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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04. 2023

존 윌리엄스 <스토너>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이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중세 문헌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문헌은 지금도 희귀 서적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영문과 교수 윌리엄 스토너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동료들이 미주리 대학 도서관에 기증.”


<스토너>를 7년 만에 다시 읽었다. 7년 전의 나는 40대 초반이었고, 지금은 4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다. 아마도 스토너가 대학에서 일련의 사건을 겪었던 시기가 40대 정도였으니 그때부터 지금의 나까지의 시기와 비슷할 것이다.


7년 전에 읽었을 때도 나와 비슷한 점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었다. 스토너에게 이입이 많이 되었다. 물론 그에게 모든 것을 동조할 수는 없었다. 답답한 부분도 있었고, 의아한 부분도 있었으니. 하지만 이해는 됐다. 작가는 그걸 이해시키기 위해 그렇게 건조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 나갔겠지.


다시 읽어본 느낌도 그때와 많이 다르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스토너에게 이입이 덜 되었다. 내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사실 그때와 나는 크게 달라진 건 없는데.


한 달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그는 침묵을 배웠으며, 자신의 사랑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가 애정을 담아 그녀에게 말을 걸거나 몸을 만지면, 그녀는 그를 외면하고 내면으로 숨어 들어가 아무 말 없이 견디기만 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 동안 전보다 한층 더 힘들게 새로운 한계까지 자신을 혹사했다.
이렇게 꾸민 끝에 서재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비밀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지 하나가 묻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훌륭한 교사가 아니었음을 스스로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신입생들에게 처음 영문학을 가르치면서 허둥거리던 그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영문학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강의실에서 전달하는 내용 사이에 커다란 틈이 있음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 그때는 시간이 흘러 경험이 쌓이면 그 틈이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가장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감정들이 강의에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생기가 넘치던 것들이 그가 하는 말속에서 시들어버렸고, 그에게 가장 감동을 주었던 것들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처럼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자각 때문에 너무 고민한 나머지 이제는 그 고민이 습관이 되어 구부정한 어깨만큼이나 그의 일부가 되었을 정도였다.


그의 삶에 대해서 평가를 하긴 어렵다. 단순히 성공적인 삶인지, 실패한 삶인지 그런 구분이 의미가 없으니까. 내가 보기에 그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가 교수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를 하고, 가정과 대학에서 주변사람들에게 시달렸을지라도 그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차이였던 것 같다. 예전에 나는 내가 그런 삶을 살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하지만 조금의 시간을 더 보내고 나서 나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와 나를 분리해서 볼 수 있었기에 이입이 덜 되었을 수도 있겠다.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압도적일 정도로 단순해서 대처할 수단이 전혀 없는 문제가 점점 강렬해지는 순간에 도달했다. 자신의 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그의 생각에는 그런 것 같았다). 문제의 의문이 지금 자신이 직면한 가장 뻔한 원인, 즉 자신의 삶에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나이를 먹은 탓에, 그가 우연히 겪은 일들과 주변 상황이 강렬한 탓에, 자신이 그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탓에 그런 의문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는 보잘것없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들 덕분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느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無)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한 사람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다 어떤 순간은 좀 더 자세하게 확대해서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회랑의 미술작품들을 돌아보다가 어느 작품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 것처럼. 그러나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뭔가 할 얘기가 더 있었을 텐데, 작품 속에 숨겨진 어떤 것이 아직 있는 것 같은데.. 이번에도 찾진 못했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산 한 사람의 일대기. 단지 그 표현으로는 부족하겠지만, 거기에 무엇을 덧붙일 수 있을까?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인생책으로 꼽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 이유를 들어보고 나서 다시 책을 읽어볼까 싶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그의 의식 가장자리에 뭔가가 모이는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좀 더 생생해지려고 힘을 모으고 있었지만, 그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자신이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원한다면 그들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그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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