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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Jul 25. 2024

만해 한용운의 '님'은 누구인가?

한용운 (1879-1944)

만해 한용운


만해 한용운은 승려이자 시인, 소설가, 사상가, 독립운동가였다. 그러한 다양한 활동으로 인해 그를 다양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그가 각각의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만해는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현재 행정구역 기준. 출생 당시에는 충청도 결성현) 본명은 '정옥'이지만 아명인 '유천'으로 불렸고, 이후 불교에 귀의하면서 '용운'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법호는 '만해'다. 


그는 어려서부터 향리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소양을 쌓는 기반이 되었다.


14세가 되던 1892년에 전정숙과 결혼하여 1904년에 아들 보국을 낳았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만해는 아내가 임신 중일 때 출가했다. 아들은 그가 출가한 후 태어났다. 


그가 출가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가 1930년에 쓴 「나는 왜 중이 되었다」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부친의 죽음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의 부친은 충훈부 종5품 도사를 지내다가 1894년에 이승우의 참모관이 되어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던 도중 전사하였다. 이는 어린 그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며, 삶에 대한 회의를 갖게 했을 것이다. 더욱이 청일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움을 느끼고 무작정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1896년부터 고향을 떠나 여러 절을 다니며 불교 공부를 했다고 하나 당시의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정식으로 출가하기 전에도 이미 불교에 심취하여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1905년에 그는 백담사에서 영제스님에게 수계를 받았는데 이때 계명(봉완), 법명(용운)과 법호(만해)도 함께 받았다. 만해는 불교를 비롯해서 동양철학과 서양철학도 공부하였고,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이후 만해는 직접 세계를 다니며 더 많은 공부를 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는 먼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갔지만, 한인들이 그를 일진회 첩자로 오해하여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가까스로 탈출하여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190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시모노세키, 교토, 도쿄, 닛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불교와 서양철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이때 근대문물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면서 측량 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일본에서 측량술을 배우고 측량기를 사서 조선으로 돌아와 1908년 12월에 경성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만들고 소장이 되었다. 여기에서 측량기술을 가르치며 직접 측량도 하였는데 이를 통해 조선인들 및 사찰의 토지를 지키고자 하였다. 일본인들은 측량을 허위로 하면서 조선인들의 토지를 수탈해 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만해는 1910년에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하였으며, 이 책은 1913년에 발행되었다. 그는 조선 불교의 쇄신이 필요하다고 보고 개혁에 앞장선 것이다. 이 책은 승려 교육의 문제, 포교의 문제, 경전 해석의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불교의 현실 참여를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불교학자 서경수는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당시의 정치적 외적 정세와, 불교 내부의 완고한 보수성 때문에 불발탄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1910년대 당시에는 가장 선구적이고 혁명적인 논문”이라고 고 하였다.


또한 1914년에는『불교대전』을 편찬하였다. 이는 기존의 불교 경전의 편찬 방식과는 달리 경전(팔만대장경 등)의 방대한 분량을 핵심적인 내용 위주로 주제별로 엮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불교계 및 경전의 해석 문제 해결을 위한 집필 활동에 주력하는 동시에 그는 대외적인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은 불교계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선의 사찰이 모두 일본 조동종의 예속하에 들어갈 것을 우려하여 1911년에 동래 범어사에서 '한일불교동맹조약 체결 반대 집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1914년에는 조선불교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렇듯 그의 초기 활동은 대체로 승려이자 불교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일본에 대한 저항 운동도 함께 하면서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는 한일강제병합 직후인 1910~1911년에 만주, 시베리아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거처를 찾아다니며 격려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여러 차례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의지는 굳건하였다.




『유심(唯心)』창간호 표지


1918년에 만해는 불교 월간지 『유심(唯心)』을 창간한다. 여기에서 그는 조선인들에게 현실 문제를 인식하고 깨어날 것과 불교 수양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창간호에「심(心)」이라는 신시를 수록하였는데 이 시가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학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로 평가한 주요한의「불노리」보다 몇 개월 앞섰기 때문이다. 「심」 전문은 다음과 같다.



심心은 심이니라

심만 심이 아니라 비심非心도 심이니 심외心外에는 하물何物도 무無 하니라

생生도 심이오 사死도 심이니라

무궁화도 심이오 장미화도 심이니라

호한好漢도 심이오 천장부賤丈夫도 심이니라

신루蜃樓도 심이오 공화空華도 심이니라

물질계도 심이오 무형계無形界도 심이니라

공간도 심이오 시간도 심이니라

심이 생生하면 만유가 기起하고 심이 식息하면 일공一空도 무하니라

심은 무無의 실재오 유有의 진공眞空이니라

심은 인에게 누淚하고 여與하고 소笑도 여하나니라

심의 허虛에는 천당의 동량도 유하고 지옥의 기초도 유하니라

심의 야野에는 성공의 송덕비도 입立하고 퇴패의 기념품도 진열하나니라

금강산 상봉에는 어하魚蝦의 화석이 유하고 대서양의 해저에는 분화구가 유하니라

심은 하시라도 하사何事 하물何物에라도 심 자체뿐이니라

심은 절대며 자유며 만능이니라



마치 불교 경전의 구절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시는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여기에서는 그의 '유심관(唯心觀)'이 드러나며, '심'은 이후 '님'으로 이어진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유심』은 3호를 끝으로 폐간된다. 하지만 만해는『유심』발행을 통해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교류가 생기게 되었다. 


고재석은 『유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닫혀졌던 역사의 문을 3·1독립운동이라는 역사의 횃불로 열고자 동분서주했던 한용운은 이 잡지의 간행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종단의 지원 없이 잡지를 낸다는 것은 한 개인으로서는 너무 벅찬 일이었다. 또한 총독부가 정교 분립을 지향한 이 잡지를 그냥 방치해 둘 리도 없었다. 3·1운동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중단되고 말았지만, 『유심』 지는 한용운의 문학을 잉태시킨 출발점이자 1910년대를 대표하는 불교 지성들과 민족진영의 지성들이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는 이념적 좌표를 유심과 수양주의에서 찾았던 잡지로서 그 문학사적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1919년 1월에는 불교계 대표로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논의하였는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독립을 선언하기로 한다. 이에 최남선이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만해는 이를 수정하고, 뒤에 '공약삼장'을 덧붙인다. 공약삼장을 추가한 것이 누군가를 두고 논란도 있으나 대체로는 만해가 추가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당시에는 '독립청원'과 '독립선언'을 두고 민족대표들 간에도 이견이 있었는데 만해는 초지일관 '독립선언'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관철하였다. 그리하여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외치고 곧바로 일본 경찰에게 자진 체포되었다. 


만해 한용운의 서대문형무소 수감표


이후 한용운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받고 수감되었다. 일본은 특히 그가 추가한 '공약삼장'을 문제 삼아 '내란죄'를 적용하였다.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라는 조항 때문이었다. 일본의 계속되는 심문에 만해는 「조선독립이유서」로 답변하였다. 만해는 이를 일본 검사에게 제출하는 한편, 몰래 외부로도 반출하여 상해의 독립신문에도 게재가 되어 조선인들에게 독립의 의지를 고취시켰다.


만해는 옥중에서 여러 편의 한시와 시조, 시를 썼는데 그 시들에는 수감 생활 중의 그의 심경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조선의 독립을 염원한 것들도 있다. 그중에서 특히 「무궁화 심으과저」가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시는 이후 1922년에 『개벽』에 게재되었기 때문인데, 만해는 이 시에서 자유와 독립을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이 무렵부터 만해는 시인으로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옛 나라에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마음 비춘 달아

계수나무 베어내고

무궁화를 심으과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님의 거울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 와서

나의 품에 안긴 달아

사랑으로 도우고자


 달아 달아 밝은 달아

가이 없이 비친 달아

쇠창을 넘어 와서

나의 넋을 쏘는 달아

구름재를 넘어 가서

너의 빛을 따르고자.



만해는 감형되어 1921년에 출옥하였다. 이후 그는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시작(詩作)에 몰두하여 오세암에서 약 80여 편의 시를 썼다. 그리하여 1925년 8월에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한다. 이 시집은 1926년에 회동서관에서 발행되었다.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초판 표지


그가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단기간에 썼다는 주장과 오랜 기간에 걸쳐 썼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는데 대체로는 1925년 경, 단기간에 썼다는 주장이 더 받아들여진다. 


만해가 이미 이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이를 여러 잡지 등을 통해 발표하기는 했지만 시집을 발간할 계획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25년에 들어서 갑자기 시집 『님의 침묵』을 쓰게 되었는데 그가 시집을 내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이는 그동안의 그의 삶과 활동, 사상이 집약된 결과이며, 그것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라고 보인다. 그는 시를 쓰고자 하는 열망을 늘 갖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1924년에 발행된 최남선의 『백팔번뇌』에 대한 반감 때문에 시집을 내게 됐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


『님의 침묵』에는 표제시인 「님의 침묵」을 비롯해서 「알 수 없어요」, 「나룻배와 행인」, 「복종」 등 총 88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의 대표작들은 너무 유명하고, 정규 교육과정에서 대부분 배웠을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인용은 생략한다.




만해의 시 연구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님이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또한 『님의 침묵』에서는 '님'보다 '당신'이 더 많이 쓰였으며, 이 외에도 너, 그대, 애인 등의 호칭도 사용되었다. 만해가 시집의 구성에서 의도한 바일 수도 있지만 시집의 앞부분에서는 대체로 '님'이 많지만, 중간부터는 '당신'으로 대체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대체로는 이들을 모두 동일시하므로, 여기에서는 통칭하여 '님'으로 하겠다.


시집의 서문 격인 「군말」에서 만해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님’만 님이 이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拘束)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학교에서 그의 시를 배울 때는 대체로 '조국'으로 간주한다. 그가 독립운동을 하였기에 당연히 추정할 수 있는 결과다. 하지만 그의 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단순히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님'에 대해서는 민족, 조국, 민중, 불타, 중생, 불교의 진리 등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물론 그것이 단일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의 복합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만해의 '님'은 그의 신념이자 그의 지향점, 그리고 그가 절대적으로 순종하고자 했던 대상일 것이다.


한국문학사에서 '님'은 많이 등장하며 정서적으로도 친숙한 존재다. 물론 작품마다 그 대상이 다르기에 동일선상에서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작품 속에서 님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러한 과정에서 작품 속의 '님'은 자연스럽게 독자가 생각하는 '님'으로 전환된다. 즉,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님'을 상정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독자가 생각하는 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만해의 시가 대중적으로 사랑받고 학교에서도 배우는 이유는 그의 그동안의 행보가 바탕이 되기는 하지만, 작품들 자체가 가진 문학성 때문이다. 그의 시들은 그의 평소 모습이나 언행과는 다르게 상당히 서정적이다. 특히 여성적인 어조를 지니고 있어 화자가 여성이라는 인식이 많은데 이는 종종 김소월의 여성적 어조와 비교되기도 한다.


『님의 침묵』에 수록된 시들은 대체로 비슷한 감상을 주는데 이는 이 시들이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창작되었으며, 동일한 주제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게 때문에 너무 단조로우며, 지루하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그의 시들은 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선시(禪詩)'에 가깝기 때문에 그 해석이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이는 그 시들이 너무 많은 은유와 불분명한 의미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차원적 해석만으로는 그의 시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또한 시집 전체를 기-승-전-결의 구조로 배치했기 때문에 그러한 관점에서 감상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표제시 「님이 침묵」에서는 이별의 슬픔과 기대림이 순차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러한 구조는 시집 전체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즉 만해는 그러한 작품들을 통해 이별(슬픔)-기다림-재회(기쁨)의 구조를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님의 침묵』은 시문학사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1920년대는 현대시, 자유시가 점차 발전되어 가는 시기였기에 그 초창기에 만해의 이 시집은 근대시로서의 한국시가 어떻게 발전해 나갈 수 있는지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시는 그 흐름을 지속하여 더 확장되어 나갈 수 있었다. 


더욱이 당시에 프랑스 상징주의를 비롯하여 서구의 시 이론이 유입되던 때라, 그는 한국적, 민족적 정서를 기반으로 한 시가 가능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에 과몰입하는 하지 않는 균형감도 발휘하였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시집 한 권으로 이뤄낸 것이었다.




만해는 1927년에 신간회 발기인이 되어 신간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는 한편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그는 특히 여성과 노동 문제에도 관심을 두었다. 1931년에는 불교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간행함으로써 불교청년운동과 불교의 대중화 운동을 벌였다. 이렇듯 1920년대 후반 이후 그의 활동은 주로 대중 사업에 집중된다. 


만해는 대처승(결혼한 승려)을 주장하였기에 결혼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다만, 전처였던 전정숙과는 이혼하고 이후 1933년에 유숙원과 재혼한다. 만해와 유숙원 사이에는 딸 영숙을 두었다.


1933년에는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현재 주소지)에 심우장을 세웠는데, 이때 조선 총독부를 보기 싫어서 북향으로 세웠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심우장은 만해를 위해 여러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지어 준 것이었다. 심우장은 유숙원과 결혼하기 전에 짓기 시작한 곳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가 가정을 이루어 사는 곳이 되었다. 


서울 성북동 성북동 심우장


이후 만해는 일제의 황민화에 반대하였는데, 특히 창 씨 개명과 조선인 학병 출병에 반대하였다. 


만해는『님의 침묵』발행 이후에는 시집을 발행하지 않았다. 이후의 문예 활동으로는 「흑풍」(1935), 「후회」(1936), 「박명」(1938) 등 장편소설을 조선일보에 연재로 발표한 것과 1936년에 『불교』지에 「철혈미인」을 연재한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한시, 시조를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만해가 소설을 발표했던 것을 잘 모르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는 이미 1924년에 장편소설인 『죽음』을 썼지만 발표하지는 않았다. 그의 소설에 대해서는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었는데, 그는 전문적인 소설가는 아니었으며, 자신도 그러한 한계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나타내기 위해 소설의 형식을 취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소설들은 대체로 중간에 연재가 중단되는 경우가 많아 완전한 구성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다. 


그가 조선일보에 연재를 하게 된 이유로는 환속하여 재혼함으로써 다시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신문에 연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독립운동의 기금으로 쓰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타당성은 있지만 확증하기는 어렵다. 또한 소설에 대해서는 본 연재의 범주를 넘어서기 때문에 이 정도의 언급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만해는 1944년 6월 29일에 심우장에서 뇌졸중으로 입적하였다. 향년 66세였다. 광복을 1년 앞두고 눈을 감은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는 이들도 많다. 


가난했던 만해의 장례식은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을 비롯해서 150여 명의 성금으로 치러졌다. 그의 시신은 화장 후 망우리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시신은 모두 탔지만, 치아만 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가 생전에 발표하지 않았던 작품들은 이후 1971년에 외솔회가 펴낸 『나라사랑』제2집에 「만해 한용운 특집」으로 수록되었다. 여기에는 시 17편과 시조 17편이 실려있다.


1948년에는 최범술, 박광, 박영희 등이 만해의 작품들을 취합하여 정리하기 위해 '만해 한용운 전집 간행위원회'를 결성하였으나 한국 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의 중단이 있었으나 마침내 1973년에 신구문화사에서 『한용운전집』을 전 6권으로 간행하였다.


이후에도 1974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만해문학상'을 제정하였고, 여러 지역에서 만해를 기리는 기념관들을 건립하였다. 특히 그의 생가도 복원되었으며, 그가 주로 기거했던 백담사 인근에는 '만해마을'도 조성되었다. 모든 것이 만해가 남긴 유산이다. 


강원도 인제군 '만해마을' 정경


만해는 『님의 침묵』의 발문 격인 시 「독자에게」에서 다음과 같이 남겼다.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



그는 시집을 탈고하면서 20년 뒤에 광복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을까? 그의 시가 그의 입적 80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 사랑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자신의 시가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지는 않다'라고 했지만 본심은 계속 기억해 주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참고문헌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현대시인론>, <한국현대문학사> 강의

고재석, 「한용운의 해방적 관심과 소외의 변증법」, 『한국 근현대문학지성사』(재인용)

김동근, 정민구, 김청우, 『한국현대시인탐방』, 심미안, 2018

김삼웅, 『만해한용운 평전』, 시대의창, 2012

김재홍, 『한용운문학연구』, 일지사, 1982

서경수, 『조선불교유신론』, 『한국의 명저2』, 현암사 (재인용)

임중빈, 『만해 한용운 (사르비아총서 102)』, 범우사, 2015

한용운,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5 (소와다리 복간본)

강성천, 「해설」,『님의 침묵 (사르비아총서 408)』, 범우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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