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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Feb 23. 2024

하는 일이나 잘하지?

'한우물주의'에 대하여

DALL-E로 생성한 이미지


"우물을 파도 한 우물만 파라"는 속담이 있다. 무엇을 하든 한 가지에만 집중해서 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특히 이는 전문성을 갖춰야 하는 경우에 더 요구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말을 나는 '한우물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뭐든 한 가지를 잘하고 오래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과거에 산업이나 사회가 복잡하지 않았을 때는 한 가지 일을 직업으로 삼았고, 그것을 천직이라 여기며 살았다. 평균 수명이 그리 길지 않았으므로 고령의 나이까지 일 하는 경우도 많지 않았으리라.


우리나라가 산업화되고 경제가 발전할 때도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직장에 뼈를 묻는다'는 말이 농담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1990년대 말, IMF 구제금융 시기를 지나면서 정규직과 임시직 (혹은 기간제)으로 나뉘더니 정년이라는 개념도 희석되었다. '평생직장'이라는 말은 유니콘의 존재와 같이 느껴진다. 




어떤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을 전문가라고 한다. 대체로는 학문적인 깊이와 경험,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학문적이 아니더라도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격을 인정받는 경우도 있다. 분야를 좀 더 넓게 보면 예술, 체육 쪽에서 재능을 보이는 사람들도 전문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얻을 수 있는 자격이다. 


전문가의 경우에도 그 분야에서 계속 인정을 받기는 어렵다. 그러한 자격을 얻기도 쉽지 않지만, 그것이 일회성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 갱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지식과 기술을 계속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흐름에 뒤처진다. 자신이 가진 지식은 시한성이 있어 반감기를 지나며 점차 효용이 떨어진다. 예술이나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계속 연습을 하지 않으면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 어떤 일을 하든 지속성이 결여되면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니 전문가의 경우에는 한우물을 잘 파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거기에서 물이 얼마큼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또한 전문가의 경우에는 그 전문성을 객관적인 지표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학자의 경우에는 연구실적으로, 또 분야에 따라서는 그와 대등한 실적이 요구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인 지표가 아닌 정성적인 기준으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이는 객관성이 결여되어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스스로 내세우는 전문성일 수도 있고, 가짜 전문가도 많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이 그 분야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오랫동안 있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를 보게 된다. 이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내세우는 것에 대한 신뢰와 기대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문가에 대해서는 엄격한 기준을 내세운다. 전문가는 일반인들의 기대에 부합해야 하고, 그러한 전문성을 벗어난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 '하는 일이나 잘하지?'라는 얘기를 한다. 예로, 현역 운동선수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 초심을 잃었다고 한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다른 방면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잘하는 것뿐이다. 즉, 다방면에서 전문가가 되는 것뿐. 

 



한편,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여러 분야의 일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전문성보다는 사회적 생존본능이 더 큰 명제일 수 있다.


사회는 진화한다. 진화의 속도는 계속 빨라진다. 사회의 진화는 개개인이 의도한 바가 아니다. 이는 산업이 고도로 발전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달라지면서 그것이 선택압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변화에 적응하며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한우물주의는 점차 의미가 퇴색되는 듯하다. 앞서 말한 대로 평생직장이라는 것도 사라졌고, 한 가지 일로만 버티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러니 한 가지만 잘해서는 살기 힘들다는 의미도 된다.


요즘엔 '전문적'이라는 것보다는 '융합'이라는 단어가 더 많이 쓰이는 것 같고, 융합이라는 의미에는 이미 다방면에 전문적이라는 것이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그런 사람을 '융합형 전문가' 또는 '폴리매스'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한 부담감 때문인지 일반적으로는 그러한 말 대신에 '멀티 플레이어', '멀티 태스커', '다재다능', '만능 재주꾼', '제네럴리스트' 등의 말도 쓰이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범주에 포함되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다. 폴리매스에 해당하는 천재들이 아니더라도 다방면에서 인정받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 가지도 잘하기가 쉽지 않으니 여러 가지를 잘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제는 다방면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요구한다. 무한경쟁이라는 말로 위협하면서. 이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다. 소위 '멀티 플레이어'라는 사람들도 다 잘하기보다는 주가 되는 분야와 부가되는 분야로 구분된다. 그러한 것을 속칭 '본캐( 본 캐릭터)' 또는 '주캐(주 캐릭터)'와 '부캐 (부 캐릭터)'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나마 요즘에는 부캐에 대한 관용도도 높아진 편이기는 하다. 이는 부캐에 대한 진지함을 낮추고, 그것을 가벼운 일탈 정도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본캐에 더 비중을 두고 그 사람을 바라본다. 그러니 모든 것이 주캐가 되지 않는 한 부캐가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이렇게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나는 융합형 전문가다. 공학, 물리학, 의학, 통계학 전공이며 관련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 일을 거진 20 년 가까이해오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내세우기에는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연구실적으로도, 또 대내외적으로도 나는 별로 내세울 것도 없고,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이름 없는 과학자(?) 중 한 명일 따름이다. 나한테도 과학자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다면 말이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다른 쪽으로도 계속 관심을 갖게 되는데 특히 글쓰기나 독서와 관련해서 그렇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얘기한 바 있지만, 부캐로서 이 브런치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좀 더 본격적으로 글쓰기 공부를 하고자 문예창작학과에 편입했는데 이런 것을 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각은 어떨까? 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하는 일이나 잘해라'라는 얘기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사람은 없지만 '지금도 바쁜데 괜찮겠어요?', '그런 일들을 어떻게 다 해요?'라는 식으로 돌려서 얘기하기는 한다. 물론 나도 무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내 마음이 그쪽으로 끌리는 것을.


다방면에 재능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는 못하고, 다만 마음이 가는 것을 하고 싶은 그 이유 하나로 나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본다. 기존에 파놓은 우물을 방치하지는 않겠지만 다른 곳에도 또 우물을 파본다. 그러나 하다가 지레 포기하지는 않으리라. 


시간이 더 흐르면 나의 부캐가 본캐가 되는 때도 올까? 그것은 모르겠지만 더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나의 본캐와 부캐를 균형적으로 잘 발전시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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