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칼란드리아 Aug 22. 2023

에드워드 윌슨 <통섭> #4

5장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앞서 3장과 4장에서는 계몽사상과 자연과학이 왜 등장하게 되었고,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그 의의와 한계도 알 수 있었죠. 여기까지가 이 책의 1/4 정도 되는 지점인데 아직까지는 이것들과 통섭이 어떤 관계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5장의 부제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인데요, 이 부분은 그리스신화를 아시는 분들이라면 그 의미를 금방 눈치채셨을 것 같아요. 아래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학문 분과들 간의 통섭적 가로지르기'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미로에 갇혀 있고, 어디론가 이동할 때 길을 헤매지 않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 '실타래'인 것이죠. 드디어 통섭에 대한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오려나 봅니다.


그렇다면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무엇일까? 그것은 학문 분과들 간의 통섭적 가로지르기를 상징한다. 그리고 테세우스는 인류이며 미노타우로스는 우리 자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비합리성이다. 경험 지식의 미로 입구에는 물리학이 한 통로를 차지하고 있고 그다음에는 모든 탐구자들이 따라가야만 하는 몇몇 통로들이 갈라져 있다. 깊은 안쪽에는 사회과학, 인문학, 예술 그리고 종교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 만일 인과적 설명들을 이어 주는 실타래가 잘 풀려져 있다면 어떤 통로에서든 되돌아올 수 있다. 예컨대, 행동과학을 거쳐서 생물학, 화학 그리고 물리학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신화에서는 그 실끝이 미로의 출구에 연결되어 있고,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르스를 죽인 후 다시 출구로 나올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지만 학문의 미로에서는 어딘가 시작점을 놓고 헤맬 뿐 그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즉, 그 미로에서 헤매다 원래의 자리, 원래의 문제로 돌아오는 것인데 헤매기 전과 후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 신화를 비유로 들려는 목적은 알겠지만 애초에 미로라는 설정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래서인지 저자는 그 미로가 마치 가지가 뻗어 나가듯이 만들어져 있다고 가정했는데요, 미로보다는 마치 동굴과 같아 보입니다. 동굴의 입구에서 들어가서 갈라지는 길이 있고, 또 그것이 무한히 갈라지는 거죠. 갈라진 끝점 (막다른 길)에서 입구로 가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입구에서 어느 특정한 가지 끝을 찾아가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렵습니다. 마치 사다리 타기에서 특정 지점을 찾는 것을 바로 알기 어려운 것처럼요.


그 두 가지 방향을 각각 '환원을 통한 통섭(가지 끝에서 입구로 가는 것)'과 '종합을 통한 통섭(입구에서 가지 끝으로 가는 것)'으로 구분했는데, 저자는 환원주의와 통섭을 구분하기 위해서인지 환원주의에서 종합하는 부분을 계속 별도로 구분하고 있네요.


이 부분에서 약간 혼동이 올 수 있는데 환원주의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그 가지 끝에는 가장 단순한 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가장 복잡한 문제가 들어 있고, 입구 쪽에 가장 단순한 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입구 쪽에 물리학이 있고, 가지 끝에 생물학적 문제가 있는 거죠.


그러면서 본인이 했던 개미의 페로몬 연구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연구에서 집단으로서의 개미의 생태 관찰로부터 페로몬 분자구조의 규명까지 이어진 얘기를 하고 있죠. 그러한 각기 다른 수준에서 생물학, 화학, 물리학들이 적용되었지만 반대로 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나아가는 것은 너무 복잡하기에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생물학->화학->물리학으로 가는 과정에서도 여러 학문들로부터 획득된 기존의 경험과 지식들 덕분에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결국 '통섭'이었습니다. 이처럼 통섭을 통해 여러 분야에서 그러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얘기를 하고 싶었겠죠.


그러면서 뜬금없이 '몽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몽사'는 이 장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등장하는 소재이니 기억해 두시면 좋을 듯해요.


저자는 그 몽사가 결국에는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화학물질로 인한 것이며, 그러한 영향으로 뇌가 작용하여 만들어진 결과가 '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처럼 꿈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고 틀렸다고 하죠. 덧붙여, 꿈을 설명하기 위한 '활성. 종합 모델'이라는 것을 얘기합니다. 이는 저자가 꿈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특히 분자 수준까지 내려가 설명하기 위해 넣은 대목인 듯한데요, 결국엔 우리의 정신의 작용도 다 그런 화학물질들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 같네요.


하지만 분자의 작용으로 인해 꿈을 꾸게 되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환원주의), 그 분자가 왜 몽사를 꾸게 하는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설명을 위해 저자는 유전적 성향과 진화에 대한 지식의 필요함을 언급합니다. 즉, 인간이 뱀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우리의 뇌 속에 남긴 뱀에 대한 이미지가 몽사라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거죠.


그런데 뇌를 분석하는 것은 어려운 과정입니다. 뇌의 해부학적 구조는 이미 밝혀져 있고, 우리는 물질의 원자 수준까지도 알고 있지만 그러한 것들과 정신세계가 어떻게 연관이 있는지 밝혀내기 위해선 생물학에서도 여러 분야가 필요하며 (진화생물학, 생태학, 유기체생물학, 세포생물학, 분자생물학, 생화학 등) 각각은 서로 다른 시공간 척도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생물학 내에서의 통섭조차도 요원합니다.


그러니 하위 수준 (원자나 분자 수준)에서 원래의 문제 (뇌의 기능, 정신세계)로 가는 '전일론적 접근'은 그 자체가 종합을 통한 통섭이긴 하지만 그 복잡성으로 인해 매우 어렵습니다. 현재까지의 과학기술로서도 해결이 안 되죠. 특히나 생태학 등의 환경과학은 하위 수준에서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나마 물리학에서는 자연계를 어느 정도 법칙과 모델로 만들어내는 성과가 있었지만 생물학에서는 그러한 모델을 적용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요. (간단한 얘기를 복잡하게 수식으로 그럴싸하게 보여주는 것도 거부감을 보이네요. 그 예로 카우프만의 NK 모델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한 복잡성에 대한 논의를 위해 물리학이나 수학에서의 '복잡성 이론'을 얘기하지만 이것 역시 아직은 요원합니다. 이에 대해 회의적인 부류, 열광적인 부류,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하는 부류(중도주의자)가 있는데 저자 역시 중도주의자로서 방향성은 맞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그는 그 이론 자체보다는 그것을 생물학에 어떨게 적용할 것인지가 관심사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복잡성 이론에 대한 기대감도 드러내는 듯하죠. 생물학에서 굳이 복잡성 이론이 필요 없을 수도 있지만, 여하튼 언젠가는 생물학에서도 분자 수준에서부터 전체 체계를 정확하게 모형화하는 데 성공하고, 발생학에서도 비슷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면 우리는 '마음'과 '행동'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하는군요.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 논의는 다음장에서 '마음'으로 넘어가며, 5장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됩니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분자와 원자를 일일이 시뮬레이션해 보지 않고도 살아 있는 개체를 완벽하게 재편할 수 있는 일반적 조직 원리가 존재하는가?
둘째, 이 동일한 원리가 마음과 행동 그리고 생태계에도 적용될 것인가?
셋째, 물리학과 수학의 관계처럼 생물학의 자연 언어로 기능할 만한 수학이 존재하는가?
넷째, 올바른 원리가 발견된다 하더라도 원하는 모델에 그 원리를 적용하려면 얼마나 상세한 사실 정보가 필요한가?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는 마치 어둠 속에서 안경을 끼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성경적 예언이 성취되는 ‘그날’이 오면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직접 대면하게 될 것이고 아마도 이 난제들에 대한 해답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어쨌든 대답을 찾기 위한 이런 시도는 인간 지력(知力)의 한계에 대한 일종의 시험이다.


그런데 5장을 읽고 저자가 얘기하려는 통섭이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물학을 이용해서 다른 분야를 해석하고자 하고, 생물학의 하위 분야들의 성과를 위해서 물리학이나 화학이 이용되는 듯해서요.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원대한 목표까지는 아니더라도 과연 학문 간의 경계가 없이 자유롭게 넘나들자는 통섭의 원래 취지에 부합하는가 하는 의문이 드네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