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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22. 2023

에드워드 윌슨 <통섭> #1

서문~2장 학문의 거대한 가지들


*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연재로 올리려고 합니다. 이 게시물은 제가 ebook카페에서 진행했던 '알쓸통잡'이라는 함읽 소모임에서 발제글로 올렸던 글을 정리한 것이며, 게시물 성격에 맞게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통섭> 연재는 총 10회에 걸쳐서 올릴 예정입니다. 각 회차는 함께읽기 1주일분의 분량에 해당합니다.


<통섭>의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차수별로 챕터의 제목을 제시할 예정이므로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문
1장 이오니아의 마법
2장 학문의 거대한 가지들
3장 계몽사상
4장 자연과학
5장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6장 마음
7장 유전자에서 문화까지
8장 인간 본성의 적응도
9장 사회과학
10장 예술과 그 해석
11장 윤리와 종교
12장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1주차는 서문부터 2장까지 읽는 것으로 했었죠. 분량은 많진 않았지만 이 책에서 어떤 얘기를 하려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윌슨 교수님께서 이 책의 주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다음과 같아요.


이 책의 주제는 한마디로 지식이 갖고 있는 본유의 통일성이다. 지식은 과연 본유의 통일성을 지니는가?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을까 싶다. 나는 이것이 철학의 중심 논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역자서문에서는 오랜 고민을 통해 '통섭'이라는 단어를 선택하게 된 얘기도 있었죠. 그 한 단어를 위해 1년 넘게 자문을 구하고 찾아보신 노력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그 후 1년이 넘는 서캐훑이 끝에 찾은 단어가 바로 ‘통섭’이다. consilience와 마찬가지로 웬만한 크기의 우리말 사전에는 적혀 있지도 않은 희귀한 단어다. 서로 한자가 다른 두 가지의 통섭(通涉 또는 統攝)을 생각할 수 있다. 전자(通涉)는 “사물에 널리 통함”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후자(統攝)는 불교와 성리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어이며 특히 원효의 화엄 사상에 대한 해설에 자주 등장한다. 조선 말기 실학자 최한기의 기(氣)철학에도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다. (...) 통섭은 대만 중화 학술원에서 펴낸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과 일본 학자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가 편찬한 『한화대사전(漢和大辭典)』에 비교적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큰 줄기’ 또는 ‘실마리’라는 뜻의 통(統)과 ‘잡다’ 또는 ‘쥐다’라는 뜻의 섭(攝)을 합쳐 만든 말로서 ‘큰 줄기를 잡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삼군(三軍)을 통섭하다.”는 경우와 같이 ‘통리(統理)’ 즉 ‘장관’이라는 뜻을 지닌 정치 제도적 용어이기도 하다. 그럴 경우에도 그 뜻은 “모든 것을 다스린다.” 또는 “총괄하여 관할하다.”이므로 그런대로 잘 들어맞는 것 같다. 사실 윌슨은 “사물에 널리 통하는 원리로 학문의 큰 줄기를 잡고자”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니 그의 consilience에는 전자(通涉)와 후자(統攝)의 개념이 모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말로 ‘통섭’이라고 할 때에는 구태여 이 둘을 구별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혼동을 줄이기 위해 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여담으로, 역자인 최재천교수님은 '통섭학자'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정작 본인은 '통섭'은 학문의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통섭학자'라는 표현 자체는 틀린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이자 주제인 '통섭'은 과연 뭘까요? 이 책 전반에서 그 얘기가 나오지만 그것을 알고 넘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문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에드워드 윌슨은 이런 학문의 미래를 설명하기 위해 19세기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의 ‘consilience’ 개념을 부활시킨다. 1840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귀납적 과학의 철학(The 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에서 휴얼이 처음으로 사용한 ‘consilience’라는 용어는 아마 라틴어 ‘consiliere’에서 온 것 같은데, 여기서 ‘con-’은 영어로 ‘with’, 즉 ‘함께’라는 뜻을 갖고 있고 ‘salire’는 ‘to leap’, 즉 ‘뛰어오르다’ 또는 ‘뛰어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휴얼은 consilience를 한마디로 ‘jumping together’, 즉 ‘더불어 넘나듦’으로 정의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서로 다른 현상들로부터 도출되는 귀납들이 서로 일치하거나 정연한 일관성을 보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휴얼은 우리에게 ‘scientist’, 즉 ‘과학자’라는 용어를 선사한 사람이기도 하다.


저는 함께읽기를 위해 먼저 이 책을 다 읽었는데요, 제가 생각하는 '통섭'은 학문의 통합을 위한 '수단'이자 '목표'였습니다. '통섭적인 방법으로 통섭을 이룬다'는게 말장난 같기도 하지만 그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는 듯했거든요.


'환원주의'라는 조금 어려운 단어도 등장합니다. 이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서도 보편화된 방법론적 용어인데요, 복잡한 문제를 더 낮은 레벨로 나누어 개별적으로 고찰하고, 이를 다시 결합함으로써 전체를 파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작은 요소로 나누다 보면 그 단계에서는 다른 학문 분야도 개입될 여지가 많아지죠. 예를 들어 어느 동물의 기관의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선 생화학, 분자생물학이 필요할 수도 있고, 화학의 설명을 위해선 또 물리학이 필요하게 되는 그런 거죠.


이 환원주의는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그 의미 자체는 통섭과 상반되는 것이지만, 윌슨 교수님은 종종 환원주의적 입장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 얘기도 서문에 함께 나와 있죠. 이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관련된 얘기가 나올 때 보다 자세히 나눠보도록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더와 로티를 비롯한 몇몇 인문·사회과학자들이 윌슨의 통섭 개념을 불편해하는 까닭은 윌슨의 통섭이 다분히 환원주의적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윌슨은 이 책의 곳곳에서 분석과 종합을 한데 묶어 통섭을 이룰 것을 주장하지만 기본적으로 환원주의적인 입장을 부인하지 않는다. (...) 그러나 환원주의와 통섭은 태생적으로 상반되는 개념이다. 환원주의는 통섭적 연구를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일 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통섭적 연구가 다 환원주의적으로 이뤄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강의 유비’ 대신 ‘나무의 유비’를 제안한다. 나무는 줄기를 가운데 두고 위로는 수많은 가지와 이파리로 분화되어 있고 땅 밑에도 역시 많은 뿌리로 갈라져 있다. (...) 나는 뿌리와 가지를 연결하는 줄기가 통섭의 현장이라고 생각한다. 줄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물관과 체관은 돌아오지 않는 강이 아니다. 나는 통섭이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 영향적이기를 바란다. 통섭은 분석과 종합을 모두 포괄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윌슨이 그리고자 한 통섭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환원주의의 흔적이 군데군데 그림을 흐릿하게 하고 있다.


학문의 통합이라는 개념은 1장에서 '이오니아의 마법'이라는 표현으로 제시되었고,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시도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기반은 '세계가 어떤 법칙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믿음인데요, 그 믿음은 종교와 자연과학으로 갈라져 나갔습니다. 종교와 과학은 둘 다 이 세상의 법칙을 설명하려는 시도였지만, 종교는 과학을 포섭하려는 반면 과학은 종교를 포함하지 않고 지식의 통일을 통해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하는군요. 그 해방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싶습니다.


그러한 지식의 통합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문과 그에 대한 답은 2장 '학문의 거대한 가지들'에서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통섭'이 처음 등장하죠.


통섭(統攝, consilience)은 통일(統一, unification)의 열쇠이다. 나는 이 용어를 ‘정합(整合, coherence)’보다 더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통섭은 정합의 다양한 의미들 가운데 하나만을 뜻할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통섭이라는 용어는 그 희귀성 때문에 그 의미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용어는 윌리엄 휴얼이 1840년에 『귀납적 과학의 철학』이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설명의 공통 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귀납의 통섭은 하나의 사실 집합으로부터 얻어진 하나의 귀납이 다른 사실 집합으로부터 얻어진 또 하나의 귀납과 부합할 때 일어난다. 이러한 통섭은 귀납이 사용된 그 이론이 과연 참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시험이다.”라고 말했다.


저자는 그러한 통섭을 자연과학에서 확장하여 사회과학, 인문학, 문화와 예술까지 통합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러한 내용이 이 책의 전반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러나 자연과학분야, 특히 물질적인 면에서는 통섭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사회과학과 인문학 분야는 아직 요원해 보이고, 특히 형이상학적인 면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철학의 경우에는 그러한 과학자들의 시도에 대해 조롱하듯 얘기하고 있죠. (어쩌면 반대로 철학에 대한 자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저명한 철학자인 알렉산더 로젠버그(Alexander Rosenberg)는 최근 철학이 단지 두 가지 질문만을 다룬다고 주장했다. 그중 하나는 과학이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이 왜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없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는 “장기적으로는 모든 사실들이 알려져서 결국 과학이 답할 수 없는 물음이 존재하지 않게 될 수도 있을 테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런 물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위의 얘기도 점차 틀린 것이 될 수도 있겠지요. 윌슨 교수님은 철학이 과학과 융합할 것이라는 얘기도 하니까요. 앞으로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두 분야로 통합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인문학이 별도의 영역으로 잔존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통합이 나아갈 방향, 혹은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정말로 지식의 통섭을 장려하게끔 작동한다면 나는 문화의 영역도 결국에는 과학, 즉 자연과학과 인문학 특히 창조적 예술로 전환될 것이라고 믿는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21세기 학문의 거대한 두 가지가 될 것이다. 반면 사회과학은 계속해서 세분화되면서 그중 어떤 부분은 생물학으로 편입되거나 생물학의 연장선 위에 있게 될 것이며 그 밖의 부분들은 인문학과 융합될 것이다. 사회과학의 분과들은 계속해서 존재하겠지만 결국 그 형태는 극단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런 와중에 철학, 역사학, 윤리학, 비교종교학, 미학을 아우르는 인문학은 과학에 접근할 것이고 부분적으로 과학과 융합할 것이다. 나는 다음 장들에서 이런 주제들에 대해서 자세히 논의할 것이다.


그런데 통섭을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요? 이를 위해선 단지 분과를 개별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연결하고 통합하는 것이 필요한데요, 학문들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고 지식의 다양성과 깊이가 추구되다 보면 그 자체가 가진 응집력으로 인해 자연스레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균형 잡힌 관점은 분과들을 쪼개서 하나하나 공부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분과들 간의 통섭을 추구할 때만 가능하다. 그런 통합은 쉽게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 통합은 진리의 울림이다. 통합은 인간 본유의 충동을 만족시켜 준다. 학문의 커다란 가지들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는 만큼 지식의 다양성과 깊이는 심화될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학문들의 기저에 존재하는 응집력 때문이다. 이런 기획은 다른 이유 때문에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성에 궁극적인 목표를 주기 때문이다. 저 수평선 너머에 넘실거리는 것은 혼돈이 아니라 질서이다. 그곳으로 모험을 떠나는 일을 어찌 망설일 수 있겠는가.


김상욱교수님의 저서 <떨림과 울림>에는 물리학적으로 '떨림'은 '진동'이며, '울림'은 '공명'이라고 합니다. '진동'은 혼자 떨리는 것이고, '공명'은 다른 떨림의 영향으로 함께 떨리는 것이죠. 그러므로 위의 인용구에서 '진리의 울림'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혼자 떨리는 진동이 아니라 함께 떨리는 공명이라는 것을 의미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저는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통해 여러 분야를 공부했고, 현재도 이를 융합적으로 적용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다양한 전공을 이수했지만 정작 그 가운데 뭘 가장 잘 아는지는 내세우기 어려운 약점도 있고요. 사실 학부과정부터 좀 그러긴 했습니다. 한 분야가 다른 분야에 적용되고, 그것을 위해 또 다른 지식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분화된 지식들 간의 접목일 뿐 통합은 아니었는데 저는 스스로를 '융합형'이라고 생각해 왔던 듯해요. 여러 분야를 안다고 해서 통섭적인 것은 아니었던 거죠. 그러한 가운데 저의 지식체계를 아우르는, 기저를 관통하는 핵심은 무엇일까 고민해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좀 어려우셨나요? 아직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감이 좀 안 잡힐 수도 있는데요, 3장에서는 이제 학문의 통합을 위한 여정이 시작됩니다. 2장까지는 그것을 위한 워밍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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