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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Feb 05. 2024

앤드루 랭, 오스틴 돕슨 <책 사냥꾼의 도서관>


독파에서 책의 제목과 표지에 끌려 챌린지를 신청하고 읽게 된 책이다. 일단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책을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


하지만 사전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기에 최근에 나온 '책 관련' 정보서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지은이가 외국인이니 적어도 국내 저자가 쓴 수준 낮은 책은 아닐 것이라는 약간의 기대감과 함께.


그런데 첫 장부터 예상이 빗나갔음을 느꼈다. 이 책의 저자는 두 사람이다. 둘 다 19세기 영국사람이며, 저자 자신도 장서가였고, 장서가들을 위한 가이드북을 쓴 것이었다. 


이 책은 총 네 개의 장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의 내용이 흥미로웠다. 우선 제목에도 있는 말이지만 그는 책 수집가에 대해 '책 사냥꾼'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고서점들을 돌아다니거나 혹은 여러 루트로 책을 수집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모두 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런 한 사람들은 어느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책을 수집하는 사람들도 그 목적이 다양하므로 그들을 모두 포괄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나 여기에서는 금전적 목적으로 책을 수집하는 것을 경멸하고 있다. 그야말로 책에 대한 애정을 강조한다.


이 사과의 말 뒤로 책 수집이라는 취미와 열정 때문에 ‘책벌레’나 ‘책 사냥꾼’이라는 차별적인 이름으로 알려진 사람들에 관하여 짧게나마 변호의 말을 덧붙이려 한다. 단지 책을 사랑할 뿐인 애서가들의 단순한 즐거움은 성미가 고약하고 경박한 비평가 무리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비평가는 자신에게 없는 취향이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인종이다. 실제로 최근에 새로 출간된 중요한 책들은 고급 종이에 인쇄되었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있으며, 한 역사 논문은 그 중요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외관이 단정하고 깔끔하다는 이유로 비평가들의 분노에 찬 공격을 받고 있다. 새 책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비평가들은 당연히 책의 ‘여백’이나 ‘상태’를 따져대며, 오래된 책의 초기 판본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나는 종종 책 수집의 즐거움과 스포츠의 즐거움이 서로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책 수집은 “책 사냥”이라 불리기도 하며 옛 라틴어 구절에는 “이 숲에서의 추적은 절대 싫증 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책 수집은 낚시에 비유되는 쪽이 한층 더 적절하다. 책 수집가는 낚시꾼이 트위드강 가나 스페이강 변을 거닐듯 런던과 파리의 거리를 소요한다. 책 수집가는 여러 위풍당당한 고서점을 지나친다. 쿼리치 씨와 투비 씨, 퐁텐 씨의 서점 같은 곳이다. 파사주 데 파노라마에 위치한 으리으리한 모르강과 파투 서점도 있다. 이곳에서 나는 항상 헝가리에서 제일가는 장서에 둘러싸인 브라시카누스가 된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책 사냥꾼은 두 가지 질문을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빠진다.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애서가는 형이상학자들이 자신의 영혼에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자신의 책에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 답에 따라 책의 가치는 크게 좌우된다. 책에 문장紋章이 찍혀 있다면 기가르의 『애서가의 문장 Armorial du Bibliophile』을 참고해 그 책의 본래 소유주를 추적해 볼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스무 개의 문장 중 무엇이라도 가죽 표지에 찍혀 있다면, 그 문장 하나만으로도 가죽 표지가 감싸고 있는 책의 백배가 넘는 가치를 지닐 것이다.

한편 “어디로 가는가?”라는 또 다른 의문은 한층 무겁게 다가온다. 우리의 보물은 어디로 흩어질 것인가? 이 책들은 친절한 주인을 만날 것인가? 혹여 책이 맞이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운명, 즉 현실주의자의 손에 떨어져 결국 트렁크 제조업자에게 팔려가게 되는 건 아닐까? 책장이 낱낱이 뜯겨 상자의 안감을 대거나 아가씨의 머리카락을 곱슬곱슬하게 만드는 데 사용되지는 않을까?


그러면서 그는 우선 '책 사냥꾼을 위한 변명'을 한다. 그런데 그 변명이 납득이 된다. 이 역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 이어지는 내용들은 장서가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내용들이지만 시대가 아무래도 150여 년 전이라 지금 상황과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책을 좋아하고 아끼고 구하고 싶은 그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다. 


인쇄술이나 제본기술이 지금보다는 더 열악했고, 지금처럼 책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들도 많기에 (그냥 종이뭉치 혹은 종이뭉치를 얽어 놓은 것 처음) '장정'이 권장되기도 했던 때이기도 하다. 그런 시대적인 차이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시대상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계급의 차이 혹은 성별의 차이로 인해 다소 특정 그룹에 대한 비하도 느껴지긴 했다. 이는 당시 상황과 저자의 위치를 감안할 필요가 있겠다. 또한 프랑스와 비교하면서 영국을 비하하듯이 느껴지는데 이는 다소 자조적이기도 하다. 


또한 이 책에서는 책 수집에 대한 그의 열정이 느껴진다. 문장 하나마다 책에 대한 그의 애정이 묻어나지 않는 것이 없다. 그의 개인 도서관에는 얼마나 많은 장서들이 있었을까 궁금해지지만 그에 대한 기록이나 사진 등이 없어서 궁금증만 남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장정해서 먼지 하나 없이 보존하고 관리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의 글들은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책 수집가들이 겪는 '세렌디피티', 즉 예기치 않은 발견의 즐거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만 그러한 행운은 복권 당첨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에게 그러한 환상에 대한 경고도 덧붙이고 있다.


흥미로웠던 점은 수집할만한 책들과 삽화가 들어간 책들에 대한 대목이다. 장서를 알려주는 것은 당대의 '인플루언서'였을 테니 아마 당연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삽화가 들어간 책들은 관심이 없을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오스틴 돕슨은 그러한 책들에 대해서도 애정이 많았던 듯하다. 여러 삽화가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작품에 대해서 알려주었는데 고전에서 익숙했던 작가들과 작품들이 많아서 더 반갑게 느껴졌다. 당시엔 그것이 새로운 창작품이었겠지만 지금은 고전과 함께 하나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었으니까.


이 책은 장서가, 책 수집가들에게는 고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장서가는 아니기에 단지 그로부터 책에 대한 정보와 이야기, 그리고 책에 대한 애정을 느끼는 선에서 만족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야기가 현대의 우리에게 와닿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잘 이해하기에 시대를 넘어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수집가의 부류는 진귀하고 아름다운 책의 종류만큼이나 많다. 검소하지만 세상 물정에 밝은 이들은 르메르와 주조 같은 프랑스 서적상들이 한정판으로만 펴내는 예쁜 책들을 사들인다. 이런 서적상들이 다시 찍어낸 라로슈푸코의 초판본이나 피에르 보마르셰, 라퐁텐의 작품들, 몰리에르가 썼다는 시집을 비롯한 여러 판본은 이미 절판되었고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윌리엄 새커리가 쓴 잡문집의 작은 판본(초판본은 노란 종이 표지로 싸여 있다)은 기이한 유행의 변덕으로 갑자기 인기를 끌었으며, 그리 높지 않던 책값은 스무 배나 뛰어올랐다.

문외한들은 묻는다. “때 묻고 낡은 책에 그 많은 돈을 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3실링이면 현대에 재간행된 깨끗한 책을 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수집가는 이런 질문에 대해 스스로 만족할 만한 대답을 적어도 몇 가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책 수집의 매력은 대개 감상적인 측면에서 나온다. 고서들은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문학적 유물로서 신성하고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이는 종교의 신자들이 종교적 유물을 신성하게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상이 책 수집에 대한 우리의 변명이다. 그러나 책 수집이라는 취미를 변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위대한 수집가들의 이름, ‘훌륭한 책 사냥꾼의 이상理想’을 나열하는 일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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