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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May 27. 2024

테드 창 <숨>


* 이 글은 네이버 e-북카페에서 제가 함읽으로 진행하면서 발제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말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제일 먼저 나온 작품은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이었습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도 제일 먼저 나온 작품이 "바빌론의 탑"이었는데요, 두 작품은 중동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과거의 어느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바빌론의 탑"은 공간을,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시간을 뒤튼다는 점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듯합니다.


이 작품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고, 약간 판타지 같으면서도 우화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쉽게 읽으셨을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푸와드 이븐 압바스라는 사람이 대교주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과거에 그는 시장에서 연금술사를 만나게 되고, 그가 만든 '세월의 문'을 통해 과거로 갈 수 있게 되죠. 


그 연금술사는 그 '세월의 문'을 통과한 사람들 (하산, 아지브, 라니야)라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세월의 문'을 통과하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며 또 경고도 덧붙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통해서 조금 혼동이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고 했는데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과거를 바꾼 것일까요 아닐까요? 


사실 이러한 타임리프물에서는 과거의 사건의 변경 가능성에 대한 패러독스, 그리고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간의 패러독스가 발생하게 되는데요, 이 작품에서도 그랬던 것 같아요. 


결국 그도 '세월의 문'을 통해 자신이 가장 통탄했던 시간으로 가려고 하지만 과거를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예정되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그 경험을 통해 알라의 의도를 깨닫게 되고, 구원을 얻었다고 느낍니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것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 그것이 작가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줄곧 바샤라트가 한 말이 얼마나 옳았는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더 잘 알 수 있을 뿐이다. 과거로의 제 여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제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알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관객이고,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살아감으로써 그것이 전해주는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이 책의 표제작 이기도 한데요, 사실 제목에 대해 의문이 있었습니다. 원제대로 하면 'Exhalation'은 '날숨'입니다. 즉, 내쉬는 숨이죠. 그런데 우리말로는 굳이 그냥 '숨'이라고 했습니다. 저자가 날숨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이 작품을 읽고 알 수 있었습니다.


테드 창의 스타일에 조금 익숙해졌다고 해도, 첫머리부터 다짜고짜 자신이 만든 세계를 당연시하면서 얘기하는 것은 여전히 당혹스럽습니다. 일단 머릿속으로 그 세계, 등장인물(?)들을 상상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니까요.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기에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들이 다 들어 있네요.


공기 혹은 아르곤이라고 불리는 기체가 생명의 원천이라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사실이 아니며, 나는 내가 진정한 생명의 원천과, 그 당연한 귀결로서 생명이 맞이하게 될 종언의 방식을 어떻게 이해하게 됐는지 설명하기 위해 여기 이 글을 새긴다.


공기 중에 아르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데 여기에서는 공기=아르곤입니다. 아르곤은 잘 아시다시피 원자번호 18번의 비활성가스죠. 그런데 왜 이렇게 얘기했는지는 뒷부분을 더 읽어야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인간이 아닌 휴머노이드입니다. 인간은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휴머노이드들을 만들어놓고 멸종한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휴머노이드만 있는 세계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이 휴머노이드들은 몸체가 티타늄으로 되어 있고, 알루미늄으로 만든 폐 (두 개의 원통으로 이루어진)를 하루에 한 번씩 교체하면서 살아갑니다. 휴머노이드가 왜 굳이 그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의문이지만 이 역시도 좀 더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휴머노이드들은 그 공기를 이용해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휴머노이드라고 하면 메카트로닉스가 더 연상되지만 여기에서는 순수히 기계적으로만 움직이는 것으로 설정했고, 기계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공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금속과 반응을 하면 안 되니까 아르곤으로 했을 것이고요.


이러한 기압식 장치는 일반적으로 액추에이터 형태로 많이 이용되지만, 치과용 공구처럼 모터와 유사하게 작동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인공인 해부학자는 뇌의 작동 방식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집니다. 사실 전자부품이 없는 상태에서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이 궁금했는데요, 테드 창은 아주 기발한 방법으로 그것을 설명했군요. 저는 그가 자신의 머리를 해부하는 과정, 그리고 뇌의 작동 방식을 보여주는 부분에서 가장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러한 것도 인간의 두뇌에 대한 기계적 모사라고 할 수 있겠네요. 결국 기억, 인지기능에서도 공기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렇듯 공기, 공기의 흐름(플루언스)이 중요하기 때문에 제목에서도 숨, 그중에서도 공기가 흐름을 통해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신체대사를 의미하기 위해 날숨이라는 제목을 쓴 것 같네요.


하지만 날숨이라고 얘기한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날숨에 의해 기압이 점점 더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죠.


애초에 그가 뇌의 작동 방식을 연구하기로 한 건 시계종이 빨리 울리는 현상 때문이었는데 그는 이것이 인지과정이 느려졌기 때문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 건 '공기 그 자체가 아니라 기압차이가 생명의 원천이라는 것'이죠. 


휴머노이드는 내장된 공기탱크를 통해 움직이기 때문에 외부에 공기가 있건 없건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건 생명체와는 다르죠. 하지만 휴머노이드들이 내쉬는 숨에 의해 기압이 점점 더 올라가게 되고, 그 결과 외부와 내부의 기압차이가 줄어들면서 (즉, 그라디언트가 감소하면서) 유속이 감소하게 되었고, 결국 인지기능도 감소하게 되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이점에서 약간 의문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기탱크에서 일정한 압력으로 계속 내보내는 장치가 없이 자연확산으로만 공기가 이동한다는 것일까요? 일단은 공기탱크가 고압이기 때문에 기압보다는 당연히 높고, 기압이 올라간다고 해서 그것의 영향이 그렇게 클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죠. 공기탱크 내부 압력 및 내보내는 공기압력의 감소할 것인데 그것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기능이 없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요. 


게다가 만약 유속의 감소가 유의미하게 영향을 미칠 정도라면 인지기능뿐만 아니라 신체기능 자체가 느려져야 하거나 혹은 오작동하게 될 것이고요. 아직은 그러한 수준까지는 안 갔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고 있죠.


또한 공기가 아르곤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그 공기가 신체를 움직이는 용도로만 사용된다면 공기 중의 아르곤을 회수해서 다시 압축공기탱크로 넣는 과정이 그가 말한 대로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현실 세계에서의 인간의 호흡은 산소를 이산화탄소로 변환하는 과정이지만 여기에서는 얘기가 다르니까요. 그리고 그 아르곤 가스는 어디에서 얻은 것일까요? 애초에 공기 중에 있던 것이 아니었나요?


그는 기압이 증가하는 것에 대해 우주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자연적인 현상이고 절대로 감소할 수 없는 물리적 법칙인데요, 그러한 비가역성을 얘기하기 위해 기압 역시 감소할 수 없음을 억지로 얘기한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전작의 "인류 과학의 진화" 만큼이나 짧으면서도 이상한(?) 내용이네요. 여기에서는 '예측기'라는 것이 나옵니다. 이는 버튼을 누르는 순간을 예측해서 1초 먼저 LED 불빛을 반짝거리는(네거티브 딜레이 회로에 의해), 아주 단순한 장난감 같은 기기입니다. 그런데 그 예측기 때문에 '무동무언증'이라는 증상이 생겼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인데요, 이상하게도 1/3의 사람들만 그러한 무동무언증에 걸리고, 이러한 비율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누가 그러한 증상이 나타날지도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하고요. 이는 결정론적 우주관을 보여주기 위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내용을 보낸 주인공은 설령 자유의지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고 합니다. 그러한 기만행위가 문명을 존속하게 할 것이라고요.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창작노트를 봐도 작가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사실 저는 이 작품을 읽기 전에 꽤 힘든 작품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중편이라 분량이 많기도 하고, 제목부터가 뭔가 난해할 것 같은 느낌을 줬죠. '소프트웨어 객체', '생애 주기'... 이 두 단어만 해도 뭔가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읽고 나선 오히려 당혹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이거 테드 창 작품 맞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평이하고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전개였네요. 그래도 테드 창이니까, 뒤에서 또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생각을 했는데 그런 것도 없었어요. 마치 요즘의 김초엽 작가나 천선란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제목의 소프트웨어 객체는 디지언트라는, 일종의 전자생물(?)을 의미하고, 생애 주기는 말 그대로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다른 말로 하면 '디지언트의 인생' 정도라고 할 수 있겠어요.


디지언트는 디지털 유기체인데요, 귀여운 동물 형태라고 보입니다. 어떤 것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으실 거예요. 다마고치를 떠올리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동물의 숲' 같은 게임을 떠올리신 분들도 계실 듯합니다. 데이터 어스와 같은 환경에서 살도록 만들어졌지만 각 객체별로 독자적인 유전자를 갖고 있어서 그것이 어떻게 발현될지는 다소 랜덤 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 디지언트들은 아기와 같은 상태로 태어나 점점 자라게 되는데요, 마치 실제 동물을 키우는 것과 비슷한 과정을 거칩니다. 하지만 형태는 동물이어도 지능은 인간의 성장에 더 가까운 듯해요. 또한 마치 로봇과 비슷한 형태의 외피를 통해 외부 세계로 나와 반응하고 경험도 할 수 있고요. 인지 발달에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입니다.


애나는 사육사 경력이 있어서 그 디지언트들의 훈련을 담당하였고, 개인적으로 계속 키우기도 합니다.  데릭의 경우에도 그랬죠. 


하지만 그러한 성장은 더디고, 여러 가지 문제도 발생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용자들도 많이 줄어들고 회사도 문을 닫게 되었죠. 게다가 살아가는 세계라고 할 수 있는 데이터 어스마저 문을 닫게 되자 주인공들을 비롯한 뉴로블래스트디지언트 소유자들은 대책을 논의합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얘기들이 나오지만 결국에는 돈이 문제죠. 


데릭은 사람들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디지언트들에게 선택권을 주었고, 그로 인해 디지언트들은 성적인 대상으로 회사에 팔려나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들도 디지언트들이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의 하나로 보고, 인격체가 되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이 긴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게 단순한데요, 이 작품은 줄거리보다는 애나와 데릭이 디지언트들에게 갖는 애정과 관계가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마치 반려동물을 키우듯 (작품 내에서는 계속 '애완동물'이라고 나와서 눈살 찌푸리신 분들도 계실 듯합니다), 또는 아이를 키우는 듯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길 필요가 있었나 싶긴 해요. 


작가가 이 작품을 쓴 이유는 그러한 인공지능이 갑자기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능처럼 무의 상태에서 점차 발달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현재의 AI는 감정이 배제된, 정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감정까지 발달을 시키기 위해선 그러한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죠. 감정까지 학습을 시킬 수 있을까, 그건 지금도 진행 중이긴 하지만 학습된 것과 체득된 것 간에는 차이가 있겠죠. 그러나 그러한 것 역시 소프트웨어적이므로 한계는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작품에서도 설정이 좀 어설퍼 보이는 부분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 디테일한 부분까지는 신경을 덜 쓴 것 같아요. 


이 작품은 2010년도에 발표되었고, 2011년에 로커스 어워드 최우수 소설상과 휴고 어워드 최우수 소설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뭔가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생각보다는 몽글몽글하면서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구글 검색을 하다가 이 작품의 단행본을 스캔해서 올린 것을 발견했는데요, 단행본에는 각 챕터마다 이렇게 맵이 그려져 있고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 적어놓은 듯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지도에서 축적이 거리가 아니라 기간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통해 각각의 발달에 걸리는 시간을 추정해 볼 수 있을 듯해요. 이걸 보니 테드 창이 이 작품을 그냥 막 쓴 것이 아니라 이론적인 바탕 위에 체계적으로 쓰려고 한 것이 보이네요.


또한 원서의 각 챕터별로 나온 것을 정리해 보니 다음과 같아요.


Sensorimotor skills(감각/운동), Speech(언어)

Exploration(탐색), Curiosity(호기심)

Theory of Mind (마음이론)

Empathy(공감), Coping skills(대처)

Skill development(기술발달), Task Completion (임무완료)

Socialization (사회화)

Autonomy(자립), Personal Identity(정체성)

Sound Judgement(건전한 판단)

Responsibility(책임감), Integrity(통합)

Obligation(의무), Altruism(이타심)


더불어 각 챕터마다 삽화도 하나씩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중 가장 마지막의 삽화입니다. 이런 느낌이에요.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


가상의 인물인 레지널드 데이시는 19세기 후반 영국의 수학자인데요, 자동교습기를 개발하던 중 자기 아들인 라이어널이 보모에게 몰래 학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보모를 들였지만, 보모에 따라서 아이의 행동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그 편차를 없앨 수 있도록 인간 대신 기계가 보육을 대신하는 '자동 보모'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동 보모가 상용화되어 꽤 판매되었지만 사고를 일으켜 결국 시장에서 사장되죠. 물론 그것이 사용자에 의한 임의의 조작에 의한 것이었다고 해도 불신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그것을 포기합니다.


라이어널은 그 자동 보모에 의해 양육되었고, 성장한 이후에는 그것의 유용성과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래서 갓난아기 (에드먼드)를 입양해서 자동 보모를 이용해서 키웠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실험에 부적합했다는 이유로 금세 파양하고 요양병원에 보냅니다.


에드먼드는 왜소증에 정신박약이지만 제대로 먹지도, 반응하지도, 성장하지도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자동 보모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와는 반대로 그가 자동 보모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를 간파한 램셰드 박사는 라이어널에게서 자동 보모를 구매하여 자신의 가설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리하여 라이어널은 아버지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 것이 오히려 두 번이나 틀렸음을 입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번 틀린 것은 무엇일까요? 


창작노트를 보면 이 작품은 그가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니고 주제와 소재를 제안받고 그것을 쓴 건데요 그러면서도 테드 창의 여러 스타일들이 잘 나타나는 듯합니다. 일단 근대를 배경으로 한 점과 허구의 사건을 마치 실제 있었던 것처럼 묘사하는 점, 어떤 대상을 바탕으로 그것을 인간관계와 삶에 연결시켜 고찰하는 점 등이 잘 보였어요. 특히 그는 기계식 장치에 더 매료되어 있는 것 같고 (전작들에서도 대체로 순수히 기계적으로만 움직이는 장치들을 많이 언급했었죠. 


특히나 이 작품은 육아를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육아를 하고 계신 분들이 더 관심을 가지셨을 것 같아요.


또한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해리 할로우의 일명 '원숭이 애착 실험'이 떠올랐는데요, 아마 많이들 아실 거예요. 한쪽에는 철망에 젖병을 매달아 놓고 다른 한쪽에는 젖병은 없이 털로 덮인 망만 놓았을 때 아기 원숭이가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실험이었죠. 아기 원숭이는 젖병의 우유를 먹긴 했지만 그 외에는 털로 덮인 망에 달라붙어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원숭이나 유인원류, 그리고 인간까지도 애착과 스킨십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죠. 그는 이것이 부모-자식 간의 애착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사실은 그 대상이 반드시 부모-자식 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추가 실험들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원숭이들도 부모보다는 또래를 더 선호한다는 주장도 나오면서 이것이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양육가설>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됩니다.


그리고 육아하면서 일명 육아템들도 생각났네요. 저도 아이 키우면서 그런 육아템들을 구입하거나 빌려서 썼었는데요, 이런 자동 보모까지는 아니지만 그런 육아템들이 그나마 육아의 힘겨움을 조금은 덜어주기는 했었습니다. 물론 그중에 반 정도는 저희 아이에게 맞지 않아서 (아이가 좀 예민한 편이었어요) 무용지물이기도 했었지만요.


그렇다면 만약 이런 자동 보모가 있다면 (그리고 오류 없이 완벽하다고 한다면) 그 자동 보모에게 아기를 맡기실 수 있으실까요? 저는 요즘 시대에는 오히려 더 안 맡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귀족이나 부유층은 아이를 보모에게 맡기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오죽하면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는 것도 꺼려서 유모를 고용해서 젖을 먹였죠. 서민층에서도 아이는 내버려 두면 알아서 크는 대상이었지 (애정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잠재적 노동력이었을 뿐) 그렇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영유아 사망률도 높아서 많이 낳아 그중에 몇 명 건지는 수준이었고요. 이러한 양상은 과거의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출산율 자체도 낮지만 아이 한 명에게 들어가는 돈과 시간과 노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걸 단순히 편리함으로만 대체할 수는 없고, 부득이한 경우에도 사람을 고용하지 기계에 맡기지는 않을 것 같기 때문이에요. 더군다나 부모들이 경우 아이가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선 선뜻 그것을 선택하지는 못하겠죠. 그래서 배경을 19세기말로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리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라이어널은 왜 실패한 사례일까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습니다. 부모-자식 간 애착문제를 얘기하려고 한 것이라면 이는 인간 보모나 기계식 자동 보모나 상관없이 보모 시스템 자체의 관점에서 봐야 하지 않나 싶고요.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이 작품은 두 가지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됩니다. 한 가지는 주인공(이름이 안 나와있네요) 이 딸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1)이고, 다른 한 가지는 아프리카 서부 티브랜드의 한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2)입니다. 


1에서는 사람들이 보는 모든 것을 저장할 수 있고, 그것을 망막 프로젝터로 재생해 볼 수 있으며, 리멤이라는 프로그램으로 검색할 수도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학습하거나 기억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죠. 그리고 일상을 라이프로그로 남기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니다.


2에서는 지징가라는 아이가 선교사를 통해 읽고 쓰는 법을 배우게 되고, 그로 인해 글쓰기와 기록의 힘을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나오지만, 이 이야기는 1의 주인공이 가상으로 지어낸 얘기였네요. 저는 1과 2의 이야기가 나중에 어떻게 연결될지 궁금했는데 조금은 허탈하기도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2의 이야기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널리스트인 1의 주인공은 리멤의 부정적인 면을 다루는 기사를 작성하고자 그러한 사례들을 모으고, 또 리멤의 제작사 대변인과 인터뷰도 합니다. 그러면서 리멤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파악해 갑니다. 


라이프로그와 리멤을 통해 진실을 찾기는 쉬워졌지만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또 다른 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죠. 게다가 주인공은 딸과의 사건에 대해 자신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은 틀렸고, 그로 인해 딸을 오해했던 것이죠. 결국 그는 그러한 디지털적 기억의 진짜 혜택은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이게 중요한 포인트 같아요.


사실 저도 다른 사람과 마찰이 생길 경우, 정확한 사실 관계를 따져보기 위해 모든 상황을 녹화해 두는 장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치 비디오판독처럼요)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테드 창의 이 말이 더 크게 와닿았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관점에서 기억을 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기억을 왜곡하기도 하고,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게 됩니다. 그러한 기억의 왜곡은 좋은 방향으로도, 안 좋은 방향으로도 이루어지는데 어떠한 쪽이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가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고 해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요? 기억이 조작될 가능성 (여기에서도 기억의 조작은 가능한 것으로 나오지만, 이 경우 위조 여부를 알 수 있기는 합니다)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을까요?


이 작품의 제목이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인 이유는 진실의 양면적 속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 같아요. 라이프로그는 사실적 진실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감정적 진실입니다. 그것을 '사적인 구전문화'라고도 표현했고요. 그것이 설사 사실적 진실이 아니라고 해도 그에게는 그것이 정제된 진실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개인 간에 충돌한다는 점이죠.


이는 2의 이야기에서도 나타납니다. 그 부족은 어떤 일이 정확할 때는 '보우', 옳을 때는 '미미'라고 쓴다고 하는데요, 이를 통해 분쟁을 해결합니다. 원래 구전문화권이었고, 전통적인 방식은 미미를 따르는 것인데 지징가는 글을 알게 되고 정확한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보우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의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1의 주인공이 그 글을 쓰게 된 것이죠. 하지만 미미를 중요하게 생각할 때 기본 가정은 '옳음'이 무엇인지 명확히 안다는 것일 텐데 그것은 불분명합니다. 결국 거기에서 다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요? 그 부족에게 옳음은 분쟁을 가급적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일 테지만 그런 결과로 가기는 쉽지 않은 듯합니다.


결국 주인공은 리멤에 대해서 긍정적인 결론도, 부정적인 결론도 내리지 못합니다. 다만, 리멤을 통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피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라며 좀 더 긍정적인 쪽으로 결론을 내리는 듯합니다.


이 작품은 언뜻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마지막인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다큐멘터리"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거기에서는 '칼리' 사용에 대한 찬반 논쟁을 다뤘다면, 이 작품에서는 라이프로그와 리멤에 대한 찬반 (물론 등장하는 인물들은 적고, 주인공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생각이 주를 이루지만요)을 얘기하는 듯해요.


미래에는 이러한 시스템이 보편화될까요? 지금도 일부는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기록으로 남기는 경우가 많아졌으니까요. 데이터 저장과 전송, 그리고 재생 기능이 더 발달하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해서 아주 일반화되기는 어려울 것 같기도 합니다. 선택적인 문제가 되겠죠. 마치 블로그나 SNS처럼요.


또 다른 의문은, 원제가 'The truth of fact, the truth of feeling'인데요. 이걸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로 번역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점입니다. 뉘앙스대로라면 '사실의 진실, 감정의 진실'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해서요. 사실이나 감정이 진실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보려고 한 것이 원래의 의도에 더 부합하지 않을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거대한 침묵


짧은 이 작품은 읽으면서 사실 뭘 말하려는 건지 명확하지가 않았습니다. 단순히 지구에서의 생물들의 멸종을 얘기하려는 것이었을까요?


작품에서 의미하는 '거대한 침묵'은 페르미 역설을 의미하고 이는 '적대적인 침략자들의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기 존재를 감춘다'는 가설입니다. 우주에 생명의 흔적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인가 봅니다. 그런데 말미에서는 멸종해서 소리가 사라진 것도 거대한 침묵으로 얘기했네요. 결국 존재하거나 멸종하거나 어느 쪽이어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저는 이걸 보면서 <삼체> 시리즈가 떠올랐어요. 읽어보신 분들은 아마 그 작품을 떠올리셨을 것 같은데요, 이것이 핵심적인 소재이기도 했죠. 


그런데 여기에서는 우주에 대한 얘기는 아니고 지구 내에서의 이야기이며, 이야기를 하는 화자가 앵무새입니다. 앵무새들이 자신들의 멸종을 막기 위해 조용해지는 것을 택한다는 내용이에요. 이들 앵무새는 원래 발성학습자이자 의사소통(콘택트 콜을 이용해서)을 나눌 수 있는 지적 존재이긴 하나 멸종을 앞두고 침묵을 선택합니다. 그럼에도 멸종을 피할 수는 없죠. 하지만 우주에 대한 얘기가 또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건 인간들의 우주 탐색에 대한 얘기와 얽혀있거든요. 


마지막 부분에서는 앵무새들이 우주로 메시지를 보내고 인간들이 우주에서 그 메시지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되어 있는데요, 이는 우주 만물이 같은 원리로 창조되었으니 우주를 통해 인간이 앵무새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게 (위험을 회피하면서) 하겠다는 의도려나요. 


마지막 메시지 내용 '잘 있어, 사랑해'는 좀 생뚱맞은 느낌도 들고, 또한 여기에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돌고래들이 지구를 떠나기 전 남긴 '안녕,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라고 하는 대목이 떠오르네요. 그리고 <마지막 기회라니!>에서 나온 카카포도 생각났습니다. 카카포도 앵무새 종류였죠.


테드 창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이 짧은 작품에서 많은 다른 작품들을 떠올리게 되다니, 그래서인가 더 함축된 스케일이 느껴지면서도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도 역시나 저자의 언어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옴팔로스


이 작품은 종교적인 색채로 인해 거부감을 느낀 분들도 계셨을 것 같습니다. 테드 창이 이전 작품에서도 상당히 당혹스러운 세계관 (유사과학이나 비과학적인 것들이 사실 또는 현실이 되어 지배하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전개한 것들이 많았었는데요, 여기에서는 신에 의한 창조가 정설인 세계입니다. 단지 신학적인 이유에서 그런 것만은 아니고, 여러 가지 증거들이 그러한 것을 명백하게 뒷받침하고 있죠.


여기에서 나온 '나이테를 이용한 연대기 측정' 방법리처드 도킨스의 <지상 최대의 쇼>에서도 자세하게 설명된 바가 있어서 바로 캐치하신 분들도 계실 텐데요, 여기에서는 창조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로도 이용됩니다.


더욱이 나이테가 없는 부분, 배꼽이 없는 인간, 봉합선이 없는 인간의 두개골, 새끼였던 적이 없던 사슴의 대퇴골, 성장층이 없는 조개들의 이야기는 창조론이 사실이라면 있었을 법한 것들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당연히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창조론과 맞물리는 것이 지구의 우주 중심론인데요, 세상의 중심 또는 세상의 배꼽이라는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를 '옴팔로스 (또는 옴파로스로 표기)'라고 불렀습니다. 그러한 우주관은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확립되어 천동설로 이어졌죠. 그러므로 이 작품의 제목 자체에서 그러한 내용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구의 우주 중심론은 새로운 천문학적 발견으로 인해 위기를 맞이합니다. 즉, 우주에서 회전의 중심점으로 유일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지구가 아니라 에리다누스자리 58이라는 항성이 공전하고 있는 행성 (항성이 행성 주변을 돈다는 이런 말 자체가 모순이긴 합니다)이라는 것이죠.  신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가설에 지나지 않지만 그로 인해 신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도록 하는 움직임들도 있었고, 신앙심이 깊었던 주인공의 마음도 흔들리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또 '자유의지'가 등장합니다. 이것 역시 테드 창의 주된 관심 사항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작품 내의 세계관처럼 지구와 우주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설사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 되려고 했고, 신의 의도와 배치되더라도 스스로 우주의 중심임을 자부했습니다. 우주가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믿음을 갖도록 하면서요. 하지만 신의 계획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했는가에 대한 의문도 갖게 됐죠. 


주인공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왜'가 아닌 '어떻게'라는 답을 찾기 위해 하던 일을 계속할 것이라는 말로 마무리합니다.


여기에서 '왜'와 '어떻게'는 다른 수준의 질문인데요, 일단 가장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으니 그것을 일단 인정하고 그다음 수준의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죠. 이는 물리학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어떻게'는 말할 수 있어도 '왜'인지는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죠. 어떤 현상의 이유를 설명하더라도 계속 파고 들어가면 결국은 '모른다'로 귀결되며, 단지 그러한 현상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뿐이죠.


또한 기독교를 위시한 종교에서 신의 의도와 인간의 자유의지의 관계는 주된 논쟁의 대상이기도 했었습니다. 그것을 단순하게, 단편적으로 제시하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뒤의 결말에서는 그 연결이 좀 억지스러웠다는 생각도 듭니다. 비록 그 세계관 내에서 한정 짓는다 하더라도요.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양자역학에 대한 해석은 익히 알려진 코펜하겐 해석 이외에도 수십여 개가 제안되어 있는데요, 그 어느 것도 옳다고 증명된 바가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신봉하는 코펜하겐 해석조차도 가설일 따름이죠.


그런데 SF 소재 중에서 제가 제일 거부감이 드는 것이 양자역학에서의 다중세계 해석을 변질한 다중세계관인데요, 여기에도 파동함수의 확률적 분포(그로 인해 동시에 다발적인 존재 혹은 사건이 발생하거나)와 붕괴, 멀티 유니버스, 평행우주 등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그게 너무 억지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양자역학만 갖다 붙이면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이것이 SF 작가들에게는 너무나 강한 유혹이 되는 듯합니다. 그리고 테드 창도 그러한 유혹을 피해가지는 못했나 봅니다. 작품 내에서 그 원리와 설정을 아무리 그럴듯하게 써놔도 설득력이 없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일단 양자역학의 두 가지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양자 얽힘인데요, 작품에서 '프리즘'이 그러한 원리를 이용한 장치입니다. 이를 이용하면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 (혹은 관계있는 다른 사람)와 통신을 할 수 있다는 가정입니다. 양자 얽힘에 대해서는 연구가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 이런 단계를 논할 수준은 아닙니다.


다른 한 가지는 다중세계 혹은 평행우주입니다. 이는 양자역학의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것이 맞고 틀린 것을 떠나서 일단은 그냥 그 세계관을 인정하고 읽어야겠죠. 앞에서 계속 그랬던 것처럼요.


이 작품에서는 냇-모로, 데이나-비네사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며 전개됩니다. 그 기저에는 프리즘이 있어서 평행우주의 평행자아와 대화를 나눌 수 있고요.


프리즘에 회의적인 냇, 프리즘을 이용해서 돈을 벌 궁리만 하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모로, 학창 시절의 실수로 인해 관계가 악화된 데이나와 비네사 (나쁜 길로 빠지게 됐다고 하죠). 이들을 통해 '선택'의 문제에 대해 고찰합니다. 즉, 이 작품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또는 예전의 TV  프로그램 '인생극장'처럼 다른 선택에 대한 미련을 갖습니다. 선택되지 않은 것에 대한 결과가 궁금한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프리즘을 통해 그러한 것을 확인합니다.


그러한 선택은 배타적일 수도 있는데요, 가령 지구의 내가 한 선택은 다른 평행자아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양자 얽힘과는 달라서 반드시 다른 결과가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닌데요, 우주가 분기되기 위해서는 같은쪽보다는 다른 쪽으로 가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결과이지 않을까 싶어요. 게다가 계속 분기가 되면서 평행우주는 최소한 두 개 이상이 되는데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양자 얽힘이 두 개 이상 존재할 수 있다는 설정은 무리라는 생각도 들고요. 


이어 테드 창은 평행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또 철학적인 물음으로 들어갑니다. 앞서 얘기한 선택에 대한 문제 이외에도, 평행자아들 중 누군가의 선택이 전체적으로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하는 것이죠. 그리고 어떠한 결정을 해도 우주적으로는 그 결과가 다 상쇄되므로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러나 모든 선택의 모든 가능성이 균등하게 분포하는 것은 아니므로 비균질성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선택의 무효성은 옳지 않다는 얘기라고 볼 수도 있겠죠.


물론 각각이 평행세계는 다 독립적이며, 설사 얽혀있다고 하더라도 물리적인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정신적, 정서적으로 영향을 미칠 따름이죠. 그것은 각각의 평행세계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만약 선한 선택을 한다면 미래도 선하게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는데요, 저자는 그렇다는 쪽으로 얘기를 하는 듯합니다.


또한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식으로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 얘기하기도 하는데요, 이러한 미래결정론은 그의 다른 단편들에서도 여러 차례 나온 바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맞을지는 모릅니다. 검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판단은 각자의 몫이고, 그에 대한 선택도 각자의 몫이겠지요. 결국 여기에서도 '자유의지'로 귀결되는 듯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데이나에게 소포를 보낸 것은 누구였을까요? 




이렇게 <숨>의 남은 부분까지 다 읽어보았습니다만, 사실 <숨>에 실린 작품들이 생각보다는 평이하게 느껴졌어요. 이미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 많이 다뤄졌던 소재들이 많이 나와서 그랬을 수도 있겠고요. 하지만 표제작 <숨>은 그 상상력이 놀라워서 저는 원픽으로 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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