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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May 27. 2024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 이 글은 네이버 e-북카페에서 제가 함읽으로 진행하면서 발제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말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전에도 몇 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사실 저는 SF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SF 작품들의 설정과 상상력은 놀랍지만 때론 그것이 손발이 오그라들게 하기도 해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드 창의 단편집들을 함께 읽는 소모임을 열게 되었네요.


굳이 테드 창이어야 했을까 싶지만, 저 역시도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몇 년 전에 사놓고도 아직 못 읽었다는 것이 함읽을 시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읽고는 싶지만 그냥 손이 잘 가지는 않았어요. 


아마 저 같은 분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책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시는 분들도 많고, 관심을 가지는 분들도 많죠. 이번 기회를 통해 이 책을 함께 읽어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바빌론의 탑


이 책의 가장 앞에 수록된 작품인 "바빌론의 탑"은 생각보다는 가볍게 읽어 나갈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테드 창의 명성(혹은 악명)을 기대하고 이 작품을 접했다면 다소 당혹감이 느껴지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디가 SF적인 요소가 있는 걸까 싶어서요.


바빌론의 탑, 혹은 바벨탑으로 알려져 있는 이 전설의 탑은 성경의 <창세기>에 등장합니다. 인간들은 하늘에 닿기 위해 탑을 쌓았는데 야훼가 인간들의 오만함을 심판하기 위해 인간들의 언어를 다르게 만들어 결국 분열을 일으켜 탑을 세우는 과정이 무산되고 말았죠.


성경의 얘기대로라면 우리는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고, 그 자체가 스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테드 창은 그러한 것을 두 가지 방법으로 뒤집었네요. 한 가지는 탑이 계속 건설되었다는 가정을 세웠고, 그 과정에서 인간들의 삶의 모습을 언뜻언뜻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힐라룸이라는 주인공이 있기는 하나 사실 존재감이나 중요성이 그렇게 크진 않았고, 인류 전체를 하나의 주인공으로 볼 수 있을 듯해요.


그러면서 야훼가 과연 인간들을 심판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궁금증을 야기시킵니다. 작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희망적으로 보았고, 그래도 혹시 몰라 물로 심판하거나 혹은 잘못되어 호수 밑바닥이라도 뚫게 될까 봐 대비를 합니다.


탑을 만드는 과정, 그리고 그러한 대비 과정 등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잘 그려낸 것 같아요.


그가 이 이야기를 뒤집은 두 번째 방법은 말미에서 나옵니다. 이건 읽으면서도, 그리고 바빌론의 탑에 대해서 생각하면서도 상상도 못 했던 것인데요, 그는 차원에 대한 장난(?)을 침으로써 충격을 줍니다. 즉, 하늘을 향해 직선으로 쭉 뻗은 것 같았던 탑이 실제로는 루프를 형성했다는 가정인데요, 이는 1차원이 고차원으로 펼쳐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 이상의 차원은 어떤 형태로든 말려있어서 1차원에서는 인식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죠.


이 부분에서 저는 탑 자체가 실제로 루프를 형성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작가는 원통을 굴리는 것으로 차원의 붕괴를 설명했지만 저는 그러한 방식과는 다르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끈이론에서 잉여차원이 어떻게 3차원 안에 말려 있을 수 있는가라는 논란과도 유사하게 느껴집니다. 어쨌거나 저차원에서는 고차원을 인지할 수 없으므로 그냥 그러한 루프를 이루었다 정도로 밖에 해석할 수 없을 듯해요.


이 단편은 테드 창의 데뷔작이기도 한데요, 그는 이 작품으로 23세에 최연소로 네뷸러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화려한 데뷔였죠.


이 작품은 그래도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약간 몸풀기 격이었던 듯합니다. 그의 현란한 작품 세계는 그다음 작품인 "이해"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이어지는 듯해요. (이 작품에 수록된 작품들이 집필 혹은 발표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해


"이해"는 뇌손상으로 인해 뇌신경재생 치료를 받은 환자가 초지능을 갖게 되어 세상을 쥐락펴락하려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SF에서도 많이 다루어졌기에 그저 진부한 클리셰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이 작품에 나온 내용의 대부분은 말도 안 되는 설정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따지고 들 생각은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그러한 설정을 어떻게 뒤집고 독자에게 뒤통수를 칠 것인가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첫 작품에서 약간 그런 것을 느꼈기에 일단은 그의 서술을 그대로 따라가 보자 싶었죠. 중반부까지는 딱히 이렇다 할 내용은 없었습니다. 주인공인 그레코의 중2병스러운 모습이 오글거리긴 했고, 모든 것들이 그가 의도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도 딱히 긴장감을 만들어내진 못했던 것 같아요. 곳곳에서 해킹과 같은 얘기가 잠깐 나오지만 그러한 것이 SF적인 요소라고 할 수도 없겠죠.


그런데 이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게슈탈트'입니다. 저도 이 단어를 많이 들어는 봤지만 정확한 의미는 몰라서 찾아봤는데요, 이는 심리학, 철학 등에서 부분이 모여서 된 전체가 아니라, 완전한 구조와 전체성을 지닌 통합된 전체로서의 형상과 상태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즉 주인공은 자신의 지적 능력과 확보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이용해서 그러한 완전한 상태를 만들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중반부 이후에 레이놀즈라는 라이벌(?)이 등장하면서 분위기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이 부분부터가 흥미로웠고, 아마 더 복잡하게 느끼셨을 수도 있을 듯해요. 


레이놀즈는 그레코와 대등한 혹은 그보다 더 나은 능력을 확보하고 있었고, 그는 인류의 공동선을 위한 방향으로 그 능력을 활용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레코는 그 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자 했죠. 결국 둘의 대결은 불가피했고, 마침내 조우하게 됩니다. 그리고 타협이 불가능함을 확인하고는 서로에게 공격을 가해 (물리적이 아닌 정신적 혹은 신호를 통해) 상대방을 없애려 하죠.


마지막에서 주인공이 그러한 상황이 되는 것을 저는 정신적으로 급격한 자가면역반응 혹은 사이토카인 폭풍과 유사한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암시에 의해 촉발된 대응이 그러한 결과를 야기한 것이라고요.


물론 이 부분의 이해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게슈탈트를 인식할 수 있는 관점을 획득한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을 뒤집은 말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이해한다. 고로 나는 붕괴한다"라고요. 일반인이라면 통하지 않았을 그 반응이 그에게는 오히려 약점이 되었고, 레이놀즈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일본에서 흔히 쓰는 표현 중에 '게슈탈트 붕괴'라는 것이 있는데요, 이 말이 이 작품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니지만 또 유사성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과연 테드 창이 그러한 것을 알고 있었을까 싶기는 하지만요. 게슈탈트 붕괴는 학문적으로 인정이 되거나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관해서 보면 흥미롭기도 합니다. 


또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저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가 떠오르기도 했고, 제가 좋아했던 라노벨인 <풀 메탈 패닉!>이 떠오르기도 했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이 작품들을 아시는 분들이라면 다소 그렇다고 느끼실 수도 있을 듯해요. 




0으로 나누면


사실 하드 SF에 대해서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그 내용 자체에 대한 어려움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왜 언급되었는지, 작품 내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파악하기 난해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대체로는 상징성을 위해 비유의 대상처럼 언급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경우도 많은 듯하네요. 


'0으로 나누면'은 생각보다 짧은 단편이었는데요, 원래는 1991년에 한 SF잡지에 투고했던 것을 나중에 이 단편집에 수록한 것이라고 하네요. 그의 초기작 중 하나이며 상당히 독특한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짧은 단편임에도 전체가 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은 1, 1a, 1b 이런 식으로 또 구분되어 있습니다. 각 장은 수학의 완전성에 대한 논의로 시작하고, a는 르네, b는 칼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러한 교차 편집으로 인해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요, 수학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작품의 줄거리와는 별개로 볼 수 있기에 그 부분은 없어도 무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a와 b의 르네와 칼의 이야기만 봐도 무리는 없으니까요.


다만 그가 수학의 완전성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한 것은 수학의 특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학은 공리-정의-정리에 의한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 중 공리는 증명이 불가능한 것이며, 수학의 기초 중에서도 가장 기초가 되는 약속입니다. 공리가 필요한 이유는 수학에서 모순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인데요, 인지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리고 대부분 정규교육과정에서는 배우지 않지만) 수학의 모든 부분은 그러한 공리의 모음인 공리계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연수는 페아노 공리계에, 유클리드 기하학은 힐베르트 공리계에 기반하고 있죠. 네, 본문에서도 나온 힐베르트 맞습니다. 힐베르트는 특히나 수학에서의 그러한 문제와 공리들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했었죠. 


그런데 그러한 공리는 일종의 약속이며 그것들로 인해 수학의 질서가 잡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공리가 무너지면 수학 자체가 무너집니다. 다행히 그러한 공리가 깨지는 일은 아직까지는 없었고, 사실은 그러한 공리를 벗어난 수학을 할 수가 없고 또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이단으로 여겨지는) 그러한 체계가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러셀과 화이트 헤드는 최소한의 공리와 논리학을 이용하여 수학을 재구성하고자 하였으며, 그것이 그 유명한 (악명 높은) <수학 원리>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대부분의 수학자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그러한 것이 불가능함을 증명했죠. 


여담으로, 그렉 이건의  단편소설 중에서 '루미너스'라는 작품은 그러한 공리가 무너지는 발칙한 상황에 대해서 그리고 있는데요, 아주 기발하면서도 스릴감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의 작품 중에서 제가 가장 재밌게 읽었던 작품이었고, 공리에 대한 얘기만으로도 그러한 스토리를 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정말 천재적이라고 느꼈습니다. 


반면 테드 창의 '0으로 나누면'은 기대가 좀 커서였는지 수학에 대한 내용 자체로는 사실 특별한 것이 없어서 실망이었어요. 대신,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는 점에서, 제가 테드 창의 작품들을 읽으며 '인간미 있는 SF'라고 느꼈던 것을 더 강화하게 되었네요.


르네가 1=2라는 것을 증명해 내곤 자신이 완벽하다고 느꼈던 것이 모순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한 충격으로 자살 시도도 하게 되고, 정신병동에 입원하게 되었죠. 남편인 칼도 이전에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어서 르네를 이해해보려고 하지만 결국 그는 르네를 이해하지 못하고 헤어질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눈치채셨을는지 모르겠지만, a와 b 각각 진행되던 이야기는 9장에 이르러서는 9a=9b라는 인덱스가 붙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작가의 의도가 궁금했습니다. 분명 a와 b는 같은 것이 아니었고, 둘이 다르다는 것처럼 느꼈거든요. 그런데 느닷없이 9a=9b라니, 이것은 마치 1=2라는 것처럼 당혹스럽고 이해가 안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1=2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9a=9b가 모순이라고, 즉 르네와 칼이 서로에 대해 동질감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모순인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게 이 작품의 포인트인 것 같아요.


마지막에서 "칼은 르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자기도 정확하게 알며, 그 자신도 그녀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것은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 떼어놓는 종류의 감정이입이었고, 그녀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그러한 의미일 것입니다.


그럼 제목이 왜 '0으로 나누면'일까요? 작품의 서두에서 나왔듯 0을 제외한 어떤 수를 0으로 나누는 것은 정의되지 않으며 불능입니다. 이는 1=2라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한다고 하였는데요, 불가능한 어떤 것을 가능한 것처럼 속이는 행위를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럼으로써 그 과정 자체가 불안정해지고 모순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르네의 사고에도 영향을 미처 무너지게 한 것 같아요. 마치, '이해'에서 그레코가 '이해해' 한 마디에 무너진 것처럼요.


완전해 보이는 수학에서도 그러한 불완전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하물며 인간관계에서의 불완전성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인간관계에서의 공리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무너지게 되면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는 의미일 테니까요. 어쩌면 두 사람이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다고 여겼던 것은 그러한 모순과 기만에 기반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네 인생의 이야기


다음으로 '네 인생의 이야기'는 좀 더 긴 중편소설입니다. 영화 <Arrival (국내 개봉명은 '컨택트')>의 원작으로 많이 알려져 있어서 아시는 분이 많을 듯해요. 저도 이 영화를 봤었고, 상당히 흥미롭게 봤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홍콩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봤었는데요, 새벽 비행기였는데도 영화를 다 보려고 안 자고 버텼던 기억이 나네요.



소설의 내용은 대체로 영화와 비슷했지만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달랐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먼저 봐서 그랬을까, 작품을 읽으며 영화의 장면도 언뜻 떠오르기도 했었죠.


특히, 헵타포드의 모습이라든가, 그들의 글 (헵타포드 B)을 표현한 장면은 그러한 것을 영상으로 구현해 내는 것이 정말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래 장면이 헵타포드와 헵타포드 B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헵타포드의 초기 설정은 아래와 같았다고 하네요. 영화에서도 아랫부분만 나와서 윗부분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죠. 아래 그림을 보니 대략 이해가 되는데요, 그래서 본문에서 인간과 비슷한 모습이라고 했었나 봅니다. 이 콘셉트는 폐기되었는지 어쨌거나 그냥 아랫부분만 보입니다.


책을 읽으면서는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로키도 떠올랐는데요, 외계 생명체이자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지구인이 그의 언어를 배워가는 과정이 유사하게, 흥미롭게 느껴져서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헵타포드 B가 상당히 특이한 문자이며, 이 작품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정리된 것이 있어서 찾아봤어요. 그리기도 정말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작품 및 영화에서의 내용에 대한 얘기는 이쯤 하고 본문으로 들어가 볼게요.


이 작품의 스토리는 어찌 보면 단순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지구에 갑자기 '체경'이라는 외계물체가 나타났고, 거기에서 다리가 7개 달린 외계생명체가 나왔습니다. 인간들은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그들과 소통을 하려고 했고, 주인공인 루이즈 뱅크스도 언어학자로서 군에 협조를 하게 됩니다.


그는 그들의 언어가 말(헵타포드 A로 명명)과 글(헵타포드 B로 명명) 이 다르다는 점을 파악했고, 각각이 다른 이유를 알게 됩니다. 즉, 그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고 있으며 그것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말은 발화를 통해 그것이 완료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의미할 따름이었고요.


뒤에 창작노트에서도 잠깐 언급이 되는데요, 그는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의 트랄파마도어 행성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해가 되네요. 트랄파마도어 행성인들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고, 인간에 대해서도 탄생과 죽음이 같이 달려 있는 애벌레 같은 족속으로 이해하죠.


그렇게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모든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며, 그것을 볼 수 있기에 그들에게는 시간이란 의미가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루이즈도 그것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꿈 얘기 혹은 뭔가 관련이 있을 것 같지만 뭔지 모르는, 모호한 이야기처럼 나와서 궁금증을 자아냈죠. 결말에서야 그것이 루이즈의 미래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요)


그래서, 이 작품에서 교차 편집되어 있는 루이즈의 미래의 이야기 (사실 소설의 시작 부분과 끝부분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중간중간은 계속 미래의 자신의 아이에게 얘기해 주는 식으로 되어 있는데요, 그 역시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어요)를 통해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를 향해 나아갑니다. 즉,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선택하겠는가라는 점이죠. 말미에서 루이즈는 같은 선택을 합니다.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에서 미래를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죠. 이는 그리스 신화의 예언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간을 동시에 보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측면에서는 물론 현재까지의 지식체계와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양자중력학적인 관점에서 시간이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떠한 상태가 나열된 것일 뿐일 수도 있기에 그러한 것도 가능할 수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겠죠.


또한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도 중요하게 언급됩니다. 빛은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이 고전적인 관점에서의 해석이고, 이를 변분법으로 계산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미분학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걸 보면서 (저도 아무래도 현대물리학에 더 익숙하기 때문에) 파인만의 해석을 떠올리게 되었지만, 작가는 의도적으로 고전물리학적인 해석으로 국한했습니다. 그것이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더 가깝기 때문이었겠죠.


그러다가 그들은 갑자기 지구를 떠납니다. 왜 왔는지도 모르겠지만 왜 떠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렴풋이 드는 생각은 지구인들에게 그러한 시간에 대한 개념을 다시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인간의 인과론적 사고에 전환을 시켜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들은 지구에 와서 인간에게 해를 끼친 것은 없으니까요. 


물론, 인간으로서는 소득도 없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루이즈의 경우에는 깨달은 것도 많고, 배운 것도 많고, 남편도 얻었으니까 얻은 건 많겠네요. 


결론적으로, 이 이야기에서는 언어학, 물리학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한 사람의 삶을 재조명함으로써 우리의 인생과 결정론적 미래에 대한 고찰을 하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일흔 두 글자


먼저 "일흔 두 글자"는 중편소설이고 분량이 꽤 긴 편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작품 안에 꽤 많은 주제들이 담겨 있었죠. 제가 파악했던 소재 혹은 주제들은 다음과 같아요.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상당히 비과학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골렘

2. 히브리어

3. 전성설

4. 우생학

5. 열역학

6. 카발리즘

7. 러다이트 운동


이 밖에도 더 있을 수 있지만 일단은 이 정도로 파악했습니다. 


작품의 배경은 19세기 초반의 영국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과학이 발전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과학기술의 수준이 낮았죠. 또한 산업혁명 직후라 사회적으로도 좀 혼란스러운 면도 있었고요.


일단 작품의 첫머리부터가 좀 당황스러웠어요. 저는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 움직인다는 것을 보고 실제로 있는 어떤 것인가 싶었는데 이는 작품의 설정을 위한 장면인 것 같습니다. 주인공 로버트 스트래튼은 어릴 때부터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여 움직이게 하는 것이 관심을 가졌고 명명학자가 됩니다.


이름이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원리는 중학교 4학년 수업시간의 '이름의 원칙'에서 나와 있는데요, 사물에 신을 반영하듯 신성한 이름을 부여하여 초자연적인 힘을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연히 비과학적이고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이 작품 내의 세계관에서는 그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게다가 부적으로서의 효과도 있어서 그런 것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고 했죠)


이는 히브리 전설의 '골렘'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요, 골렘은 아마 많이 들어보셨을 것 같습니다. 이는 돌이나 진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에 신비한 힘(마법?)을 불어넣어 생명력을 갖게 한 것인데요, 이 작품에서는 그것을 이름의 힘으로 보았습니다. 유기물 혹은 무기물에 적절한 이름을 부여하여 생명력을 갖게 하며, 적절한 이름을 부여하면 복종시킬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적절한 이름을 찾는 것이 중요했고, 명명학자라는 전문적인 직업도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왜 제목이 <일흔 두 글자>일까요? 이 얘기는 작품 내에서 두 번 언급이 됩니다. 한 번은 아래의 문장입니다.


로버트는 그 이름들을 세밀하게 살피며, 사족 보행과 이족 보행을 구분해 주거나 인형 동체로 하여금 단순한 명령에 따르게 만드는 단순한 대입들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두 개의 이름은 완전히 달라 보였다. 각각의 양피지에 여섯 개의 문자 12열로 이루어진 일흔두 개의 조그만 히브리 문자가 각인되어 있었지만, 그가 판단하는 한, 문자들이 늘어선 순서에서는 어떤 규칙성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로버트가 위기에 처했을 때였죠.


그는 코트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작은 노트와 연필을 꺼냈고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페이지의 일부를 작게 떼어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완전히 암기하고 있는 일흔두 글자의 조합을 그 위에 썼고, 종이를 네모난 사각형으로 잘 접었다.


그런데 첫 번째 언급과 두 번째 언급이 동일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단 히브리 문자 6x12 조합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겠고,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두 번째 언급에서도 그게 히브리어인지도 모르겠고요. 하지만 히브리어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는 있겠습니다. 그 글자들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알려주지는 않는군요.


왜 히브리어일까요? 일단은 골렘의 유래가 유대인들에게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테드 창은 이전의 "바빌론의 탑"에서도 그렇고 중동 쪽 전설을 모티브로 한 것들이 여럿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어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듯해요.


그리고 신에 대한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것이 SF의 요소로 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의 작품들은 여러 면에서 기존에 SF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을 새롭게 합니다.


이러한 설정은 뒤에 카발리스트인 로스를 통해 '신의 만물 창조 원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집니다. 즉, 단순히 사물에 이름을 통해 생명력을 불어넣는 수준을 넘어 신의 관점에서 보고자 했던 것이죠. 그러나 '신의 능력'을 인간이 갖게 되는 것에 대한 경고도 덧붙여집니다. 신의 창조 원리에 대한 내용은 로버트와 애시본의 대화에서도 언급된 바가 있었는데, 아무튼 명명과 창조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하려는 듯했네요.


여기에 무기물뿐만 아니라 유기물, 더구나 생식세포까지도 명명에 의해 조작할 수 있음을 가정했습니다. 정자와 난자의 경우에는 좀 다르긴 하지만, 정자는 전성설을 그대로 받아들인 양상이었고, 난자는 명명을 통해 마치 수정된 것처럼 작동할 수 있도록 했죠.


그런데 난자나 기계에 이름을 부여하는 방법도 특이하고 흥미롭습니다. 각각마다 다른 방식으로 이름을 부여해줘야 하는데 이름뿐만 아니라 이름을 갖게 하는 방법도 중요하군요. 물론 작가의 상상력이긴 하지만요.


전성설은 정자나 난자 안에 이미 작은 사람 (호문쿨로스)가 들어 있다는 주장인데요, 이런 그림을 아마 보신 적이 있을 듯합니다.



당연히 비과학적인 이야기인데 여기에서는 이것조차도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정자와 난자를 사람으로 성장시켜 일반적 생식방법을 대체하겠다는 계획이 나오는데요, 이는 인류의 멸종을 막겠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상은 우생학적으로 이어져 '종족을 번식시킬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계층만 후손을 남기게 하겠다는 계획도 밝혀집니다.


로버트는 그러한 계획에 반발하여 그것을 무산시킬 방법을 찾게 되죠. 뿐만 아니라 로버트는 원래부터 이상주의자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자신이 만든 자동인형을 이용해서 각 가정을, 개개인을 더 풍요롭게 만들겠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이러한 자동인형에는 열역학의 원리가 적용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냥 설정이죠)


하지만 상황은 더 복잡해져 로버트가 만든 자동인형에 대해 반감을 갖는 인물들도 생깁니다. 대표적으로 윌러비를 들 수 있겠죠. 그는 로버트에 대해 반감을 가지다가 결국 그를 죽일 계획도 세웁니다. 


이 부분에서는 러다이트 운동도 생각나고요, 현재 우리들이 로봇이나 인공지능에 대하 두려움을 갖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이 작품에서 자동인형을 로봇으로, 명명을 인공지능으로 생각하신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러한 각각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이 작품을 좀 더 재밌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여러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뭔 소리야?'라고 하실 수도 있겠네요. 


후반부의 추격전은 이 작품에서 전환점이 되기도 하는데요, 지루하게 느끼셨다가 이 부분에서 흥미를 느끼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저자는 작품의 곳곳에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는 있지만 뭘 말하고자 하는지는 명확하진 않습니다. 앞의 작품들 보다는 주제가 좀 불명확한 것 같아요. 그러나 로스의 노트를 본 로버트를 통해 말미에서 그의 생각을 정리하는 듯합니다.


인간은 그 이름의 산물인 동시에 그 매개체가 될 것이다. 각 세대가 내용물인 동시에 그릇이 될 것이며,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반향 과정 속의 메아리로서 기능할 것이다.
스트래튼은 인류라는 종이 자기 자신의 행동이 허락하는 한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는 날을 머리에 그려보았다. 번영도 몰락도 오로지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서만 결정되고, 미리 정해진 종의 수명이 다했다고 허망하게 멸종해버리지 않는 날을. 다른 종들은 지질학적인 계절 속에서 꽃처럼 피고 지는 일을 거듭하겠지만, 인류는 스스로 원하는 만큼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특정 집단도 다른 집단의 출산율을 통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생식 면에서 자유는 개인의 몫으로 남을 것이었다. 로스는 설마 자신의 통명이 이런 식으로 쓰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겠지만, 스트래튼은 카발리스트가 이것을 가치 있는 일로 여겨주기를 희망했다. 이 자명의 진정한 힘이 밝혀질 무렵, 전 세계에는 이미 몇백만에 달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대가 이 이름에 의해 생겨나 있을 것이고, 그 어떤 정부도 이들이 자식을 낳는 것을 통제할 수 없을 터였다.


아마도 인간이 자신들이 가진 기술을 이용해서 더 번영을 누리며 누군가에게 통제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싶었던 것이겠죠. 그리고 자동인형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발전해도 그것들은 인간들이 걱정하는 만큼의 수준은 안 될 것이고, 단지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려는 것이겠죠. 골렘이 말을 할 수 없으므로 골렘을 창조하지 못하는 것처럼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발전해도 그것들이 스스로를 복제하여 인간을 지배할 일은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요.


테드 창도 아마 현재의 과학기술 수준과 미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불안과 희망을 19세기 초에 빗대어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인류 과학의 진화


그다음 작품은 소설인지 칼럼인지 혼동스러웠던 "인류 과학의 진화"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원래 <네이처>에 기고했던 글이고, 의도적으로 소설의 형식을 따랐지만, 소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칼럼의 형식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분량이 아주 짧았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네요.


2000년 6월에 <네이처>에 게재되었던 원문은 다음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제목은 "Catching crumbs from the table (식탁에서 부스러기 잡기)"로 되어 있고, 단편집에 실린 작품보다 좀 더 짧네요.


https://www.nature.com/articles/35014679


여기에서는 먼 미래의 일을 가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미래의 인류는 일반인과 메타인류로 나뉘게 되는데요, 메타인류는 일반인보다 더 높은 지능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디지털 신경 전이를 통해 일반 과학자들이 수준을 뛰어넘는 과학 수준을 갖게 되고, 결국 일반인들의 과학은 초지능을 가진 메타인류 및 그들의 과학을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일반 과학자들의 역할 역시 그러한 것에 국한될 것이고, 문헌해석, 제품해석, 메타인류 연구기관의 원격탐지 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즉, 메타인류가 남긴 잔재를 좇는 것에 불과할 테지만 그것도 인류를 위해서는 의미가 있을 거라는 얘기죠. 과학학술지의 역할도 그러한 수준이 될 것인데 그러한 역할이 과연 적절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메타인류들은 현재도 존속하는지 아니면 사라졌는지 그것은 불분명합니다. 두 인류가 공존하는 상황은 아닌 것 같아서요. 이는 마치 고대에 고도의 문명을 이뤘다고 믿어지는 종족들 (예를 들어 아틀란티스인들)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후 그 흔적을 찾으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혹은 높은 과학기술 수준을 가진 외계생명체에 대한 느낌이 들기도 했네요.


어쩌면 다소 디스토피아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도 흥미로운 내용이었어요.


이렇게 두 작품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요, 다른 분들께서는 이 작품들을 어떻게 읽으셨을지 궁금합니다. 두 작품은 모두 '인류의 미래'와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또한 "일흔 두 글자"에서는 다소 거부감이나 불쾌감을 느끼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비과학적인 것들을 하나의 설정으로 만들어 내용을 전개한 것을 보고, 'SF는 그 안에서만 논리가 맞으면 된다'라고 했던 말도 생각이 났네요. 테드 창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SF란 과연 뭘까?'라는 생각도 더 하게 되고요.




지옥은 신의 부재


"지옥은 신의 부재"도 다소 당황스러운 내용이었어요. 지금까지 여섯 작품을 봐오면서 그의 스타일에 익숙해진다 싶으면서도 다짜고짜 시작되는 당혹스러운 설정,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계관, 그리고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며 상당히 혼란을 느끼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만 그랬을까요? 


이 작품에서는 다음의 것들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계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1. 천사 강림 - 종교적 의미에서 천사가 강림하며, 강림하는 천사는 랜덤입니다. 또한 천사 강림 시 재앙이 일어나며, 사람들의 경우에는 기적을 경험하거나 혹은 재앙으로 인해 죽기도 합니다.


2. 지옥의 시현 - 때때로 지옥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지옥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신이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지옥은 신의 부재'인 것 같네요.


3. 임종 시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음 - 사람이 죽을 때 그 곁에 있는 사람은 그 사망자의 영혼이 천국으로 가는지 지옥으로 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것들을 바탕으로 작품이 그려지고 있고, 여기에 주인공 닐 피스크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야기에서는 재니스 라일리와 이선 미드라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덧붙여집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크게 무리가 없는 듯해요. 닐의 아내 사라가 천사 나다나엘의 강림 시 재앙으로 인해 사망하자 그는 절망감에 빠졌고, 신의 의도에 대해 의심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재니스는 선천적 기형으로 태어났지만 그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전도를 하였고, 천사 강림으로 인해 치유되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이선은 천사 강림을 경험하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자신의 체험을 해석하기 위해 재니스를 찾아갑니다.


이렇게 각각 다른 삶을 살던 이들은 결국 성지에서 만나게 되고 (닐과 재니스는 이미 접점이 있었지만) 천사 바라키엘의 강림으로 인해 닐은 죽고, 재니스는 실명이 되며, 이선은 그 광경을 목격합니다.


닐은 비로소 신의 의도를 알게 되고 구원을 얻을뻔하지만 결국 지옥으로 가게 되고, 재니스는 여전히 전도를 이어갑니다. 이선의 경우에는 두 번의 천사 강림을 체험하였지만 신의 의도 대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자각하게 되어 그것을 전도하게 됩니다. 이는 '선악과' 문제로 야기된 인간의 원죄 문제로 환원되는 듯해요.


여기까지가 이 작품의 내용인데요, 적나라하게 종교적(기독교적)인 데다가 '신의 의도'와 '신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좀 더 일반화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죠.


지옥에 떨어진 닐은 육체적으로는 완전해졌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신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지옥에는 신이 없기 때문에 그는 고뇌에 시달립니다. 간절히 바라는 대상이 부재하는 곳, 그곳이 지옥인 곳이죠. 테드 창은 지옥의 모습을 그렇게 패러독스가 명백한 곳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닐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긴 해요. 그 역시 선천적 기형으로 태어났지만 그것에 대해선 불만을 갖지 않았었는데 (아예 없진 않았겠죠), 천사가 강림함으로써 아내를 잃었으니 원망이 컸겠죠. 그럼에도 그 이유를 알고 싶었을 것이고요. 하지만 바라키엘의 강림으로 인해 그가 죽음으로써 신의 의도를 갑자기 깨닫게 되는 건 설득력이 떨어지는 듯합니다. 뭐랄까, 마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느낌이랄까요? 재니스나 이선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 점에서 결말이 좀 억지스러웠어요.


그리고 천사의 강림 장면을 보며 저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사도(원래는 '천사; angels')가 지구를 공격하는 장면이 연상되었습니다. 이건 저만 그랬을까요? 


또한 잘 아시겠지만, 천사의 이름들은 모두 '~엘'로 끝나죠. 우리가 잘하는 천사의 이름으로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등이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천사들도 많이 있고 또는 새롭게 창작된 것 같은 수많은 이름들이 있죠. 그래서 우리가 잘 모르는 천사의 이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검색해 보니 나다나엘은 예수의 12 사도 중 한 명의 이름으로 나오고, 바라키엘은 그리스 정교회의 7 천사 중 하나로 나오네요. 즉 이 이름들을 차용하기는 했지만 정확히 기독교적 세계관과 일치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쨌건 SF인 줄 알았는데 종교적인 이야기였네요...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다큐멘터리


마지막 작품인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다큐멘터리"는 마치 여러 사람을 인터뷰하듯 (인터뷰와 토론, 유세, 광고, 뉴스에서의 내용, 그리고 개인적인 발표 등이 뒤섞여 있는 듯합니다만) 쓴 글이라 다소 산만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제목에 굳이 '다큐멘터리'라고 하지 않았더라도 됐을 듯한데, 그 구성을 그런 식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을 강조하는 듯하네요.


그런데 번역본의 제목이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인 반면 원제는 'Liking what you see'인데요, 직역하면 '보이는 그대로 좋아하기'가 되려나요? 이는 보이는 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장치(?)인 '칼리아그노시아(약칭 '칼리')'를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작품의 내용은 각 대학에서의 칼리의 사용 의무화에 대한 찬반 논쟁, 그리고 그 경험담입니다.


원래 칼리는 기형 또는 다른 원인으로 인해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아이들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도록 개발된 것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나마 SF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듯하며, 구성이 좀 산만하긴 해도 읽는데 어려움은 없었던 듯해요. 주인공격인 타메라 라이언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그 사이에 여러 사람들의 발언이 이어집니다. 많은 이들이 나오지만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타메라 - 학생, 칼리 반대, 칼리 끔, 자신의 미모를 깨달음

마리아 - '철저한 평등 요구' 학생회, 칼리 찬성 

조지프 - 신경학자, 칼리 찬성, 주로 칼리의 원리를 설명 

리처드 - 세이브룩 설립자, 칼리 도입

레이철 - 타메라의 엄마, 칼리 찬성

마틴 - 타메라의 아빠, 중립적

제프 - 학생, 칼리 반대

아데시 - 학생, 칼리 찬성

월터 - 전국 칼리아그노시아 협회 회장, 칼리 옹호

아니카 - 학생, 칼리 반대

졸린 - 학생, 칼리 찬성

워렌 - 학생, 칼리 찬성

알렉스 - 종교학과 교수, 입장 모호함

대니얼 - 비교문학 교수, 칼리 반대

마크 - 학생, 칼리 반대

캐시 - 학생, 칼리 반대

로런스 - 학생, 칼리 찬성

로리 - 학생, 칼리 반대

엘런 - 사회학과 교수, 칼리 반대


결국 칼리 의무화 조치에 대한 투표는 반대표가 더 많아 무산되었지만 그 투표 결과에는 오히려 광고를 본 시청자들에게 영향을 준 프로그램의 영향이 있었으며, 칼리를 끄고 자신의 미모에 대해 자신감을 느끼던 타메라가 다시 칼리를 켜는 것을 고민하며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작품은 우리가 보는 것의 진실은 무엇인가, 아름다움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나아가 우리의 감각이라는 것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도 하죠. 그 가운데서 평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얘기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테드 창은 칼리가 실용화된다면 그것을 시험해보고 싶다고 했는데요, 과연 여러분이라면 그것을 시험해 보실 건가요? 저는 아마 안 할 것 같습니다. 마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의 눈뜬 자처럼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있는 그대로를 느끼고 싶으니까요.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또는 주관적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속고 있다는 느낌은 덜 들 것 같아서요. 




저는 테드 창과 그의 작품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어서였는지 여러모로 의외였습니다. 하드 SF라고 해서 과학적인 요소들이 난무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신, 언어, 사랑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뤄서 당황스럽기도 했고요, 읽는 내내 '이것이 SF인가?'라는 의문이 계속되었습니다.


더구나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되는 낯선 세계관, 비과학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전개로 인해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각각의 작품 속에서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들은 느낄 수 있었어요. 


그는 신의 의미에 대해서 고찰하고 싶었고, 언어의 본질에 대해서 파고들었으며, 게슈탈트를 추구했죠. 그리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붕괴시키거나 혹은 마비시킴으로써 우리의 생각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는 바빌론 사람이자 그레코였으며, 르네이자 루이즈, 로버트이자 닐이었다고 느껴지네요. 왠지 자신의 생각들을 하나씩 작품으로 내놓느라 그렇게 집필에 시간이 오래 걸린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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