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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Jan 08. 2024

김수빈 <고요한 우연>


<고요한 우연>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독파에 신청하여 읽게 되었다. 작년 초에 이 책이 나왔을 때부터 관심은 있었지만 다른 책들에게 밀려서 읽지 못하다가 독파 앵콜에 올라와서 신청한 것이다. 


어쩌면 내 마음은 동경에 가까운 건지도 모른다. 고백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정후가 나를 좋아해 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만약 내가 공주님이 되길 꿈꾸는 일곱 살짜리 어린애였다면 일말의 기대 정도는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열일곱의 나는 그렇지 않다. 정후는 내가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정후는 '모두의 한정후’이고 나는 그냥 1학년 9반 25번이니까. 


그런데 몇 가지 점에서 뜻밖이었다. 먼저 이 책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었다. 김수빈 작가의 <고요한 우연>은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이었다.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수상작들도 여러 편 읽어봤기에 작품의 분위기를 예상해 볼 수 있었다. 


특히나 그는 2015년에 <여름이 반짝>으로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바도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두 작품은 비슷한 색채를 띄는 것 같다. 그는 작고 평범하고 연약한 존재들의 힘을 그려내는데 주력하는 것 같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더 그렇게 느끼는 경우가 많기에 그런 것일까.


그리고 제목이 의미하는 바도 그랬다. '고요'와 '우연'이 어떻게 같이 어울릴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제목에 호기심을 가졌을 것 같다. 그런데 둘 다 등장인물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둘은 제목에서도 어색함을 보이듯이, 실제로도 어색함을 넘어서 사실상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이수현이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그의 성장과 자아 탐색을 다루고 있다. 그는 자신을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고등학생으로, 반에서 고요, 정후, 지아, 우연 등 많은 이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주된 내용이다. 작가는 깊이 있는 캐릭터 묘사와 현실적인 상황 설정으로 독자들의 몰입을 이끌어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다음 문자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피할 새도 없이 고요의 문자가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진짜 재수 없어.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너무 아프고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섭섭하고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나는 고요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럴 만한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용기라는 것이 노력한다고 해서 생기는 건 아니었다. 차라리 가만히 있을 걸 그랬다.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나의 보잘것없음만 깨닫게 됐다. 그건 내가 겁쟁이라는 사실보다 더 비참하고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밤새도록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작가는 깊이 있는 캐릭터 묘사와 현실적인 상황 설정으로 독자들의 몰입을 이끌어냈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정후와 고요는 각각 다른 의미에서 빛나는 존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다지 존재감이 없는 수현이나 우연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물론 정후나 고요도 나름의 아픔이 있지만.


그런데 작가는 여기에 우주의 이야기를 더했다. 소제목에서도 우주비행 또는 우주와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고, 내용에서도 우주, 특히 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여기에서 '달'은 여러 의미에서 중요한 모티브이자 단서가 된다.


또한 SNS의 속성 역시 작품에 담겼다. 청소년들에게 SNS는 이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로 인한 오해와 문제도 발생한다. 특히 익명의 경우에는 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짝사랑, 아이들 사이의 갈등, 좌절된 꿈, 왕따, 도피와 실종 등은 청소년 소설에서는 이미 익숙한 소재들이고, 이 작품에서도 많은 클리셰가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수상을 할 수 있었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이유는 너무 뻔한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건들이야 있을 수 있다고 쳐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개개인의 감정이 잘 드러난다. 누구나 청소년기를 지나기에 그 또래에게뿐만 아니라 성인이 된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많은 것들로 인해 힘들고, 자신이 속한 공간이 세상의 전부 같던 때. 그 안에서도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들이 많았고 심각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도 점차 확장되고 한 단계씩 더 나아가게 된다. 그러한 성장통은 반복되는 주제지만 그럼에도 계속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이유다.


엄마는 엊그제 일처럼 얘기했지만,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의 이야기였다. 

"그때 알았지. 아, 수현이 너는 너만의 방식이 있구나. 나는 참으로 다정하고 단단한 아이를 낳았구나. 코끝이 찡해졌지." 

스스로 빛을 내지 않아도 밝게 빛나는 별이 있다고 말해 주던 다정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신은 스물세 번째 피규어라고 했던 이우연의 말도 떠올랐다. 나 또한 그 어디쯤 서 있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엄마의 특별 한정판은 아니지만 엄마에게 꼭 필요했던 피규어다. 그걸로 됐다. 그러면 충분했다. 


또한 이 작품 내에서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나오지만 아주 심각하게 전개되지는 않는다. 일상적으로 있을 수 있을만한 정도의 사건들 혹은 일탈들. 그러한 것들을 해결하고 넘어서면서 성장통도 조금씩 나아간다.


<고요한 우연>은 청소년기의 심리와 감정,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잘 포착한 작품으로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고 성장의 길을 찾는다. 내용이 다소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청소년뿐만 아니라 모든 연령대의 독자들에게 공감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지아를 끌어안고 더 크게 울었다. 내 등을 토닥이는 지아의 손길이 느껴졌다. 밤하늘을 지키는 북극성처럼 내 중심축의 끝에는 언제나 지아가 있었다. 아무리 낯설고 어두운 곳에서 길을 잃어도 지아를 찾으면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알아낼 수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나는 용기를 내야 한다. 그로 인해 많이 아플지라도, 많은 것을 잃어버릴지라도.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내 모든 용기가 사라질 것 같았다. 그저 멀리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을 것 같았다. 그렇게 뒷걸음질을 쳐 버리면, 영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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