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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Jan 29. 2024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유명한 고전이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는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도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작품임에도 그랬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읽게 되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아마도 저자 자신)은 탄광 사업을 위해 고향인 크레타섬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조르바를 고용하여 같이 지내게 된다. 조르바는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인이 아니라 마케도니아사람인) 주인공을 '두목'이라고 부르며 그를 따르지만, 사실은 자기 멋대로인 성격이라 사고도 많이 쳤다. 결국 주인공은 파산하여 빈털터리로 그 섬을 떠나게 되고, 조르바와도 헤어진다. 그러한 과정에서 주인공과 조르바가 겪은 일들을 훗날 소설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명성과는 달리, 나는 이 책에 대해 여러모로 당혹스러웠다. 책의 내용도 그랬고, 조르바의 기행에 대해서도 그랬고, 이 책에 담겨 있는 여성에 대한 인식이라든가 삶의 방식들도 그랬고, 무엇보다 조르바가 실존 인물이었고 그와의 일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주인공은 단테의 <신곡>과 부처와, 여러 동서양의 철학들을 늘 마음속에 품고 있고 그것들을 쫓아다녔다. 그는 늘 책을 끼고 다녔으며, 책에서 세상의 답을 찾으려 했다. 그러한 철학적 고찰은 이 작품 전반에서는 계속 주인공을 통해 계속 보인다. 사실은 작가의 말들이다.


그 친구가 나를 〈책벌레〉라고 불렀을 때, 불쑥 솟아오르던 그 분노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시 내가 영위하고 있던 삶에 대한 나의 모든 역겨운 감정이 그 말로 형상화되었다. 그토록 강렬하게 인생을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책 나부랭이와 잉크로 더럽혀진 종이에다 자신을 그리도 오랫동안 내박쳐 둘 수 있단 말인가! 그 이별의 날, 내 친구는 내가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게 해 준 셈이었다. 속이 후련했다. 병통을 알았으니 이제는 쉬 정복할 수 있으리라. 이제 그것은 모호하지도 막연하지도 않았다. 이름과 형태가 있으니 그에 맞서 싸우기도 훨씬 수월할 터였다.
이런 게 자유라고…… 나는 생각했다. 정열을 품는 것, 황금 조각을 그러모으는 것, 그러다 갑자기 자신의 정열을 무찌르고 보물을 사방에 날려 버리는 것. 하나의 정열에서 풀려나와 다른 더 고상한 정열의 지배를 받는 것. 그러나 이 역시 예속의 한 형태가 아닌가? 이상을 위하여, 종족을 위하여,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다? 우리의 지향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더 길어지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훨씬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의 한계에 이르지 않은 채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유일까?


사실 나는 주인공(아마도 저자)과 비슷한 성격이지만 때로는 조르바와 비슷한 면이 있기도 하다. 나 역시 책과 정보를 통해 세상의 이치와 현실을 알고자 하지만 때론 현실 깊숙이 들어갔다가 때론 형이상학적인 곳으로 빠지기도 하니까. 하지만 현실과 벗어난 진리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에 항상 현실적인 문제와 실천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경험을 통해 얻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점은 조르바와 비슷하기도 하니 나는 두 사람의 합집합이거나 혹은 그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주인공의 그런 철학적 고찰은 조르바의 말들과 대립되지만 각각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의 성격이나 그가 일삼는 것들은 정당화되기 어렵겠다. 그가 어떤 신념이나 철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아니었고, 속된 말로 그냥 되는대로 사는 사람인 것 같아서 그의 언행에 대해 배울만한 점이 있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개똥철학'으로 비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을 가까이하고 싶지 않고 믿을 수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주인공이 조르바를 고용해서 (특별히 어떤 기대를 한 것도 아닌데도) 일을 맡긴 것은 의외였다. 대체 그는 조르바의 어떤 면을 보고 그를 고용한 것일까? 주인공도 어떤 목표가 있어서 크레타섬에서 탄광사업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닌 듯하지만. 사업은 망했더도 책 한 권은 건졌으니 전화위복이랄까. 


그러나 주인공은 조르바에게 이끌렸고, 그에게 동화되어 예전의 그러면 하지 않았을 행위들도 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주인공이 삶은 변화했지만 조르바는 그러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의 삶을 계속 살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을 고스란히 품은 채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에 단단히 뿌리박고 선 이 조르바의 겨냥이 빗나갈 리 없다. 아프리카인들이 왜 뱀을 섬기는가? 온몸으로 땅을 쓰다듬는 뱀은 대지의 모든 비밀을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뱀은 배로, 꼬리로, 그리고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안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 조르바의 경우도 이와 같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 뿐.
「두목, 인간이란 짐승이에요.」
단장으로 자갈을 후려치며 그가 말을 이었다.
「짐승이라도 엄청난 짐승이에요. 두목같이 고매하신 양반은 이걸 모르시겠지. 짐승한테는 모든 게 너무 쉬워요. 거리낄 게 없으니까요. 아니라고요? 짐승이라니까요! 짐승은 사납게 대하면, 당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해요. 친절하게 대하면 눈이라도 뽑아 갈 거요. 두목, 거리를 둬요! 놈들 간덩이를 키우지 말아요. 우리는 평등하다, 우리에겐 똑같은 권리가 있다, 이따위 소리는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당신에게 달려들어 당신 권리까지 빼앗을 거예요. 당신 빵을 훔치고 굶어 죽게 내버려 둘 거요. 정말이지 두목을 위해서 충고하건대, 거리를 둬요!」
「두목, 당신은 말이오……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먹는 걸로 신을 만들어 내려고 애를 쓰는 것 같소.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으니까 괴로워하는 거고. 까마귀에게 일어났던 일이 당신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까마귀에게 일어난 일이라니, 그게 뭡니까, 조르바?」
 「말씀드리지요. 원래 까마귀는 까마귀답게 점잖고 당당하게 걸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까마귀에게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 보겠다는 생각이 난 거지요. 그 이후로 이 가엾은 까마귀는 제 보법(步法)을 몽땅 까먹어 버렸다지 뭡니까. 뒤죽박죽이 된 거예요. 기껏해야 절뚝절뚝 걸을 수밖에는 없었으니까 말이오.」
「산다는 게 곧 말썽이오.」
 내가 대꾸하지 않자 조르바가 계속했다.
 「죽으면 말썽이 없지. 산다는 것은…… 두목,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그래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르바의 말이 옳다는 건 나도 알았다. 그러나 그럴 용기가 내겐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인생의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타인과의 접촉은 이제 나만의 덧없는 독백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타락해 있었다.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에 대한 책을 읽는 것 중에서 택일해야 한다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내가 인생과 맺은 계약에 시간제한 조항이 없다는 걸 아니까 나는 가장 위험한 경사 길에서 브레이크를 풀어 봅니다. 인생이란,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법이지요.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브레이크를 써요. 그러나 - 두목, 이따금 내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가를 당신에게 보여 주는 대목이겠는데 -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좋은 문장들이 많기는 했지만 그건 대체로 주인공의 글 혹은 속마음, 느낌이 표현될 때 그랬었고, 조르바의 말들은 거칠고 두서가 없기는 하지만 다소 촌철살인 같은 면이 있기도 했다. 그래서 주인공이 마치 허점을 찔린듯한 심정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그런 점들을 조르바를 통해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리라. 아마 주인공과 조르바, 둘의 다른 관점을 통해서 인간과 세상을 바라 보고자 했을 것이다.


결국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본성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되는데 그 답은 이 책에서 제시되지는 않는다. 애초에 정답은 없으며, 이 책에서 얘기하는 것들은 삶을 대하는 자세, 여러 가능성 중에 하나일 뿐이니까.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나는 인생을 허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레를 찾아 내가 배운 것,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깡그리 지우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저 진정한 알파벳을 배울 수 있다면……! 내가 선택하는 길은 사뭇 달라질 것이다. 내 모든 감각을 완벽히 단련함으로써, 또한 온몸도 그렇게 함으로써 몸이 즐기고 몸이 이해하게 하리라. 달리기를 배우고, 씨름을 배우고, 수영을, 승마를, 조정을, 운전과 사격을 배우리라. 내 영혼을 육신으로 채우리라. 내 육신을 영혼으로 채우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저 영원한 두 적대자가 내 안에서 화해하게 만들리라.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뭍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 문득, 가슴속에서 인생이 마지막 기적을 완성했다는 것, 곧 인생이 한 편의 동화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전에는 그토록 나를 매혹하던 이 모든 것들이 이날 아침에는 지적인 곡예, 세련된 협잡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다. 그것이 문명이 쇠퇴하는 모습이다. 그것이 인간의 고뇌가 종말을 맞는 모습이다. 순수시며 순수 음악, 순수 관념이라는 정교하게 짠 속임수. 최후의 인간 - 모든 믿음과 모든 환상에서 해방된, 그래서 기대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진 - 은 자신을 구성하는 진흙 덩어리가 정신으로 축소되어 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정신에는 뿌리가 수액을 빨아올릴 흙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는 사람이다.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그 몸에는 씨앗도 배설물도 피도 없다. 모든 것은 언어가 되고, 언어의 집합은 음악적인 곡예가 된다. 최후의 인간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전적인 고독 속에 들어앉아 다시 그 음악을 소리 없는 수학적 방정식으로 해체해 놓는다.
조르바의 침묵 때문에, 영원하고도 부질없는 질문들이 다시 한번 내 내부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다시 한번 내 가슴은 고뇌로 차올랐다. 세상이란 무엇일까? 나는 궁금했다. 세상의 목적은 무엇이며, 무슨 수로 우리가 하루살이 같은 목숨을 달고 세상의 목적을 이루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조르바에 따르면, 인간이나 사물의 목적은 쾌락을 창조하는 것이다. 혹자는 정신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한 차원 위에서 보면 똑같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왜? 무슨 목적으로? 육체가 와해되어 버린 뒤에,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의 잔재가 남아 있기나 할까? 아니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걸까? 우리가 불멸에 대해 꺼지지 않는 갈망을 품는 것은, 우리가 불멸의 존재여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잠깐의 시간 동안 그 어떤 불멸의 존재를 섬겨서가 아닐까?
인간이라는 불운한 존재는 작고 초라한 자신의 삶 둘레에 난공불락이라고 믿는 방벽을 쌓아 올린다. 그 안을 피난처로 삼아, 삶에 미미한 질서와 안정을 부여하려 애쓴다. 미미한 행복을 말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밟아 다져진 길들을, 신성불가침의 반복적 일상을 따라야 하며, 안전하고 단순한 규칙들을 지켜야 한다. 알 수 없는 것들의 무서운 침범을 막으려 요새처럼 방비한 그 테두리 안에서, 자잘한 확신들이 지네처럼 꼬물꼬물 기어 다니며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적이 딱 하나 있다. 모두가 죽을 듯이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그 적의 이름은 〈거대한 확신〉이다. 지금, 이 거대한 확신이 내 존재의 장벽을 뚫고 들어와 내 영혼을 덮치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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