처음이라 이 책만으로 그의 작품세게를 논하는 것은 어렵다. 게다가 그가 거진 마지막으로 집필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집에 <마지막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듯하다.


이 단편집에는 총 열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표제와 동명의 단편은 없다. 마지막을 의미하는 듯한 작품들은 여럿 있었지만.


이 단편집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 특히 단편작품들에 대한 찬사의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작품집에서도 그는 인생을 통해 얻어진 성숙한 시각과 절제된 표현력을 통해 삶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죽음을 비롯해서 삶의 많은 비극에 대해서도 그에 굴하지 않고 삶의 균형과 초연함을 유지할 수 있는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또한 작품 속에서 표현된 많은 감정들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흔하게 느낄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 사랑과 아버지의 헌신은 지금 미스 나이팅게일의 고독에 힘이 되어 주고 그녀의 인생에 모종의 형상을 부여하는 추억들이었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제자가 그녀를 위해 연주할 때 그녀가 느끼는 흥분은 현재의 것이었으며, 신선하고 새롭고 강렬했다. 그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어린아이에게서 천재성을 감지한 적이 없었다.
p.10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중에서

그는 그녀의 물건들을 돌려주러 온 게 아니었고, 곧장 걸어 들어와서 피아노 앞에 앉아 그녀를 위해 연주했다. 그 음악의 미스터리는 그가 연주를 마치고 그녀의 인정을 기다리며 지은 미소 속에 있었다. 그리고 미스 나이팅게 일은 그를 바라보며 전에는 알지 못했던 걸 깨달았다. 그 미스터리 자체가 경이였다. 그녀는 거기서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인간의 나약함이 사랑과, 혹은 천재가 가져다주는 아름다움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해하는 데만 너무 골몰했으니까. 균형이 이루어졌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p.17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중에서
애니타는 그 모든 것에서 절박함을 감지한다. 행해진 일들과 남아 있는 것들에서 서두름이 보인다. 그런 생각은 뜬금없이 떠오르지만 계속 남아 있고 처음보다 강해진다. 야윈 얼굴과 성의 없는 화장, 손질하지 않은 머리에 절박함이 들어 있었나? 절박함이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갈망을 부추겨 예기치 않게 카페를 찾아오도록 만들었을까?
p.62 <다리아 카페에서> 중에서

애니타는 늘 앉는 자리에서 폭력 범죄와 힘겨운 사랑, 인간의 나약함과 구원, 고통과 치유에 대한 글들을 읽는다. 가끔 고개를 들면 돌아온 클레어가 보인다. 다른 사람이 될 때까지 잠시 클레어가 거기 있다. 그새 그녀의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은 인사를 거두고, 애니타는 궁금해하며 기다린다. 클레어는 어딘가에 있다. 만일 애니타가 기도를 한다면 클레어가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만일 텔레파시의 비결을 안다면 그걸 써먹었을 것이다.
 p.64 <다리아 카페에서> 중에서


각각의 작품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삶을 누르고 있는 무게들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것들이며 다른 사람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며, 쉽게 바뀔 수는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극복해 가는 것이 삶에 대한 자세가 아닌가. 그러한 것은 비단 작품 속의 인물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이기에, 그에 공감하기도 하고 또 유사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듯하다. 비록 우리는 작품 속에서 그들의 아주 일부분의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지만.


작품들을 읽으면서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도 떠올랐다. 윌리엄 트레버가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여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작품의 주인공들이 느끼는 삶에 대한 성찰이 마치 '에피퍼니'처럼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제임스 조이스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더블린 사람들>에서는 좀 더 심각하고 시니컬하게 사회문제, 정치적인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그리고 결말이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반면 <마지막 이야기들>에서는 좀 더 사람들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좀 더 부드럽다. 그러면서 인물들의 내면을 깊이 파고든다. 그러한 점은 제임스 조이스와도 유사한 면이 있지만 마치 외과와 내과만큼이나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특별한 보고 사항이나 첨가하거나 수정할 내용이 없었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분명하고 명백했으며,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두 남자는 번갈아 전화를 건 후 그 자리를 떴다. 
p.105 <크래스소프 부인> 중에서
해리엇은 울었고,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에 그녀의 정원에 펼쳐진 아름다움이 들어왔다. 그 아름다움은 더 퍼져나가다가 일그러지며 사라졌다. 그녀는 그 아름다움이 돌아오는 걸, 다시금, 전보다도 더 찬란하게 빛나는 걸 지켜보았다. 하지만 모든 게 잘못된 세상에서 그 아침은 하나의 조롱으로 보였다. 
p.129 <모르는 여자> 중에서
그는 자신 역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생각하며 삶을 마감하는 상상을 자신의 옷 속에는 해초가, 눈꺼풀 아래와 입안에는 모래가 들어 있는 상상을 했노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죽음의 드라마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어떤 고통은 낭만의 수의를 입기엔 너무 둔감하다는 걸 자신은 알고 있었다는 것도 고백하지 않을 것이다. 용기가 그 별것 아닌 일에 마법을 걸 수도 있었으나, 용기도 상대방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p.153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중에서


죽음의 과정마저도 격하지 않게 그려진다.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초연하다. 그리고 인물들의 배경 혹은 관계는 자세히 드러나지 않는다. 많은 것들이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진다. 그래서 작품에 몰입할수록,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할수록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될 것 같다. 어쩌면 열린 결말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고.


밤은 서둘러 지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밤이 서두르기를 원하지 않았다. 내일 아버지는 시작한 말을 마무리할 터였다. 그녀가 거기까지 알게 되었으니, 그는 "이 얘기도 해야겠구나"라고 조용히 말할 것이고, 진실을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할 터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진실을 숨긴 걸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해했다. 아버지가 이미 설명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을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고 느낄 테니까. 
p.238 <여자들> 중에서
서실리아는 그걸 알고 있었으며, 그가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기술을 모방했다. 그리고 더 이상 밝혀질 게 없었기에 그의 계속되는 침묵을 허용했다. 그 고독한 여자들은 삶을 조금은 멋지게 꾸며주는 환상을 키웠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어머니 없는 소녀들을 찾아내어 친구가 되려 했다.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들의 모호한 세계, 허세 섞인 감행과 가장 이야깃거리가 되는 드라마에는 짜릿한 흥분이 있었다.
그런 허술한 가정과 짐작이 서실리아의 머릿속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떠나지 않았다. 분명하고 거의 확실한 것에 불안하게 도전하는 그 추정들은 애매하고 미숙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엄연히 존재했고, 서실리아는 마음에 위안을 주는 그 의혹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 
p.240 <여자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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