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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03. 2023

이주란 <수면 아래>


작년 말이었나 올해 초였나, 독파 설문 이벤트에 당첨되어 블라인드북으로 이 책을 선물 받았다. 작은 크기의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라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표지부터 왠지 섣불리 다가서기는 어려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독파 챌린지에 이 책이 올라왔기에 반가운 마음에 신청했다.


생각보다 빨리 읽기는 어려웠다. 문장 하나하나가 다른 중력을 가진 듯했다. 어떤 물건을 가벼운 줄 알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묵직해서 놀란 그런 느낌. 


뭔가 해주지 못한 게 너무 많아서 그런 미안한 마음을 씻 고 싶었는데, 말하자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일을 더 열심히 하면 좋은 사람이 될 줄 알았어요.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 몇 년 을 그렇게 달려오다가 어느 날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는데 아 니. 여기가 어디지? 집까지 가는 길이 너무 먼 거예요. 그날따라 그 길이 왜 그렇게 길었는지 노래를 부르며 아무리 걸 어도 도대체 집이 가까워지질 않더군요. 집이, 너무......  p.101
네. 나으려고 그랬나 본데 전 그걸 못 참고 또 떼어내고 말 았어요. 하루만 참아보자. 했지만 몇 시간 지나면 또 딱지가 생겼는지 확인해 보고 떼어내고, 또 확인해 보고 떼어내고요. p.115
네. 그걸 건드리지 않으면 안 아픈데 왜 자꾸 건드렸을까. 그게 궁금해요. 떼어낼 땐 시원하지만 금세 다시 아플 거란 걸 아는데요.
알지만 그게 잘.
네, 잘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되지 않았어요.  p.116
어머니는 그 깨가 눈에 들어온 순간에 겨우 안도감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해인씨가 그래도 깨를 뿌린 음식을 한 번은 먹었구나. 깨라는 건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안 뿌리려면 안 뿌릴 수 있는데, 깨를 뿌릴 마음이 남아 있구나. 그도 아니라면 해인씨가 뿌렸든 남이 뿌렸든 어쨌든 깨를 뿌린 음식을 먹긴 했구나. 잠시나마 안도했다는 것. 집에 가서도 얼마간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방 한구석에 떨어진 깨를 생각하며 너무 걱정하지 않으려고, 아니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이야기. 깨라니. 그 얘길 전해 들으면서 어쩐지 시시하다 생각했고 참 슬펐습니다. 저는 시시한 것들을 사랑하고 시시한 것은 대체로 슬프니까요. p.124


이후 이주란 작가님이 출연하신 독파 줌토크에 참여해서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 줌토크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사실 이 작품은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되었던 것을 거의 반 정도로 줄여서 단행본으로 낸 것이라고 한다. 비록 과거의 내용을 위주로 삭제했다고 하지만 그 밀도는 더 높아져서 중력도 더 커진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슬픔'을 다루고 있다. 슬픔은 늘 무거운 주제다. 그중에서도 부모로서 가장 큰 슬픔이라면 더 그렇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하지만 나는 슬픔을 나누면 더 커진다고 생각한다. 더 증폭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 <수면 아래>이지만 사실은 수면에서 출렁이는 물결이라고 생각된다. 작품 전반적인 느낌처럼 잔잔하지만 그렇다고 고요하지는 않은 물결.


즐겁겠다.
근데 슬퍼도 괜찮아요.
왜 슬퍼도 괜찮아?
슬퍼도 괜찮으니까요. p.181
그렇구나. 내가 아른거리는구나. 아마도 볼 수 없으니까 아른거리는 거겠지. 아른거린다는 건 그런 거지. 볼 수 없다. 서로 거기에 있으니까. 나는 거기에 없고 너는 여기에 없으니까.라고 생각하며 몸을 움직였다.  p.190
나는 우리가 모르겠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왔구나, 그걸 알게 되었어.
안다고 생각될 때, 더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너무 두려웠는데 모르겠다고 말하면 두려움이 조금 옅어지곤 했던 것 같아.
그런 채로 살아왔고 이런 채로 살 것 같아. 무언가를 단언하는 게 너무나도 두렵지만. p.195


또 어느 부분에서는 수면에서 좀 더 깊은 부분까지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래'라는 단어에는 하한이 없고 상한만 있기 때문에 그 수면 아래에서는 모두가 마찬가지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표면에서는 빛이 느껴지지만 심연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 이 책은 슬프면서도 수면에서 반짝이는 윤슬이 수면 아래까지 전달되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의 주인공인 해인도 아마 그러한 과정을 겪지 않았을까 싶다. 더욱이 그의 주변 인물들은 해인의 그러한 파동을 상쇄시키는 역할을 하는 듯싶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해동중고'라는 그의 직장이 의미하는 것은 비록 중고여도 손질을 하고 깨끗이 씻어내면 새로운 쓸모가 생긴다는 것일까. 과거의 아픔, 슬픔도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겠지만 그것도 시간의 흔적만을 남기고 재생을 할 수 있을까.  우경과 해인 중에서 누가 더 그러한 쪽에 가까운 결정을 한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한강 작가님이 생각났고, 또 박영 작가님도 떠올랐다. 그렇게 슬픔을 이야기하는 작가들과 작품들을 떠올렸는데 비슷한 듯하면서도 차이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은 슬픔이 가진 보편적이면서도 다른 속성 때문이겠지. 모든 슬픔은 같으면서도 또 다르고, 어떤 슬픔은 또 어떤 슬픔보다 더 크기도 하니까.


책을 다 읽고 줌토크를 보고 나니 놓친 부분들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회 되면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 그때의 느낌은 어떠할까?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요즘 나는 우리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야만 자유로워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냥, 난 우리가 괜찮았으면 좋겠어. 각자의 자리에서, 많은 순간에, 정말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지금 내게 남은 마음은 그것뿐이라고, 구도심을 향하는 버스 안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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