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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Nov 23. 2023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서부 전선 이상 없다>



그들이 아직도 글을 쓰고 떠벌리는 동안 우리는 야전 병원과 죽어 가는 동료들을 보았다. 이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이 최고라고 지껄이는 동안 우리는 이미 죽음에 대한 공포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반역자가 되거나, 탈영병이 되거나, 겁쟁이가 된 것도 아니었다. 어른들은 걸핏하면 이런 표현들을 쓰곤 했다. 우리들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고향을 사랑했다. 그리고 우리는 공격이 시작되면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이제 우린 다른 사람이 되었고, 대번에 눈을 뜨게 되었다. 어른의 세계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린 어느새 끔찍할 정도로 고독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고독과 싸워 나가야 했다.


이 책은 고등학생 때 독일어 선생님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우리 학교는 제2외국어가 독일어였는데, 이 책을 소개해주며 한 번 읽어보라는 것이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지만 독일어 원서로 읽어보랬다. 당연히 불가능한 얘기지. 


어쨌든 고등학생 때부터 제목만 알고 있던 이 책을 드디어 읽게 되었다. 밀리의 서재에 올라와 있는 열린책들판으로 읽었고, 홍성광 번역이긴 한데 무난하게 읽혔다. 전자책으로 나와 있는 것도 적지만, 이 책의 번역본이 생각보다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도 그랬지만 이 책을 읽는 남자들은 군대시절의 기억이 많이 떠오를 듯하다. 물론 군대에서 전투를 체험해 본 것은 아니지만 직간접적인 경험들, 그리고 군생활 자체가 주는 트라우마도 있기에 그럴 것이다.


나는 해병대 2사단에서 군생활을 했고, 강화도에서 근무했었다. 내가 근무했던 곳이 '서부전선'으로도 불리기에 공교롭게도 이 책의 제목이 더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침마다 상황실에서 상급부대로 '특이 사항 없음'을 보고하는 것도 주된 일과였다. 제목 그대로 '서부전선 이상 없다'였다.




작품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고, 주인공인 파울은 독일군으로서 선동에 휩쓸려 충동적으로 입대 후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상대로 전투를 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독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이고 대체로 악한 쪽으로 묘사된다. 사실 전쟁이라는 게 보는 관점에 따라 상대적이고, 승자독식의 결과를 낳지만 그 과정에서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죽음과 비극은 피할 수가 없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누군가의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피해를 낳게 되고, 그러한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은 참호전 양상이라 이 책에서도 대부분 참호전을 다루고 있다. 서부전선은 상당히 길게 형성되어 있었고 전쟁은 소모적이고 지지부진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모두가 지쳐갔다. 그런데 어느 전쟁이나 전쟁을 일으킨 쪽은 속전속결로 금방 끝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과 오만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장기전으로 가게 되고 결국엔 전쟁에서 지거나 혹은 양쪽 모두 원치 않는 결과로 이어지는 듯하다. 


더군다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등장한 독가스라든가 전차 등 대량살상무기의 공포도 묘사된다. 특히 나는 병과가 화학병이어서 화생방 (화학전, 생물학전, 핵전) 방호 담당이었고, 이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많이 받았기에 참혹함과 사례들을 자세히 알고 있어서 더 느껴진 듯하다. 주인공도 결국엔 독가스 후유증으로 인해 사망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전투의 참혹함이 많이 묘사되어 있어서 보기에 따라 끔찍할 수도 있지만 나는 덤덤하게 봤다. 최근에 이 작품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어 잠깐 봤는데 확실히 시각적인 효과가 더 크긴 하다. 그런데 시각적으로 직접 드러내는 것보다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감정적으로 더 크게 전달되는 듯하다. 글에는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포함되어 있기에 그러한 상호작용이 크다.


사실 그의 말이 옳다. 우리는 이제 더는 청년이 아니다. 우리에겐 세상을 상대로 싸울 의지가 없어졌다. 우리는 도피자들이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의 삶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우리는 세상과 현존재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에 대고 총을 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터진 유탄은 바로 우리의 심장에 명중했다. 우리는 활동, 노력 및 진보라는 것으로부터 차단된 채로 살았다. 우리는 더 이상 그런 것의 실체를 믿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오직 전쟁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문학을 사랑했던 순진한 소년이 살인병기가 되어 전장에서 생존을 위한 전투를 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찰을 하는 모습은 전쟁을 하는 주체 결국엔 인간임을 보여준다. 그렇게 변해갈 수 없는 존재들. 그리고 적군에 대해서도 맹목적으로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 죽여야 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수색을 나갔다가 고립되었을 때 자신의 참호로 떨어진 프랑스군을 죽이고 그의 삶을 대신 살고자 결심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가장 명장면이 아닐까.


하지만 그러한 전쟁의 비극과 비인간성과 더불어 여러 가지 코믹한(?) 에피소드들도 함께 등장한다. 그러한 것들은 전쟁 중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한 것이 극한 상황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일 테고, 전쟁이라고 항상 최악의 상황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한 모순적 유쾌함은 결은 약간 다르지만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이 책은 반전소설은 아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 끌려간 독일인들의 강제징용에 대한 얘기이고, 비참함 속에서도 모순적 유쾌함과 그 속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이외에도 야전병원이라든가 후방, 그리고 훈련소 등의 일들도 나오는데 일단 전쟁이 발발한 이상 모든 곳의 상황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민간인들도 그렇고. 특히 그가 휴가 나와서 집과 마을을 돌아볼 때 가족과 지인, 심지어 전혀 상관없는 장교에게 당하는 장면은 전장과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사람들은 전장의 참혹상과는 거리가 멀고, 단지 자신들의 현재 상황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리고 자신을 전장으로 보내게 한 교사에 대해서도 소심한 복수를 하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상황에 적응해 나갔다. 스물이라는 나이는 우리들 중 다른 여러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했지만 이와 동시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 마음속에서 견고하고, 실제적인 연대감이 싹텄다는 사실이었다. 전쟁터에서 전쟁이 가져다준 가장 값진 것은 바로 전우애였다!
「하지만 이유는 다른 데 있어. 자 생각해 봐, 개에게 감자를 먹는 훈련을 시키다가 고기 한 점을 던져 줘 봐. 그럼 그것을 덥석 물려고 달려들 거야. 그건 개의 본성 때문이지. 사람에게 조그만 군력을 줄 때도 그와 마찬가지 일이 생기지. 즉 고기를 문 개처럼 권력을 덥석 물고 늘어지는 거야.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인간이란 원래 속성이 짐승과 다름없기 때문이야. 거기에 어쩌면 버터기름을 바른 빵처럼 예의라는 게 발라져 있을 따름이야. 군대의 본질적 속성은 늘 누가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 그런데 고약한 일은 누구나 너무 지나치게 권력을 행사한다는 점이야.


또한 훈련소 시절 자신의 교관에 대한 복수나 여러 가지 일들도 마치 실제로 있었을 법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군생활 내내 나를 괴롭히던 선임들과 하사관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리기도 하니까. 영화 <풀 메탈 재킷>에서도 고문관급이었던 병사가 수료하던 날 교관에게 복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전쟁이 나면 적군보다 아군을 죽이는 경우도 생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전우애라는 것이 과연 어떻게 형성될 수 있을까 싶다. 생사를 넘나들게 되면 자연적으로 생길 수 있을까? 그건 아닌 듯하다. 하지만 <휴먼카인드>에서도 언급됐듯이, 전쟁에서 버티게 해주는 것은 그 전우애라고 한다. 전우애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아무튼 이제야 읽은 것이 좀 미안할 정도로 좋은 책이었고, 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했다. 영화는 볼까 말까 생각 중인데 보면 마음이 더 무거워질 것 같다.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년 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엎드린 채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땅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몸을 뒤집어 보니 그가 죽어 가면서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것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된 것을 마치 흡족하게 여기는 것처럼 무척이나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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