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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22. 2023

에드워드 윌슨 <통섭> #3

4장 자연과학


3주차는 '4장 자연과학'입니다. 분량이 많지 않아서 부담은 크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자연과학은 3장에서도 언급된 바가 있습니다만,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전개였어요. 즉, 과학사처럼 여러 과학자들의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런 얘기는 별로 없고 과학이라는 학문의 특성, 그리고 과학자들이 가져야 할 소양 등을 위주로 얘기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통섭'이라는 것이 과학자들이 가져야 할 소양에도 포함되기 때문에 그렇게 진행된 것이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만, 자꾸 변화구를 던지시는 윌슨 교수님으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스트라이크를 당하고 있네요.


우선 앞부분에서는 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과학은 철학도 아니고 하나의 신념 체계도 아니다. 과학은 실제 세계를 탐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과학은 우리가 역사적 전환을 통해 우연히 발견한 계몽의 문화이며 교육받은 사람들의 습관이 된 정신 작용의 복합체이다.


그러면서 인간이 어떻게 과학이라는 체계를 쌓아 올릴 수 있었는가에 얘기를 하고 있죠. 진화의 결과물인 인간의 뇌는 사실 자연에서 생존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그 이상의 부차적인 것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게 과학 혁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단 여기에서는 역사의 산물인 자연과학이 얼마나 특이한 것인지를 말함으로써 그 문제를 다소 완화하려 한다. 인류가 진화의 투기장(鬪技場)에서 만난 세 가지 조건 혹은 세 번의 행운이 과학 혁명을 만들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창조성과 끝없는 호기심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우주의 본질적 속성들을 추상화하는 능력을 타고났다는 것이었다. (...) 세 번째는 물리학자인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가 언젠가 말했듯이 수학이 자연과학에 놀랍도록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두뇌와 감각 체계는 인간의 유전자를 보존하고 배가시키는 생물학적 장치로서 진화했다. 그러나 우리는 물리 세계 중 아주 작은 영역에서만 돌아다닐 수 있도록 진화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해 있던 니치는 모든 종류의 감각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험 과학은 이런 장애를 제거해 주었다. 하지만 과학은 기구를 통한 감각 능력의 확장 그 이상이다. 과학은 자료를 해석하는 이론을 개발함으로써 실험 도구를 통해 향상된 감각 경험을 합리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동의하시나요? 저는 동의하는 편입니다.


윌슨 교수님은 성공적인 과학의 예시로 진화론과 양자전기역학을 들고 있습니다. 특히 양자전기역학 이론의 정확성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고 있죠. (생물학자 맞나요? ㅋ)


그러한 것은 단지 그 이론들이 뛰어나서만은 아니라 수많은 실험과 문제 제기들을 거쳐 검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혹독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것이죠. 그러면서 '오컴의 면도날'이 언급됩니다. 많이 들어보셨을 용어인데요, 쉽게 얘기하자면 '간단할수록 좋다'는 의미입니다. 위대한 발견들일수록 단순해 보이는 것은 그러한 아름다움의 극치랄까요.


그러면서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는 첫째 기준은 반복 가능성이다. (...) 둘째 기준은 경제성이다. 과학자들은 가장 많은 정보를 가장 적은 노력으로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정보를 추상화하고자 한다. (...) 셋째 기준은 측정이다. 만일 어떤 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척도에 따라 적절히 측정될 수 있다면 그에 대한 일반화는 명확해진다. 넷째 기준은 발견 기법이다. (...) 마지막으로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가르는 다섯째 기준은 통섭이다. 즉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여러 설명들을 서로 연결하고 일치시킬 수 있을 때 가장 경쟁력 있는 설명이 된다.


여기에서도 통섭이 튀어나옵니다.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에 통섭이라니, 언뜻 와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이에 대해서 그는 과학 이론은 통섭의 가능성이 있어서 다른 분야와 서로 연결되며, 파급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사이비 과학은 그러한 기능을 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다음에 등장한 환원주의!! 앞서 환원주의가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지만 어떤 것인지 여전히 뜬구름 잡는 듯했는데요, 여기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환원주의의 일반적인 작동 방식을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했죠.


과학의 최전선에는 언제나 자연을 자연적 구성 성분으로 쪼개는 환원주의가 있다. (...) 환원주의는 다른 방도로는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복잡한 체계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채용된 탐구 전략이다. 궁극적으로 과학자들을 흥분시키는 것은 복잡성이지 단순성이 아니다. 환원주의는 그 복잡성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환원주의 없이 복잡성을 추구하면 예술이 탄생하지만 환원주의로 무장하고 복잡성을 탐구하면 그것은 과학이 된다.


하지만 환원주의에서도 분해와 분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종합과 통합의 능력을 단련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결국에는 근원적 문제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더 큰 조직을 작은 부분들로 나누는 작업 뒤에는 환원주의의 개념적 쟁점이 숨어 있다. 각 조직의 수준에서 잘 통하는 법칙과 원리를 더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조직 수준의 법칙과 원리로 환원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 중 가장 강한 형태는 완전 통섭(total consilience)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자연은 물리학의 단순한 보편 법칙에 따라 조직되어 있고 모든 다른 법칙과 원리가 결국에는 이 법칙으로 환원된다.


통섭이 또 등장했습니다. 환원주의에서도 그것을 통합할 수 있는 수단이자 그것이 가능하게 뒷받침하는 것이 통섭이라는 얘기겠죠.


과학적 방법론을 이야기하다가 주제는 과학자들로 넘어갑니다. 과학자 집단으로, 그리고 개별적 과학자들로요. 이 부분의 이야기는 윌슨 교수님의 다른 저서인 <젊은 과학도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과 유사한 것 같아요.


저는 예시로 드는 내용들을 보며 무늬만 과학자로서 많이 찔리기도 했는데요,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들은 극소수의 과학자들에게 해당되는, 본인과 같은 업적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라 멀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죠. 과학자들의 대부분은 '직업으로서의 과학자'일 따름이니까요. 그래도 뭘 말씀하려는 것인지는 알겠습니다. (자꾸 그렇게 팩폭 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ㅠㅠ)


즉 나는 우리가 객관적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기준을 경험적 탐구를 통해서 얻을 수도 있다. 이것을 위해서는 우리가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한 정신 작용들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과 과학의 속성처럼 굳어진 단편적 접근을 향상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3장에서도 그랬듯 4장에서도 여러 얘기로 뛰어넘는 것 같아요. 과학자들의 태도를 꾸짖으시다가 갑자기 인간의 마음을 그냥 스치듯이 언급하셨고, 실증주의와 실용주의, 특히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얘기로 넘어갑니다.


이쯤 되면 이 책은, 특히 이번 장은 자연과학에 대한 얘기인지 아니면 또 철학에 대한 얘기인지 헷갈립니다.


하지만 논리실증주의에 대해 얘기한 것은 객관적 진리의 추구와 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인간이 과학혁명을 이룰 수 있었던 세 번째 조건이 수학이 도구로서 유용했다는 것이었죠.


수학은 자연과학을 매우 효율적으로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객관적 진리의 궁극적 목표를 똑바로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관찰과 추상적인 수학 이론이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에서 톱니바퀴처럼 딱 들어맞는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20세기의 이런 위대한 승리는 인간 두뇌의 타고난 능력에 대한 새로운 확신을 고취시켰다.


하지만 논리실증주의는 인간의 두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간과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창조적 사고'의 필요성을 얘기하죠. 허버트 사이먼이라는 노벨상 수상자 (검색해 보니 197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네요)의 말을 인용하여 '창조적 사고를 위해서는 박학, 강박 관념 그리고 대담성이 필요하다'고도 얘기합니다. 그러한 덕목이 과학자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의미겠지요.


마지막 부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합니다.


만일 개념 형성의 생물학적 과정이 정확히 이해된다면 우리는 뇌와 뇌 밖의 세상을 탐구하기 위한 더 나은 방법들을 고안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사건, 자연법칙 그리고 사고 과정에 대한 물리적 기초 간의 연결을 단단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마지막 단계로 넘어가 객관적 진리에 대한 확고한 정의를 내릴 수도 있을까? 아마도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은 그 개념 자체가 위험스럽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절대주의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 객관적 진리에 대한 확고한 정의를 섣불리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저는 이것을 '개념 형성의 생물학적 과정'에 대한 이해가 통섭의 전제조건이라는 밑밥을 까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객관적 진리에 대한 확고한 정의를 내리지는 못할 거라고 했죠. '절대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이유였는데요, 결국 생물학이 가장 중요한 키를 가지고 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지는 말라는 의미로도 여겨집니다.


이번 장도 정리가 쉽지 않았습니다. 얼마 안 되는 분량을 정리하고 그 안에서 통섭을 이뤄내는 것도 버거운데 과연 학문들 간의 통섭을 이루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회의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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