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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04. 2023

오스카 와일드 <캔터빌의 유령>


그러나 아서 경을 사로잡은 것은 고통이 주는 불가사의가 아니라 고통이 주는 희극이었다. 고통의 절대적인 무익함, 황당한 무의미, 바로 그것이었다. 모든 것이 얼마나 모순되어 보이는지! 어쩌면 그렇게도 부조화 일색인지! 아서 경은 낮에 지녔던 천박한 낙관주의와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의 괴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아직 너무도 젊은 나이였다.


오스카 와일드.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대표작이 뭐가 있는지는 잘 몰랐다. 그래서 <캔터빌의 유령>이라는 이 책을 읽게 되었을 때는 그가 미스터리나 스릴러, 공포물 작가라고 생각했다. 제목이나 표지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이 책은 장편소설이 아니라 단편집이었다. 일단 거기에서 한 번 당황. 사실 당황할 것은 없었다. 이 책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고, 밀리X독파를 계속해오던 터라 으레 신청했던 것이니 어떤 책을 읽게 되더라도 흥미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꽤 여러 편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었고, 산문시도 있었다. 앞부분의 이야기들은 예상대로 약간 미스터리물의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읽다 보니 미스터리보다는 블랙코미디, 풍자 같은 느낌이 더 들었다. 다소 어이없기도 하고, 킥킥거리게 되기도 하는 이야기들. 


약간 제임스 조이스 같은 느낌도 들었는데 그도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아일랜드 출신 작가여서 그랬을까? (제임스 조이스가 좀 더 이후이기에 그가 오스카 와일드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아무튼 몇 편씩 묶인 이야기들을 읽어 나가다가 "행복한 왕자와 그 밖의 이야기들"을 읽을 때는 '어, 이거 아는 이야기인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 수록된 이야기들은 대부분 어릴 때 혹은 이후에 동화로 읽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동화치고는 조금 현실적이고 잔인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제비는 행복한 왕자의 입술에 키스하고, 왕자의 발치에 떨어져 숨을 거두었다. 그 순간 동상 안에서 이상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마치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바로 왕자의 납 심장이 정확히 두 조각난 것이었다. 정말이지 지독하게 차가운 서리가 내린 날이었다.
“사랑이란 얼마나 어리석은지.” 학생은 걸어가며 말했다. “논리학의 반만큼도 쓸모가 없어. 그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언제나 일어나지 않을 것들을 이야기하고, 진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들잖아. 정말이지 사랑은 아무 쓸모가 없어. 사실, 지금 같은 시대에는 실용적인 게 제일 중요해. 난 다시 철학으로 돌아가서 형이상학이나 공부해야겠다.”

그래서 학생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 먼지투성이인 두툼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W.H. 씨의 초상화"도 어디선가 단편집으로 읽어본 적이 있었고, "석류나무집"에 수록된 단편 중에 몇 편도 이미 읽어본 적이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들 중 일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작가의 이름과 작품들을 연결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제야 작가와 작품들이 매칭되었다. 


나는 특히 "석류나무집"에 수록된 이야기들이 좋았다. 동화스러우면서도 너무 동화 같지는 않은, 오스카 와일드의 스타일이 드러나는 이야기들. 대부분은 새드엔딩이고, 그 가운데 자아나 정체성을 찾는 것들도 있지만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교훈들도 곁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읽기에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성인들에겐 권할만하겠다.


그가 마지막에 했다는 말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또 다른 세기가 시작되고, 그러고도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그건 정말로 영국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될 겁니다. 그러니 나는 지금 분수에 넘치게 죽어갑니다. 지금껏 분수에 넘치게 살아온 것처럼.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더 많은 작품들을 남길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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